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신념에 대해 질문을 던지다 - 연극 ‘마터’

신념이라는 이름으로 혐오하지 않으려면, 끝없이 질문해야 한다.
글 입력 2020.02.08 1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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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고 싶은 대로 믿는다’라는 말이 있다. 사람들은 보통 무언가를 볼 때 자신이 원하는 대로, 유리한 방식으로 보고 믿는다는 것이다. 신념이라 하면 왠지 더 정의롭고 대단한 것처럼 느껴지지만, 사실 신념 또한 한 개인이 믿고 싶은 대로 믿는 믿음일 뿐이다. 신념은 무조건 정당화될 수 없다. 그 신념이 어떻게 형성되었는지, 그 신념을 바탕으로 어떤 행동을 보이는지가 핵심이다.

 

연극 <마터> 속 벤야민도 극 내내 성경을 들고 성구를 읊으며 자신의 신념을 강하게 드러내지만, 사실 그 신념은 벤야민이 믿고 싶은 것을 믿은 것뿐이다. 마치 절대적 진리처럼 통용되는 성경은 사실 방대한 분량에, 저자도 제각각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대신 적은 것이지만, 저자에 따라 기록하고 전달하는 방식은 천차만별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해석의 여지도 편차도 큰 텍스트다.

 

벤야민은 성경이라는 텍스트를 자신의 혐오 표현을 정당화하려는 목적으로 해석하고, 그것을 진리이자 자신의 신념이라 믿었다. 극의 처음에서 벤야민은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음욕을 품고 여자를 보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라는 성경 구절을 근거로 비키니를 입고 수영 수업을 듣는 여학생들을 비난한다. 같은 방식으로 이혼한 엄마를 비난하고, 성소수자를 배제하고, 유대인 이름을 가진 로트 선생님을 혐오한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음욕을 품고 여자를 보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라는 성구만 보더라도 비키니를 입고 수업을 듣는 여학생을 비난할 것이 아니라, 그 모습을 보고 음욕을 품은 자신을 반성해야 한다. 바로 다음 구절에서는 ‘만일 네 오른 눈이 너로 실족하게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고 했다. 하지만 벤야민은 자신의 죄를 돌아보기보단 더 약자인 여성에게 화살을 돌리는 방법을 택한다. 사실 벤야민의 방식처럼 문자 그대로 성경을 해석해도 벤야민의 혐오 논리와 모순되는 구절은 많다. 성경은 살인하지 말라 했고, 서로 사랑하라고 말했다. 벤야민은 성경이라는 진리를 따르고 있는 것이 아니다. 더 손쉽게 약자를 혐오하고 배제할 수 있는 수단으로 이용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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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야민이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권력을 가졌기 때문이며, 주변 사람들이 그 권력에 동조하기 때문일 것이다. 벤야민은 다리가 불편해 따돌림당하는 게오르그를 끊임없이 가스라이팅한다. 자신을 믿어야 다리가 나을 수 있으며, 괴롭힘당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며 권력을 과시한다. 그리고 게오르그의 다리가 자라지 않자 ‘네가 하나님을 믿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라 ‘네가 나를 믿지 않았기 때문’이라며 그를 비난한다. 또 게오르그가 로트 선생님의 오토바이를 고장 내라는 자신의 명령을 따르지 않자 그에게 돌을 던진다. 벤야민은 신념이라는 이름으로 권력을 무기 삼아 혐오를 아무런 거리낌 없이 행한다.

 

벤야민의 혐오에는 오직 로트만 적극적으로 대응한다. 그 대립은 항상 교장 선생님의 중재로 끝이 나는데, 그것은 중재라기보단 로트를 가로막는 것이다. 로트가 당근과 콘돔으로 올바른 피임에 대해 교육하자, 벤야민은 옷을 모두 벗고 거부한다. 교장은 이 사건으로 로트에게만 경고를 내린다. 부당하다고 느낀 로트가 ‘제가 옷을 벗고 수업을 한 건 아니지 않느냐’고 항의하자 돌아온 말은 ‘그랬으면 더 매력적이었겠네요’였다. 벤야민이 아무리 혐오의 말과 행동을 쏟아내도 그를 제지하는 사람은 로트뿐이다. 교장 선생님은 그의 행동을 무시, 또는 은연중에 동조하면서 탓하기 쉬운 로트를 탓한다.

