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사랑 말고도 할 말이 많은 아이다와 암네리스의 이야기 [공연예술]

이번 시즌을 끝으로 재탄생할 뮤지컬 ‘아이다’를 기대하며
글 입력 2020.02.11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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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즈니의 대표적인 뮤지컬 <아이다>는 누비아의 공주 아이다와 이집트 장군 라다메스, 그리고 라다메스의 약혼녀 암네리스 사이의 이야기를 그린다. 서사의 큰 줄기가 왜인지 어디선가 많이 듣고 보았던 뻔한 사랑 이야기일 것이란 편견에 빠지게 한다. 남성 캐릭터의 각성을 위해 도구로써 소비되는 여성 캐릭터를 뜻하는 말인 ‘냉장고 속의 여자’나 여성 캐릭터의 쓰임을 가늠하기 위한 ‘벡델 테스트’가 화두에 오를 만큼, 수많은 문화 콘텐츠에서는 아직도 여성이 남성 서사의 보조를 위한 납작한 인물로 등장한다. 남자 주인공은 꿈, 혹은 명예와 사랑 사이에서 갈등하지만, 여자 주인공은 사랑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한다. 또 그들 사이엔 항상 훼방을 놓는 아버지와 약혼녀가 존재한다. 하지만 뮤지컬 <아이다>는 그 모든 클리셰의 정반대 지점에 서 있다.

 


 

사랑과 조국 사이에서 고민하는 인물, 아이다


 

아이다는 누비아의 공주이지만, 그 사실을 숨긴 채 이집트에 포로로 끌려온다. 라다메스는 포로임에도 불구하고 이집트 군대에게 칼을 들이밀며 저항하는 아이다에게 관심을 갖게 된다. 두 사람은 서로 같은 꿈, 즉 나일강을 항해하며 모험하는 자유를 꿈꾼다는 것을 깨닫고 점점 사랑을 느낀다. 라다메스는 사랑이라는 감정에 잠시 혼란을 느끼다가, 그 감정을 받아들이고 모든 것을 내건다. 누비아인들에게 전 재산을 내어주고, 아이다를 지키기 위해서 반역자가 되는 것에도 망설임이 없다.

 

반면 아이다는 극 내내 자신을 둘러싼 문제들에 대해 계속해서 고민하며 판단하려 노력한다. 아이다가 공주임을 알아본 누비아인 메렙에게 아이다는 노예로 끌려온 현실의 무력함을 토로하며 신분을 밝히지 말아 달라고 부탁한다.


 

난 이제 너와 같은 노예 내 삶이란 없어

 

- ‘How I Know You’



하지만 메렙은 누비아인들에게 공주가 노예로 이집트에 왔음을 알리고, 누비아인들은 우리에게 새로운 삶을 줄 사람은 아이다밖에 없다며 그의 용기, 지혜와 의무에 불을 지핀다. 그 기대와 의무의 부담에 괴로워하던 아이다는 간절한 누비아인들을 보며 마침내 불가능성을 넘어 더 강인한 마음으로 자유의 날을 되찾을 것을 다짐한다.



내 백성들 기대가 날 짓눌러 

내 능력 밖이란 것도 알아

의심할 수도 약해질 수도 없어

이 의무가 불가능하겠지만 

허나 그 꿈에 불을 붙인다면

그걸로 충분해 

충분해 

 

- Dance of the Robe



하지만 동시에 적국의 장군인 라다메스를 사랑하게 되어버린 아이다는 사랑을 원하는 자신과 조국을 지키고자 하는 자신 사이에서 혼란한 감정을 느낀다. 그리고 아버지와 누비아를 위해서는 결국 사랑을 포기해야 함을 예감하고 괴로워한다.


하지만 그 괴로움의 순간에도 아이다는 좌절하며 약해질 모습을 기대하는 세상을 비웃으며 절대 쓰러지지 않을 것이라 말한다. 라다메스와의 사랑을 복잡한 인생들에 사이에 살아있는 사랑이라 표현하면서, 사랑을 포기해야 할 땐 그것이 인생처럼 쉬운 일이라 노래하는 모순적인 비유로 아이다는 관객들에게 혼란하고 괴로운 마음을 가감 없이 드러낸다.



지금 이 순간 신들은 원하겠지 

나약한 내 모습을 

하지만 난 아냐 

내 자신은 내 스스로 지키겠어

이 모든 것을 쉽게 끝내는 그 길은 

그이를 향한 내 사랑 포기하는 것

인생처럼 쉬운 일이야 

 

- Easy as Life



아이다는 사랑 대신에 아버지를 구하고 누비아로 돌아가기를 택한다. 그리고 라다메스에게 나와 내 동포들을 위해서라면 암네리스와 결혼하라고 말한다. ‘당신이라도 행복하라’는 의미의 결혼이 아닌, 나를 위해 희생하라는 의미의 결혼을 요구하며 아이다는 자신의 욕망을 숨김없이 표출한다. 라다메스가 결혼식을 치르는 사이, 아이다는 아버지를 배에 태워 누비아로 보내고, 뒤쫓아 온 라다메스의 아버지와 이집트 군인에게 체포된다.

