[나행복] 02 : 나는 커서 날 만났던 사람들이 되겠지

그동안 만났던 수많은 영향에 관하여
글 입력 2020.02.21 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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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여행 중이라고 말하면 가장 먼저 듣는 소리는 대단하다는 거였다. 혼자 여행한 경험이 제법 있어 이젠 아무렇지도 않은 나에게는 평범한 일이지만, 한 번도 혼자 여행해본 적 없는 사람에게는 멋지게 보일지도 모른다. 사실 여행을 가기 위해선 제법 많은 행운이 뒤따라야 한다. 여행을 갈 자금과 시간이 존재하고, 여행지나 여행 그 자체에 대해 알려주는 사람도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나는 제법 운이 좋은 사람이었고, 이전의 글에서 이런 행운을 전시한 것처럼 느껴졌을까 봐 염려된다. 여행은 내가 처음으로 가족과 가장 오래 떨어져 혼자 있을 수 있던 시간이었고, 그런 만큼 큰 영향을 주었다. 내가 행복했던 순간을 곱씹어보면 가장 먼저 나오는 게 여행 다녔던 날일 정도로. 그렇다고 내게 주어진 행운을 부정하지는 않는다.
 
여행이라도 다녀오면 어떠냐는 부모님의 말씀에 옳다구나 현실 도피하듯 여행을 준비했지만, 불안하지 않았던 건 아니다. 여행 자체를 자주 해본 편도 아니고, 주도적으로 준비한 적은 더욱 없는데 갑자기 모든 걸 혼자 하려고 하니 막막했다. 이때 걱정을 덜어주던 건 여행을 간 적 있는 주변 사람이었다. 아는 것 하나 없이 막막한 길을 주변 누군가가 먼저 가봤다는 걸 아는 것만으로도 힘이 생긴다. 저 사람도 했는데 난 못할 게 뭐야. 아는 언니는 자기도 처음에는 많이 걱정했는데 별거 아니었다며 용기를 주었고, 덕분에 무사히 여행을 마칠 수 있었다.
 
여행을 가기 전에 어렴풋하게 기대한 게 몇 가지 있었다. 버즈의 노래 제목처럼 나에게로 떠나는 여행. 나를 더 잘 알게 되고, 성숙해서 돌아올 수 있을 거라는, 로망이 만든 환상이다. 가본 사람이라면 알겠지만, 그런 거창하고 추상적인 목표를 나 역시 이루지 못했다. 그래도 멋지고 유명하며 색다른 풍경이나 건물, 음식을 제외하고도 많은 것을 느끼고 돌아왔다. 우물 안의 개구리일 때는 알 수 없었던, 많은 사람의 생각과 태도.
 
 


 
일전에 다른 글에서 말했듯 프라하에 가기 전 인도와 체코에서 온 친구를 만난 적 있다. 같은 게스트 하우스에서 머물렀는데, 그게 인연이 되어 하루 정도 같이 여행을 다녔다. 꽤 많은 이야기를 나누다 문득 주제가 쌀이 되었다.
 
인도에서 주로 먹는 쌀은 푸석하고 잘 날리는 가벼운 쌀이고, 반대로 한국에서 자주 먹는 쌀은 끈끈하게 점성이 있는 쌀이다. 일상에서 푸석한 쌀을 먹으면 질이 별로라고 하거나, 맛이 없다고 하는 말을 근근이 들었기 때문인지, 자연스럽게 한국에서 주로 먹는 자포니카 형이 질 좋은 것이고 찰기 없는 인디카 형은 질이 떨어진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니 인도 친구가 자신은 찰기가 없는 쌀이 더 맛있다고 말하고 체코 친구가 동의했을 때 얼마나 당황했는지 모른다. 인도 친구가 말을 덧붙였다. 물론 취향 차이일 뿐이라고.
 
