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명화 색다르게 바라보기 - 중경삼림 [영화]

복합적 언어사용과 병렬적 서사구조
글 입력 2020.01.31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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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경삼림》은 이제 국내에서 개봉한지 25년이 되었지만, 그 명성과 영향력은 여전히 강력하다. 왕가위 감독 특유의 풍성하고 섬세한 미장센은 세계적인 돌풍을 일으켰고, 영화에 담긴 영상미는 오늘날에도 변함없이 세련된 느낌을 담고 있다. 탐미주의 영화, 예술 영화로서 《중경삼림》은, 이제 중년이 당시의 관람객들에게는 잊지 못할 추억으로 남아있으며 소문을 듣고 찾아온 오늘날의 젊은 영화팬들에게는 여전히 신선한 자극을 선물한다. 시대적인 가치를 초월한 한 편의 홍콩 영화는 현재까지도 새로운 해석들을 생성하며 살아남아 있다.

 

영화의 각 장면에는 수많은 소재들이 교차하며 등장한다. 특정한 맥락 내에서 처음 등장한 각각의 소재들은 영화가 진행되면서 하나의 장면 내에서 한꺼번에 나타나 묘한 미장센을 형성한다. 이를 두고 각 소재의 상징성에 대해 다양한 논의가 오갈 수 있지만, 본 글에서는 상징성에 대한 이야기는 하지 않을 예정이다. 상징을 이야기하는 순간 상징의 적절성에 대한 논의가 오갈 뿐, 하나의 기호(sign)로서 소재가 가진 다양한 성질들에 대해 관심을 가질 수 없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영화에 등장하는 금붕어라는 소재는 주황색 물고기이고, 맹한 눈을 가졌고, 비늘은 반짝거리고, 지느러미가 길어서 물살에 따라 자유롭게 흐느적거린다. 하나의 장면 속에서 다른 여러 가지 피사체들과 어울려 금붕어가 한 장면의 미장센에 기여하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금붕어에게 “생명력” 혹은 “시선”이라는 상징성을 부여하게 되면 장면의 미적인 가치, 하나의 기호로서 영화에의 기여에 대해서는 생각하기 쉽지 않다. 이렇듯 상징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하면 소재를 바라보는 시선이 고정되고 다각도에서 처다보기 힘들어진다.

 

본 글에서는 영화에서 인상적으로 드러나는 두 가지 측면을 다루고자 한다. 우선은 영화에 등장하는 언어에 대해 이야기해보려 한다. 홍콩이라는 배경의 특성상 등장인물들이 사용하는 언어는 다양하게 나타난다. 홍콩이라는 지역의 특징으로 영어와 보통화(표준 중국어), 광둥어(중국어 방언의 하나)가 두드러지게 나타나며, 그 외에도 등장인물 하지무가 일본어를 구사한다. 영화의 내래이션, 그리고 등장인물의 발화에서 서로 다른 언어가 선택적으로 사용된다는 점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한다.


또 하나는 《중경삼림》의 형식에 관한 것이다. 영화에서는 독립적인 두 개의 “사랑 이야기”가 병렬적으로, 옵니버스 형식으로 연결되어 있다. 이 두 이야기에는 공통적으로 사랑과 이별이라는 요소가 등장하고 각 인물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해당 요소들을 수용한다. 두 편의 에피소드 속에서 영화의 구성과 줄거리가 연결되는 방식에 대해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크기변환]하지무+여인.jpg

 

 

 

《중경삼림》의 언어적 특징


 

두 편의 에피소드 중에서 첫 이야기는 남자 주인공 하지무와 한 여성의 이야기이다. 해당 에피소드에서는 다양한 언어들이 등장하며 사건이 전개된다. 하지무는 이별을 겪은 후 바에서 다른 여자와의 교류를 통해 옛 애인을 잊으려 한다. 그가 바에서 만난 사람은 마약을 밀매하는 일에 얽혀 총격전을 벌이고는 지친 몸을 끌고 바를 찾아온 여성이다. 두 사람이 바에서 만나고 같이 호텔로 향하기까지 각자의 시점이 교차되며 영화가 전개된다.


