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남겨진 사람에게 줄 수 있는 가장 큰 위로 - 뉴필로소퍼 Vol.9

글 입력 2020.02.13 1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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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필로소퍼>는 ‘일상을 철학하다’라는 슬로건의 철학 잡지다. 학창 시절, 지적 허영심을 채우고자 유명한 철학책을 닥치는 대로 읽었던 적이 있다. 제대로 소화했을 리가 없다. 철학을 알고 싶어서가 아니라 유식한 사람이라는 타이틀을 얻고 싶다는 생각 밖에 없었으니 말이다. <뉴필로소퍼>를 통해 오랜만에 철학을 접하니 느낌이 새로웠다. 그저 있어 보이기 위한 도구였던, 어렵고 딱딱하게 느껴졌던 철학이 나의 친구처럼 느껴졌다.

 

이번 문화초대는 처음 공지를 봤을 때부터 신청하는 날을 손꼽아 기다렸다. 한시라도 빨리 읽고 싶었다. 그렇게 <뉴필로소퍼>가 내 손에 들어왔을 때, 표지만 봐도 기분이 좋았다. 바쁜 일상에서 틈틈이 잡지를 읽을 때마다 무채색의 삶에 색채가 더해지는 것 같았다. 이번 독서로 나는 죽음을 인지하는 삶이 얼마나 충만한지를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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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지는 여러 사람의 칼럼과 인터뷰를 통해 죽음에 관해 나눌 수 있는 거의 모든 담론을 담아내었다. 사람은 언젠가 죽는다. 이 간단한 명제는 우리의 삶에 수많은 화두를 던진다. 죽음을 인식하는 태도와 같은 내면의 문제부터 임종간호, 환경파괴 등 사회적인 문제까지 잡지가 다루는 죽음은 아주 광범위했다.

 

잡지의 매력은 여러 사람의 각기 다른 이야기를 한 권에 모두 만날 수 있다는 점이다. <뉴필로소퍼> 9호에도 각 분야의 권위자들이 전해주는 수많은 죽음 이야기가 있었다. 모든 글이 다 좋았다. 인터뷰를 읽을 때는 생각지도 못한 방식으로 죽음과 마주하는 이들이 흥미로웠고, 칼럼을 읽을 때는 감히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깊은 사유에 감탄했다.

 

많은 사람이 죽음을 두려워한다. 죽음 이후에 벌어질 일을 모르기 때문이다. 주변에서, 뉴스에서 수많은 죽음을 접했다. 하지만 그게 다였다. 그들은 닿을 수 없는 곳으로 사라졌고 나는 그들이 사라진 현실을 살아갈 뿐이었다. 수많은 사람이 사후세계에 관해 떠들어대지만, 아무도 내게 정답을 알려줄 수 없다. 그런데 책은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죽음을 두려워 할 필요가 없다고 말한다.

 

 

우리는 대부분 존재하지 않는 상태를 매우 두려워한다. 하지만 누구나 예전에, 즉 태어나기 전에는 존재하지 않았었다. 어느 누구도 자기가 한때 존재하지 않았다는 생각에 겁을 먹거나 화를 내지 않는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째서 과거에 존재하지 않았었다는 사실은 괴로워하지 않으면서 미래에 존재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에는 그렇게 겁을 먹을까?

 

- P.12

 

 

로마 철학자 루크레티우스의 기발한 주장에 뒤통수를 한 대 맞은 기분이었다. 죽음 이후에 천국에 갈지, 지옥에 갈지, 완전히 소멸할지 확신할 수 있는 이는 아무도 없다. 죽음은 실체가 없다. 물처럼 인식하는 태도에 따라서 완전히 모습을 달리한다. 그러니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거창한 노력은 필요 없다. 어떻게 마음먹느냐에 달려 있다. 많은 글이 다양한 주제로 죽음을 논했지만, 모든 필자가 위와 같은 태도를 지니고 있었다.

 

모든 글이 다 좋았지만, 가장 인상적인 건 세네카의 <죽음 속에 큰 행복이 있다>라는 글이었다. 특별히 구어체로 이루어진 글은 동생의 죽음에 슬퍼하는 ‘당신’을 향해 죽음은 비극이 아니라 삶의 번뇌와 압박에서 벗어나는 행복이라고 말한다.

 

 

동생은 운명이 아직 그에게서 호의를 거두기 전에, 아직 그의 곁에 머물며 마음껏 삶의 선물을 퍼주고 있을 때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는 지금도 끝도 없는 하늘을 자유롭게 누비며 즐거워하고 있습니다. 그는 이 비참하고 낮은 땅을 떠나 육신의 구속에서 벗어난 영혼들을 행복한 품안에 맞아주는 높은 곳으로 훨훨 날아올랐습니다. 그는 지금도 거기에서 신나게 돌아다니며, 자연의 모든 축복을 누리는 최상의 행복에 젖어 있습니다. 그러니 당신은 착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 P.134-135

 

 