당연하다. 어릴 때부터 차진 쌀을 먹은 나는 당연히 차진 쌀을 좋아하고 어릴 때부터 푸슬한 쌀을 먹은 인도 친구는 당연히 푸슬한 쌀을 좋아한다. 다른 품종의 가치가 떨어지거나 우열을 가릴 수 있는 게 아니라 익숙함의 차이다. 그때 친구의 말이 오래 기억에 남는다. 내게 익숙한 것이 절대적인 건 아니다. 모든 것에 우위가 확실하게 존재하는 것도 아니다. 그런데도 1인칭 시점만 존재하는 인생에서 모든 사람은 자기중심적으로 생각하기에 늘 조심해야 한다는 걸 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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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로나에 도착했을 땐 기진맥진했다. 밀라노에서 기차를 한 번 갈아타야 했는데, 밀라노까지 가는 기차가 2시간 정도 지연됐다. 밀라노에 내렸을 땐 이미 다음 기차 시간을 놓친 뒤였다. 베로나로 가는 기차를 무료로 타기 위해선 센터에 찾아가 절차를 밟아야 한단다. 그날따라 밀라노에서 코엑스 행사가 있어 사람이 아주 많았다. 순번 표를 뽑고 한참을 기다려 내 차례가 되었는데, 지연된 기차 관련 문의는 다른 곳에서 받아야 한다며 다른 센터를 알려주었다. 시간이야 좀 지체될 수 있지만 베로나에서 묵기로 한 게스트 하우스의 체크인 시간이 오후 9시까지였다. 이러다 베로나에서 노숙을 해야 하는 건 아닌지 불안해졌다. 차마 누구에게도 말할 수가 없어서 불안해하다 겨우겨우 베로나에 도착했으니 지치지 않을 리가 없었다.
 
어느 새 해가 졌다. 노숙하게 되어도 우선 숙소에 찾아가 사정 설명을 해보자는 생각으로 밖을 나섰는데, 버스 정류장이 생각보다 넓었다. 어디서 버스를 타야 할 지 모를 만큼 많았고. 다 놓고 쉬고 싶은 마음을 다잡고 근처에 계신 노인분께 어디서 버스를 타야 하는지 여쭤보았다. 그분은 친절하게 우선 버스표를 사야 한다고 말씀하시곤 한 번도 안 쓴 자신의 버스표를 건네주셨다. 당신은 아직 한 번 더 쓸 수 있는 버스표가 있다고 하시면서. 버스까지 데려다주신 후 기사에게 어디에서 내려달라고 부탁까지 해주셨다. 바닥에라도 누워 쉬고 싶고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던 내 마음을 녹여준 그분이 내 이탈리아의 첫인상이었다. 다정하고 섬세한 배려.
 
그분께 받은 배려가 컸던 탓에, 한국에 돌아와서도 외국인이나 도움을 청하는 사람을 보면 최대한 친절하게 대하려고 한다. 누군가에게는 간절한 배려일 수 있고, 한숨 돌리는 계기가 될 수도 있는 걸 알게 되었으니까.
 
비슷한 친절은 게스트 하우스에서 만난 한국인 모녀에게서도 겪었다. 한국인이 전혀 없는 지역이었는데, 운명처럼 게스트 하우스에서 만난 두 분은 내게 고추장으로 요리도 해주시고, 큰 지도 하나에 유럽 여러 나라의 지역마다 가볼 만한 곳, 음식점 등 추천할 곳을 적어 선물로 주셨다. 자신도 일전에 여행하다 만난 사람에게 이런 지도를 받았다고 설명했다. (이 지도는 추후 유럽 여행을 가려는 친구들에게 필수로 보여주고 지도하는 지도가 되었다.) 딸이 내 나이에 혼자 여행을 갔는데, 그때는 스마트폰도 없어 어머니께서 매일 이메일 함을 확인하며 가슴 졸이셨다고 한다. 딸이 혼자 여행을 잘 다녀오자 자신도 용기가 생겨 혼자 여행을 가게 되었고, 그러다 이제는 둘이 같이 유럽을 여행 중이라고.
 