두 주인공이 내래이션을 통해 장면에 해설을 더할 때, 두 인물 모두 보통화(표준 중국어)를 사용한다. 두 인물 모두 언어에 능해 영화 속에서 영어, 광둥어, 보통화 등 세 가지 이상의 언어를 구사하는데, 일상에서 가장 흔히 사용되는 광둥어가 아닌 보통화를 이용해 내래이션을 한다는 점이 흥미롭다. 홍콩에서 일상적으로 소통할 때 구어적으로 주로 사용하는 언어는 보통화가 아니라 광둥어이다. 광둥어는 중국 광둥성과 홍콩, 마카오에서 주로 사용되는 방언이며, 표준 중국어와는 의사소통이 전혀 되지 않는다.


이들이 내래이션에서 보통화를 구사하는 것은 영화 관객에게 친근한 느낌을 주기보다는 일정한 거리를 두고 떨어져서 침착하게 설명을 하는 듯한 느낌이 난다. 특히 하지무의 내래이션이 특히 낯설게 느껴지는데, 편의점이나 샐러드가게 등의 일상적인 공간에서는 광둥어를 구사하다가도 중간에 갑자기 등장하는 내래이션에서는 보통화를 구사하기 때문이다. 국내의 홍콩영화 관람객들에게는 풍부한 감정이 실린 광둥어 악센트가 인상적으로 다가오기 마련인데, 하지무의 보통화 내래이션은 덤덤한 감정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내래이션과 대사 사이의 간극이 더욱 크게 느껴진다.


한편 두 남녀의 첫 만남에서 둘은 보통화로 대화를 이어나간다. 바에 앉아있는 낯선 여성을 보곤, 하지무는 광둥어, 영어, 일본어, 보통화로 말을 걸고, 여성은 보통화로 말을 걸었을 때 비로소 대답해주었다. 보통화로 진행되는 둘 사이의 대화는 영화를 오묘한 분위기로 물들인다. 광둥어와 영어 역시 가능한 여인이 대화할 언어로 보통화를 결정한 것은 ,어쩌면 일상적인 구어체가 아닌 딱딱하고 무정한 태도로 하지무를 대하겠다는 여성의 의지에서 비롯됐는지도 모른다. 가라앉은 분위기 속에서 보통화 대화는 계속 이어지고 둘은 함께 호텔로 향하지만, 호텔 속에서 여성은 피곤에 지쳐 잠들고 하지무의 내면만이 보통화 내래이션으로 설명된다. 해당 장면의 언어에서 드러나는 거리감은 영화의 묘한 분위기를 극대화시키게 된다.

 


 

병렬적인 사랑이야기


 

두 번째 에피소드에서 분위기 전환이 일어나는 데에는 여려 요소들의 변화가 영향을 미쳤다. 언어적인 측면에서 첫 에피소드와 대조적으로 두 번째 에피소드는 대화와 내래이션 모두 광둥어로 진행된다. 줄거리 속에서 남자 주인공인 경찰 663(이름은 등장하지 않음)과 여자 주인공 페이는 다른 언어 일체 없이 광둥어만을 사용한다. 내래이션의 언어와 대화의 언어 모두 구어체의 광둥어로 진행되기 때문에, 두 번째 에피소드는 전반적으로 관객에게 더 많은 감정과 이야기를 성심껏 전달하고 있는 느낌을 준다. 분위기 역시 차갑게 가라앉은 분위기의 첫 번째 에피소드와 달리 통통 튀고 재치있는 분위기 속에서 이야기가 전개된다.


이 외에도 물리적인 장소의 변화 역시 커다란 변화를 이끌어낸다. 첫 에피소드는 여주인공이 마약 밀매에 관여하는 만큼 홍콩의 누추한 상가 건물 내부와 위험한 뒷골목을 배경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이 장면들 속에서는 누렇고 파란 네온 불빛들이 교차해서 등장하며 현란하고 불안정한 기운이 느껴진다. 반면 두 번째 에피소드에서는 홍콩의 시장 거리와 경찰 663의 방이 등장하고 자연광이 주로 비쳐지기 때문에 훨씬 안정되고 일상적인 분위기가 만연하다.

