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다양성 영화를 찾는 시네필의 우월감과 차별 [문화 전반]

시네필 문화의 기저에 깔린 스노비즘(snobbism)에 대하여
글 입력 2020.02.22 1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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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든지 시네필이 되는 시대



다양성 영화를 찾는 관객이 해마다 늘어나고 있다. 최근 개봉한 영화 <작은 아씨들>은 누적 관객 50만 명을, 영화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은 개봉 23일 만에 12만 명을 돌파하며 극장가를 뜨겁게 달군 바 있다. 소위 '아트버스터(Artbuster)'라고 불리는 영화는 상업 영화 못지않게 흥행하는 다양성 영화를 일컫는데, 이는 대체로 관객들 사이에 입소문이 퍼지면서 알려진다. 가령 SNS에 영화 포스터와 함께 리뷰를 공유한다거나, 굿즈 인증샷을 통해 자신의 취향을 드러내는 관객문화는 작품이 널리 알려지는 데 기여한다.


동시에 예술영화관들은 관객 저변 확대를 위해 관객의 적극적인 참여를 이끄는, 커뮤니케이션 성격이 강한 프로그램과 이벤트를 위주로 기획하고 있다. 예컨대 CGV아트하우스의대표 프로그램인 '톡 프로그램'은 영화 관련 인사들과 영화를 관람하고 대담하는 프로그램으로 관객들의 호응이 좋은 편이다.

 

더욱이 SNS의 리뷰 계정과 작품을 분석하는 유튜브 채널 등 쏟아지는 콘텐츠 덕분에 다양성 영화를 쉽고 빠르게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한 영화 컨퍼런스에서 이선주 한양대학교 현대영화연구소 연구교수는 “영화 상영뿐만 아니라 각종 시네마클래스를 포함한 영화교육, 영화도서관의 기능까지 포괄하는 CGV아트하우스를 위시한 멀티플렉스 사업이 희한한 한국의 시네필 문화를 형성하고 있다”[1]고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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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조건 어렵고 난해하다는 선입견을 떠나 누구든지 영화에 입문하는 것은 물론, 더 나아가 '시네필(Cinephile)'이라는 정체성을 스스로 부여하는 시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필자는 이러한 현상을 긍정적으로 바라본다. 그리고 누구나 좋은 작품을 알게 되면 공유하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는가. 그리하여 각자의 계정에 짧은 단상을 올리기도 하고, 최근에 봤던 작품에 대한 감상을 나누기도 한다. 그 과정에서 몰랐던 작품을 알게 되거나 다른 해석의 가능성을 엿보게 된다. 이처럼 '공유'한다는 건 언제나 좁은 세계를 조금이나마 확장하고, 팽창하게끔 한다.

 

그러나 필자를 포함한 예술 전공자 혹은 문화예술에 관심이 많은 이들과 다양성 영화에 대해 대화를 나눌 때면 가끔은 불편해지는 경험을 한다. 다시 말해 특정 영화에 대해 잘 안다는 것, 혹은 어떤 취향을 갖고 있다는 것을 공유하는 일이 유쾌하지 않을 '때'가 있다는 말이다. 그 경우는 대개 "대중영화에 의도적인 경멸을 표하거나, 고전 영화에 대한 방대한 지식을 자랑한다거나, 독립 다큐멘터리의 사회정치적 의의에 관해 열변을 토하는 등"[2] 다양한 양상으로 나타나곤 한다.


 

 

정체 모를 불편함, 원인은 무엇일까?


 

많은 경우 볼 수 있는 시네필 관객 행동의 이면에는 은밀한 욕망이 담겨 있다. 그것은 바로 '과시의 욕망'이다. 즉 '나의 영화적 지식과 취향은 당신보다 우월하다'는 것을 드러내는 데서 오는 일종의 '구별 짓기(distinction)'의 폭력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예시를 다음 인용문을 통해 살펴보도록 하자.

 

 

(중략) 그러한 차이는 중요한 의미를 나타낸다. 그 차이는 종종 사회를 구별하기 위해 사용되는데 연기자의 경우도 그러하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들이 유럽의 예술영화에 나오는 잘 안 알려진 배우, 예컨대 장 피에르 레오를 좋아한다고 하면, 그들은 암암리에 자신들을 대중적인 배우를 좋아하는 사람들과 구분하고 있는 것이다.[3]

 

 