 

벤야민의 엄마는 매일 술을 마시며 벤야민이 저지르는 행동의 원인은 관심조차 갖지 않는다. 그리고 학교와 선생님에게 책임을 전가한다. 학교의 목사는 이런 벤야민에게 선교에 재능이 있다며 교회 모임에 끌어들이려 애쓸 뿐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벤야민은 자신이 가진 권력을 체감했을 것이고, 그렇게 행동해도 큰 영향이 없다는 점에서 본인의 신념이 옳은 것이라는 믿음이 더욱 완고해졌을 것이다.

 

이런 벤야민을 막기 위해 성경을 읽기 시작한 로트는 성경에서 벤야민의 주장과 모순되는 구절을 찾아 신은 틀렸다고 해석한다. 같은 텍스트지만 각자의 의도와 목적에 따라 정반대의 해석에 다다르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믿고 싶은 대로 믿는다’는 말이 다시 한 번 떠오른다. 로트는 성경을 근거로 유대인을 비난하는 벤야민에게 유대인을 긍정하는 성경 구절을 읊어준다. 그러자 벤야민은 로트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며, 사탄의 입을 빌려 말하고 있다고 거부한다. 같은 성경을 보고 이야기하고 있지만, 자신의 논리에 맞지 않자 어떠한 고민이나 의심없이 '사탄의 말'이라 치부해버리는 것이다.

 

또한 로트가 성경을 읽기 시작하자, 벤야민이 성경을 읽을 때와는 전혀 다른 결과가 나타난다. 로트의 애인은 그가 ‘예수쟁이’가 되었다고 비난하며 멀어졌고, 로트는 결국에는 학교에서 쫓겨날 위기에까지 이르러 자신의 발에 스스로 못을 박아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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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야민은 믿고 싶은 대로 믿었고, 그 신념이 확고해지는 데에는 주변인들의 신념도 중요하게 작동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신념은 정당하다고 말하기 어려워 보인다. 그렇다면 올바른 신념이란 무엇일까?

 

그것은 적어도 권력에 기반한 신념은 아닐 것이다. 사회는 다양한 구성원이 함께 공존할 수 있어야 한다. 누군가의 권력이 신념이라는 이름 뒤에 숨어 소수에게 상처와 피해를 준다면, 그것은 소수뿐만 아니라 사회 전체에 영향을 끼친다. 마치 교장, 목사 등으로 이루어진 극 중 학교 시스템처럼 그 권력이 당연한 사회가 되어 버린다. 또 그런 사회에서 로트 같은 약자의 목소리는 사라지고 점점 더 벼랑 끝으로 내몰린다. 성경, 혹은 다른 어떤 것을 신념으로 받아들이는 것과 그것을 혐오라는 방식으로 표현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혐오는 사유를 동반하지 않는다. 혐오는 근본적으로 오염과 부패에 대한 거부감 혹은 두려움에서 기인하며, 행동이 아닌 존재에 대한 감정 또는 정동이다. 사유를 거치지 않은 강렬한 감정은 혐오로 나타난다. 따라서 개인의 신념이 혐오를 동조하지 않으려면, 그 신념이 올바른 것인지 끊임없이 묻고 성찰해야 할 것이다. 나에게 묻고, 타인에게 묻고, 사회에게 물어야 한다. 그렇게 신념은 권력이 아닌 이해와 공감을 바탕으로 형성되어야 한다.

 

하지만 대개 사람은 권력이 있으면 공감과 포용은 거부하고 눈먼 채로 살기를 자처한다. 그리고 도리어 벤야민이 스스로를 순교자라 생각했던 것처럼 자신이 약자라는 편향된 사고에까지 이른다. 그런 벤야민 같은 이가 우리 사회에도 수없이 존재한다. 그래서 극을 보는 내내 불쾌하면서도 어떻게 할 도리가 없어 답답하다. 로트가 스스로 못을 박은 후 벤야민과 교장, 그 밖의 인물들과 상황은 과연 변했을까. 벤야민의 신념에 질문을 던질 사람은 이제 없는 것일까. 생각할수록 씁쓸해지지만, 이 연극 자체는 관객들에게 적절한 질문을 던진 것 같아 약간의 희망도 함께 느낀다.

 


[정다영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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