 

이렇게 상반된 두 이야기가 영화 속에서 병렬적으로 이어지면서 하나의 작품을 조화롭게 완성하게 되는 데에는, 두 에피소드의 공통된 요소들이 기여하게 된다. 우선 두 이야기 모두 이별을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통일성이 부여된다. 특히 각 이야기의 남자 주인공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이별을 대하며, 이들이 이별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모습들이 특히 강조되고 있다. 첫 에피소드의 남자 주인공 하지무는 옛 애인이 좋아하던 파인애플 통조림을 모으면서 자신이 이별을 마주해야하는 순간을 지연시킨다. 유통기한이 5월 1일까지인 파인애플 통조림만을 찾아 구매하며 그는 5월 1일까지 실연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한다. 두 번째 이야기에서 경찰 663은 옛 애인이 남기고 간 편지를 읽지 않음으로써 이별을 마주하지 않으려 한다. 이별통보의 내용을 담고 있는 것이 명확한 편지를 그는 받지 않으면서 자신의 눈앞에 이별이 놓이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이 지점에서 단순한 사랑과 이별 이야기 이상의 가치를 《중경삼림》이 가지게 된다. 위와 같은 방식으로 표현된 이별과 인물의 대처 방식은 관객의 공감을 사며, 이러한 방식으로 표현된 이별은 관람객으로 하여금 직접 이별의 이야기를 마주하지 않으면서 간접적으로 이야기 속의 이별을 마주하게 한다. 사랑과 이별이 표면적으로 등장하지만 직접적으로 관객에게 다가오지 않고, 다양한 소재들과 섞여 이야기 속에 공존하게 된다. 이야기 속에는 다양한 소재들이 등장한다. 특히 두 번째 에피소드에서 경찰 663은 본인의 집에서 옛 애인에 대한 그리움을 특히 많이 느끼는 것으로 그려지는데, 그의 집 안에는 비행기 모형, 젖은 걸레, 비누, 금붕어 등의 이미지가 교차하여 나타난다. 이러한 다양한 이미지들과 공존하며 사랑과 이별이라는 대상들은 표면적으로 언급되지 않고 소재들과 섞여서 새로운 분위기를 형성하게 된다.


 

[크기변환]집안.jpg

 

*


《중경삼림》, 그리고 왕가위 감독의 영화에 대한 흔한 비판은, 개개의 미장센이 훌륭하지만 전체적인 서사적 개연성이 부족하다는 점이다. 이에 대해 반박하자면, 서사적인 개연성이라는 표현을 사용할 때에는, 영화가 관객에게 이해와 납득의 대상이라는 사실이 전제되어 있다. 왕가위 감독의 영화 속에서는 다양한 이미지들이 혼재되어 있고, 어느 하나를 상징적인 대상으로 지정하기에 무색할 정도로 복합적인 요소로 미장센이 완성된다. 특별한 해석이나 분석 없이 각 소재들이 화면에 제시되는 방식을 즐긴다는 마음으로 영화를 접할 때 이 영화의 가치가 두드러진다. 따라서 영화 자체에 서사적 개연성이 부족한 것은 당연한 결과이며, 개인적으로는 이러한 이유에서 이별에 대한 하지무의 직접적인 발화가 등장하는 첫 번째 에피소드가 덜 세련되었다고 생각한다.

 

영상으로는 표현될 수 없는 문자와 문학의 매력이 있는 것처럼, 언어로는 표현될 수 없는 영상매체의 매력 역시 있는 것이다. 《중경삼림》은 이러한 영상매체의 매력을 잘 표현하고 있다. 다양한 피사체들이 영상에 비쳐지면서 나타나는 묘한 분위기는 영상예술의 매력을 잘 보여준다.

 

《중경삼림》은 다양한 요소들, 문화의 문제, 언어의 문제, 영상미의 문제, 더 나아가 사회적 메시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측면에서 분석되고 평가되어 왔다. 모든 시각은 각자의 전제 속에서 유의미한 결론을 도출하지만, 개인적으로는 하나의 이야기나 메시지가 아닌, 시청각적인 형상과 이미지로서 받아들여보는 경험이 특히 가치있다고 생각한다. 여담이지만, 누군가의 해석에서는 마약밀매에 관여하는 여주인공의 모습이 홍콩 반환을 앞둔 상황에서 영국을 상징하고 있었다. 각자의 해석은 개인의 경험과 이해를 바탕으로 하기에 가치 있는 것이지만, 상징과 해석에서 벗어나 메시지성 없는 시선으로 예술을 한번 바라볼 것을 추천한다. 예술에서 벗어나 현실의 현상을 바라볼 때 그러한 시선의 경험이 도움이 될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

 




[한승빈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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