그런가 하면 멕시코에서 만난 부부는 자전거를 타고 세계를 일주하는 중이라고 하셨다. 남편분께서 자전거로 유럽을 횡단하던 중에 결혼했다고 한다. 남편분은 벌써 몇 년이 되었다고 했던 것 같다. 온몸에 상처가 있는데도 즐겁게 웃는 두 분의 모습이 참 보기 좋았다. 저런 삶도 있구나. 저렇게도 살 수 있구나. 나중에 언젠가 부모님과 같이 자유 배낭여행을 하거나 혼자 자전거를 타거나 배낭여행이더라도 세계 일주를 하고 싶었다. 모든 사람이 똑같이 사는 건 아니라지만, 나와 다르게 살아가는 사람을 직접 보니 더 큰 자극을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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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 여행을 간 건 20대 초였다. 그때 나는 고학번이었고, 주변에서 항상 취업 준비며 미래에 대한 구상이며 말하는 통에 나이가 많다고 여겼다. 바로 엊그제까지 고등학생이었던 거 같은데 벌써 후배가 잔뜩 생긴 탓이기도 하다. 그런데 외국에 나와 보니 만난 사람 대부분이 나보다 나이가 많았다. 어린데 대단하다는 말을 들으면서 생각도 유연해졌다. 이젠 무엇도 새로 시작하지 못할 나이가 되었다고 생각했는데, 아직 아무것도 시작하지 않은 나이였다. 아마 여행을 가 다양한 나잇대의 사람을 만나지 못했더라면 시간이 지난 후에야 그때 내가 참 어렸다는 걸 알았을 것이다. 작은 우물 안에서는 초등학교 5학년도 자신이 어른이라고 생각하는 법이니까.
 
스위스에서 만난 한국인 무리는 교환학생 방학 기간에 여행을 나온 것이라고 했다. 우연히 만났는지 교환학교가 위치한 나라도 각기 달랐다. 그들은 교환학생을 꼭 추천했다. 다른 나라에서 살면서 배우는 게 참 많다고. 그 나라의 문화나 생각을 배우는 것 외에 혼자 타지에서 살게 되니까 무엇이든 스스로 해야 하고, 적극적이 되며 느끼는 점이 많아진다고 했다. 러시아식 사우나 바냐에 대해 들은 것도 이때였다. 한국식 불가마만큼 뜨거운 사우나에서 몸을 데운 후 차가운 호수에 빠지는 걸 반복한다던 이야기는 한국에서 결코 할 수 없는 문화처럼 느껴졌고, 교환학생을 가고 싶다는 생각을 가지게 된 결정적 계기였다. 여행 중 새로운 사람을 만나 이 말을 듣지 않았다면 잠깐이라도 1년이나 외국에 나갈 생각을 했을까.
 
“사람은 다른 사람과 대화하면서 기존에는 할 수 없던 다른 생각이나 동기를 얻곤 하잖아. 난 그게 되게 중요하다고 봐. 난 내가 선한 영향력을 줄 수 있는 사람이면 좋겠어.”
 
중구난방의 이야기 뒤에 왜 이런 뜬금없는 말을 하느냐.
 
나와는 달리 다른 사람을 만나 대화하는 걸 좋아하는 친구가 있다. 한 번은 아들만 둘인 작은아버지와 대화를 했는데, 같은 회사에서 근무하는 2, 30대가 회식도 즐기지 않고 퇴근 후에 바로 집에 가는 부분이 서운하다고 말했던 모양이다. 친구는 요새는 회식을 하나의 업무라고 여기고 자기의 시간을 가지는 것을 중요하게 여기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작은아버지의 아들들은 아버지와 별다른 얘기를 하지 않는 탓인지 이런 얘기를 해준 사람이 처음이었다고 한다. 친구는 이어 세대 차이가 나는 이유는 다른 세대끼리의 소통이 부족한 면도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시간이 변하면서 사람도 변하는데, 아직 과거의 기억에 살거나, 살길 고집하는 사람과 과거의 상황을 모르거나 이해하려 하지 않으려는 사람이 부딪히기 때문에 세대 차이가 나지 않겠느냐는 거였다. 그러니 누군가는 말해야 하고, 대화가 중요한 것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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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는 서로 주고받았던 영향력으로 번졌다. 가령 친구는 내가 여행을 잘 갔다 왔다는 사실을 알고 자신도 여행을 가야겠다고 결심했단다. 다른 친구는 일 년에 두어 번 가족 여행을 간다. 매년 가족 여행의 주최자가 달라지는데, 주최자가 원하는 지역을 정하고 계획을 세우면 가족은 군말 없이 주최자의 계획에 맞춰 움직인다고 했다. 가족여행에 로망이 생긴 나는 그대로 말했고, 몇 년 전부터 우리 가족도 같은 형식으로 여행가기 시작했다.