 

그렇게 아이다는 라다메스나 주변 인물들의 영향이 아닌 자신만의 치열한 고민 끝에 스스로 답을 찾는 주체적인 인물의 모습을 계속해서 보여주었다. 대의와 의무, 사랑 사이에서 갈등하는 인물의 서사가 새롭다고 말할 순 없으나, 남성 캐릭터의 각성이나 위로를 위해 존재하는 대상화된 여성이 아닌 자신의 삶을 위해 고뇌하고 스스로 각성하는 여성 캐릭터는 분명 새롭고 ‘재미’있다.

 

 

 

'말하는 주체'로 성장하는 인물, 암네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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벡델 테스트의 세 가지 조건 중 하나는 ‘남성에 대한 것 이외의 다른 대화를 나눌 것’이다. 이런 사소하고도 당연해 보이는 일이 테스트의 기준이 될 정도로 서사 안에서 여성은 목소리를 잃었다.

 

뮤지컬 <아이다>는 아이다만 주인공으로 내세우지 않는다. 사실상 <아이다>는 암네리스가 말해주는 ‘증오의 시대에 살던 연인들의 사랑 이야기’이다. 오프닝에서 박물관의 전시장 안에 굳어있던 암네리스는 전시장 밖으로 걸어 나와 이야기를 시작하고, 관객들을 머나먼 과거로 초대한다. 암네리스가 들려주는 아이다와 암네리스의 사랑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파라오의 딸이자 라다메스의 약혼자에서 ‘말하는 주체’로 성장하는 암네리스가 실질적인 주인공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암네리스는 공주로서의 화려한 모습을 기대하는 사람들의 시선에 맞추어 사는 인물이다. <아이다>의 대표적인 넘버 중 하나인 ‘My Strongest Suit'는 암네리스가 자신이 입은 옷이 또 다른 나라며 화려함을 뽐내는 장면이다. 하지만 넘버가 끝나고 아이다와의 대화에선 그 화려함 속 자신의 내면에는 슬픔이 있다고 고백한다.

 

슬픔과 진실한 내면은 옷으로 가린 채 외모치장과 라다메스와의 결혼을 바라보며 살던 암네리스는 아이다와 라다메스의 절절한 사랑 고백을 우연히 듣게 된다. 아이다는 라다메스에게 암네리스와 결혼하라며, 그것이 자신과 누비아인들을 도울 수 있는 길이며, 우리 만남의 의미라고 말한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진실한 사랑을 나누지 못하는 고통스러운 현실에 안타까워한다. 암네리스가 '약혼녀’라는 틀에 갇힌 여성 캐릭터였다면, 두 ‘주인공’의 사랑을 막아 비극성을 극대화하는 장치로서 존재가치를 가지며 아이다를 비난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 말을 들은 암네리스는 눈 감은 채 살아왔던 자신을 돌아본다. 결혼도, 화려한 옷도, 진정한 삶의 의미를 외면하기 위한 허상이었음을 깨달은 암네리스는 눈을 뜨고 세상을 바라보기 시작한다. 영광스럽다고 생각했던 이집트의 전쟁이 단지 힘없는 자들을 약탈한 것이란 것을 알게 된 암네리스는 차고 있던 장신구를 벗으며 ‘이제 더 이상 아름다워 보이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동안 왜 아무 생각 없이 살아왔던 걸까

… 

눈 감은 채 살아왔던 거야

더는 그럴 수 없어

… 

난 진실을 알게 됐어 

 

- I Know the Truth



암네리스는 자신이 앞으로 이집트를 다스릴 사람이라고 당당하게 선언하며, 반역자인 라다메스와 아이다에게 직접 처벌을 내린다. 하지만 둘의 사랑을 갈라놓지도, 약한 모습을 보이며 그들을 선처하지도 않는다. 암네리스는 위엄있는 통치자의 모습으로 그들을 함께 매장할 것을 명령한다. 암네리스는 진실을 알기 전, 침대에 누워 라다메스를 부르던 간드러진 목소리와는 정반대로, 확신에 찬 목소리를 가지고 국가의 문제에 대해 말할 수 있는 주체가 되었다.

 

그 후 파라오가 된 암네리스는 이집트와 누비아의 전쟁을 끝냈음을 알리며 이야기의 막을 내리고 오프닝의 박물관으로 돌아온다. 수백 번 다시 태어나도 서로를 찾겠다는 아이다와 라다메스가 그들의 무덤이 전시된 곳 앞에서 다시 만나고, 그 모습을 바라보는 암네리스는 마치 그들을 수호하는 초월적 존재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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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즈니가 <아이다>의 재정비를 위해 브로드웨이 프로덕션의 종료를 선언하면서 <아이다> 한국 공연은 피날레 무대를 선보이고 있다. 아무래도 한 나라의 공주가 포로로 끌려와 적국의 장군과 사랑에 빠진다는 이야기가 비현실적이면서도 진부한 면이 있다.

 

하지만 그 사랑을 대하는 아이다의 태도와 암네리스의 성장이 눈부신 작품이며, 다양한 장르를 넘나드는 음악과 화려한 안무, 무대 장치와 조명까지 너무도 좋은 작품이라 피날레 무대마저도 끝을 향해 가고 있다는 사실이 아쉽다. 재탄생한 <아이다>에서도 사랑 말고도 할 이야기가 많은 아이다와 암네리스를 만날 수 있기를, 지금보다 더 많은 이야기를 가지고 돌아오기를 바란다.

 


[정다영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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