유럽의 예술영화에 나오는 잘 안 알려진 배우를 좋아한다고 해서, 학계에서 인정을 받았거나 영화사에 한 획을 그은 작품을 좋아한다고 해서 문제가 되는 건 아니다. 각자의 취향은 존중받아 마땅하지 않은가. 다만 "자신을 타자와 다른, 보다 우월한 정체성을 지닌 인간으로 구별짓고 만족감을 얻으려 하는 심리적인 경향"[4]은 경계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값싼 만족감에 지나지 않을뿐더러 누군가에게는 폭력으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현상을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Pierre Bourdieu)의 관점에서 바라볼 수 있다. 그는 경제적 자본이라는 기존의 관념에서 벗어나 자본을 세 가지 유형이 있음을 지적한 바 있다. 문화적 자본(가족과 학교에서 얻는 지적, 미학적 능력), 사회적 자본(사회활동으로 얻은 사회적 관계망), 상징적 자본(신용, 인정, 명예, 자격)으로 비록 경제적 자본을 얻지 못한 사람도 앞서 나열한 형태의 자본을 소유함으로써 자신을 타인과 구별하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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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관점에서는 "시네필 문화 일각에서 보이는 양태 또한 문화적 자본과 상징적 자본, 더 나아가 학연의 사회적 자본까지 결합된 형태의 '구별짓기'일 수 있다. 아울러 수직화되고 경직된 인간관계를 보이는 한국 사회에서는 유독 시네필 문화의 기저에 깔린 스노비즘(snobbism)"[5]을 발견하게 된다. 여기에서 스노비즘이란 지적 허영을 과시하면서 도덕, 윤리적인 우월감을 자랑하는 태도를 일컫는다. 스놉이라는 개념은 "본래 영어 단어 'snob'에서 하류층 사람들이라는 의미만 내포하고 있었으나, 19세기부터 신사인 척하며 젠체하는 허영심 많은 사람을 의미하게 되었다."[6]

 

가령 아트나인에 영화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을 보러 가는 사람이 있다고 생각해보자. 그는 신분을 뛰어넘는 여성 간의 연대와 평등의 메시지를 통해 전율하고 감동할 수 있다. 또는 탄탄한 각본과 좋은 대사에 깊은 감명을 받을 수도, 각자의 감상 포인트에 따라 다양한 경우의 수로 작품을 향유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다양성 영화를 향유한다는 그 자체, 거기에서 오는 타인에 대한 우월감 내지는 알맹이보다는 껍데기만 빌려 과시하려는 욕망은 스노비즘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열린 마음과 건강한 문화



물론 인스타그램 속 잘 정돈된 이미지가 또 다른 자아를 표상하듯이, 취향은 한 사람의 정체성을 대변하기도 한다. 그렇기에 영화 취향이 곧 나를 구성하는 이미지이자 정체성의 한 부분처럼 여겨질 수 있다. 다만 그 영화의 창작 문법을 알아볼 줄 아는 능력이 있다고 더 높은 가치를 지닌 사람이라고 할 수도, 자신보다 모르는 이들을 한심한 부류의 사람이라고 생각할 수도 없다. 이는 곧 우월한 취향의 표상이 되고 말 것이다.


필자의 논지가 다소 위선적으로 느껴질 수도 있다. 필자도 위와 같은 경험을 한 적이 있으니까. 더구나 인간이라면 어느 정도 작품을 그 자체로 향유하면서도, 이를 즐긴다는 사실 자체에서 약간의 만족감을 얻을 수도 있으니까. 어떤 사람은 속물적인 스놉이지만 또 다른 사람은 도덕적, 윤리적으로 올바른 사람이라고 명확하게 규정할 수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적 허영심과 과시 욕망으로 인해 '닫힌 문화'를 만들어내는 것을 지양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예술이라는 의미가 다양성, 즐거움의 확장, 순수한 유희이자 놀이 등 어느 쪽에 해당하든 간에 문화적, 심리적, 계급적 장벽을 허문 채 열린 마음으로 향유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그렇게 된다면 더욱 건강한 문화를 만들어나갈 수 있지 않을까. 어떤 영화를 봤는지보다 각자의 시선으로 무엇을 봤는지가 본질에 가까울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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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항상 묻는다. 무슨 영화를 보았느냐 대신에, 그 영화에서 무엇을 보았느냐고. 생각을 더 해야 한다. 그것만이 영화를 보고 나서 죽지 않는 유일한 방법이다. 당신이 생각을 멈출 때 당신은 영화를 본 시간만큼 사실상 죽은 것과 마찬가지이다.”[7]

 

- 영화 평론가, 정성일


 

 

참고문헌

[1] 임수연, 씨네21, “[한국영화 100년②] 한국영화 100년 국제학술대회 현장에 가다”,  2019.11.06.

[2] 조재휘, 「예술영화전용관과 시네필 문화의 미래」, 『오늘의 문예비평』, 2018, 198쪽. 

[3] 폴 맥도널드, 「스타연구」, 조안 홀로우즈 · 마크 얀코비치 엮음, 문재철 옮김, 『왜 대중영화인가?』, 한울, 1999, 146-147쪽. 

[4] 조재휘, 앞의 글, 197쪽.

[5] 조재휘, 앞의 글, 197쪽.

[6] 나무위키, “스노비즘”.2020.02.21.

[7] 감동훈, 채널예스, "영화를 보고 나서 죽지 않는 유일한 방법 - 『언젠가 세상은 영화가 될 것이다』", 2020.0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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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은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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