살면서 나는 대단히 많은 선한 영향력을 받아왔다. 비단 여행할 때뿐만 아니라, 태어나서 죽기 전까지 영향을 받지 않은 시간은 없다.
 
어릴 때 친구와 크게 다툰 적이 있었다. 서먹해진 상태로 하루를 지내려니 마음이 불편했는데, 그렇다고 어떻게 해야 할지도 알 수 없어서 거북한 일상을 보냈다. 평소처럼 다가온 친구는 자신이 무엇을 실수했는지 말하고, 사과하고, 그럼에도 이해가 되지 않는 내 행동에 관해 설명했다. 싸우고 난 후에 대화하면 감정적으로 행동하게 되는 나와 달리 매우 차분한 모습에 굉장히 놀랐다. 이런 식으로 화해한다는 걸 알게 되었다. 이후 싸움이 일어나면 최대한 이때의 경험을 떠올리려고 노력하며 대화하려고 노력한다. 항상 잘 되는 것은 아니고, 가끔은 기회나 타이밍을 못 잡아서 엉거주춤 예전처럼 행동할 때도 있지만, 그럼에도 조금은 화해를 요청하고 마음이 편해지는 일이 잦아졌다.
 
1년간 룸메이트였던 언니는 무척 부지런한 사람이었다. 같이 침대에 누워 뒹굴다가도 이래선 안 된다 카페에 가 공부했다. 게으른 내가 1년 동안 룸메이트를 보며 환골탈태하듯 똑같이 부지런하고 성실한 사람으로 바뀐 것은 아니지만, 가끔 내가 통제할 수 없을 만큼 게으를 때 언니를 떠올린다. 가끔은 난 왜 이렇게 의지박약일까 자괴하게 되는 원인이지만, 때로는 저렇게 열심히 사는 사람도 있으니 나도 열심히 해야겠다는 목표가 된다.
 
친구가 운동을 시작하면서 꾸준히 올리는 식단과 운동량을 보면서 나 역시 자극을 받아 조금이라도 더 움직이려고 하는 것도 같은 방향의 영향력일 것이다. 대화의 끝에 친구는 위와 같이 말했다. 선한 영향력을 줄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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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을 만나는 걸 좋아하지 않는 나에겐 이 대화 전까지 타인의 행동이나 대화가 영향을 끼친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했다. 연결해서 생각하지 않았다는 것에 가깝겠다. 그러나 친구의 작은 아버지 이야기에서부터 여행, 선한 영향력에 관한 이야기까지 마치자 비로소 인지했다. 그 순간에도 친구에게 영향을 받아 누군가와의 대화를 무작정 꺼리거나 불편하다는 이유로 피하지 말자는 다짐을 하게 되었으니 말이다.
 
태어난 모든 아이는 완벽하다지만, 태어날 때부터 완벽한 사람은 없는 게 사실이다. 아이는 어른의 행동을 보고 배운다. 나의 모습은 지금껏 내가 만나왔던 사람들의 모습이라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니다. 무엇이 되었든 최대한 많은 경험을 해본다면, 나의 모습 역시 조금 더 다채로워진다. 머릿속에서 나를 바꿔준 많은 사람이 스쳐 지나간다. 그들 또한 나의 어떤 부분에는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나는 부정할 이 영향력을 생각하면 어쩐지 쑥스럽다.
 
내 모습에 숨어있는 타인의 행동, 타인의 행동에서 묻어나는 나의 경험. 이 세상에 나 혼자 있다면, 나 같은 사람만 존재한다면 더 성장할 기회가 주어질까. 힘들고 지쳐 이불 속에만 갇히고 싶은 날 친구의 선한 영향력이란 말이 문득 떠올랐으면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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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원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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