누군가의 생애가 일찍 마감될 때, 그 생애를 안타까워하곤 했다. ‘이렇게 했으면 더 살 수 있었을 텐데, 더 살았으면 좋았을 텐데’라는 생각을 갖곤 했다. 세네카의 글을 읽고 내가 철저히 산 자의 입장에서만 생각했다는 걸 깨달았다. 삶의 깊이는 기간으로 결정되는 게 아니다. 이 세상을 조금 빨리 떠났다고 해서 함부로 비극의 주인공으로 만들어선 안 될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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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원래부터 죽음이라는 소재에 관심이 많다. 죽음을 다룬 것이라면 영화, 책, 음악 모두 가리지 않고 좋아한다. 이번 <뉴필로소퍼> 9호에 흥미를 느낀 것도 ‘삶을 죽음에게 묻다’라는 부제 때문이었다. 나에게 죽음은 오랜 친구다. 이유를 설명하자면 어렸을 때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어느 날 집에서 아빠가 사라졌다. 엄마와 언니들이 아빠가 몸이 안 좋아서 병원에 있다고, 너는 어리니까 얌전히 집에서 기다리라고 했다. 그래서 기다렸다. 기다림 끝에 돌아온 건 아빠가 아니라 돌아가셨다는 소식이었다. 그때 나는 ‘사람이 병원에 간다고 해서 무조건 건강해져서 돌아오는 게 아니구나.’ 라고 생각했다. 그날 이후로 내게 죽음은 다시 돌아오지 않는 것으로 인식되었다. 당시 내 나이 일곱 살이었다.

 

한 사람의 인생에서 가족의 죽음이 미치는 영향은 굉장히 크다. 많은 이가 가족을 떠나보낸 뒤 그리워하기도 하고 깊은 실의에 빠지기도 한다. 나는 아니었다. 하나도 슬프지 않았고, 일상은 평온하기 그지없었다. 나는 아빠가 그립지 않았다. 그리움은 기억이라는 양분을 먹고 자라는데, 내겐 아빠에 대한 기억이 거의 없었다. 파편처럼 조각난 이미지만 떠오를 뿐이었다.

 

내 인생에서 아빠의 빈자리는 별로 크지 않다. 처음부터 아빠의 자리가 있었는지도 의문이다. 내게 ‘아빠’와 ‘죽음’은 같은 단어다. 아빠란 존재가 아무렇지 않다는 말은 곧 죽음도 아무렇지 않다는 뜻이다. 그런데 영화 <코코>를 봤을 때만은 그렇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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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코코>의 한 장면

 


<코코>는 소년 미구엘이 사후세계를 모험하는 이야기를 담았다. 죽음은 부정적이고 사후세계는 삭막하게 묘사하는 수많은 작품과 달리 <코코>의 사후세계는 몹시 발랄했다. 색채는 화려했고 사람들은 축제에 들떠있었다. 주인공 미구엘 말고는 모두가 망자인데 영화의 톤은 시종일관 밝고 유쾌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영화를 그저 가벼운 가족 애니메이션이라고 치부해서는 안 될 일이다. 영화는 후반부를 향해 달려가면서 떠나간 사람을 기억하는 행위가 얼마나 숭고한지 보여준다. 영화를 보다가 갑자기 눈물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나중에는 거의 오열 수준이었다. 기억해주는 누군가가 있는 한, 그 존재는 이 세상에서 완전히 사라진 게 아니라는 영화의 메시지에 눈물을 멈출 수 없었다. 영화를 보고 그를 떠올리며 오열하는 내가 있으니 어쩌면 우리 아빠도 완전히 사라진 게 아닐지도 모른다.

 

아빠가 내 인생에 어떠한 영향력도 미치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그와 관련된 기억도 없고 그만큼 그를 그리워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그럴 리가 없었다. 그는 내 인생에서 처음으로 이별을 가르쳐준 사람이었다.

 

어떤 이별은 시간이 한참 지난 뒤에야 무게를 실감한다. 문득 그가 생각날 때 짧은 먹먹함을 느끼곤 했다. 하지만 그게 눈물로 이어진 적은 없었다. <코코>를 보기 전까지 말이다.

 

나는 사후세계를 믿지 않았다. 그래서 아빠가 완전히 소멸했다고 믿었다. 영화를 보고 사후세계는 어쩌면 남겨진 사람에게 위안을 주기 위해 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위안을 얻고 나서야 실은 내가 그의 죽음을 슬퍼했다는 걸 깨달았다.

 

내가 가장 인상적이었다고 뽑은 세네카의 <죽음 속에 큰 행복이 있다>의 다른 제목은 <폴리비우스에게 보내는 위로>다. 내가 그 글을 좋아하는 이유는 결국 나 역시 위로 받았기 때문이었다.

 

내 마음을 울린 또 다른 글이 있다.

 


가장 중요한 사후 세계는 죽은 후 자신이 사랑한 사람들의 마음속에 살아 있는 것이다.

 

- P.125

 

 

나는 내가 언젠가 죽을 것이라는 사실보다 언젠가 남겨질 것이라는 사실이 더 무서웠다. 나의 죽음엔 초연했지만, 타인의 죽음엔 그렇지 못했다.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한 아빠의 죽음도 내게 조금은 영향을 미쳤다.

 

죽음은 비극이 아니다. 그러니 나보다 먼저 세상을 떠난 그들 역시 비극의 주인공이 아니다. 이 잡지를 읽고 그동안 안타까워했던 수많은 죽음에게 눈물 대신 미소를 지을 수 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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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금미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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