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SS] 당신의 불행을 선택하세요

글 입력 2020.01.28 1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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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밀레니얼 여성의 솔직한 성장담이자 자신을 찾기 위해 시도하는 (뜯어말리고 싶은) 끔찍하고 중요한 삶의 선택지를 따라가 기울어진 운동장에 도사리는 수많은 함정들을 그녀는 과연 피할 수 있을까?

 


 

우리에게 선택권이 있는가



선택권이 있다면, 불행을 선택할 사람이 과연 세상에 있을까? <당신의 불행을 선택하세요>라는 도발적인 제목을 보고 반사적으로 든 생각이다. 물론 살아가는 환경이 너무 열악해서, 더 불행한 것과 덜 불행한 것 중에 선택할 수밖에 없는 상황은 흔할 것이다. 그러나 책 속에서 계속 선택을 해야 하는 '당신'은 설정상 백인 중산층에 속하는 밀레니얼 여성이다. 이들은 과거와 달리 남성과 여성이 동등하며 여성도 사회적 성공을 거둘 수 있다고 배웠다. 여성 투표권도 없던 시기와 가정만이 여성의 영역으로 여겨지던 때를 생각하면 고무적이다. 한국과 미국이라는 차이가 있지만 나도 그와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런 우리가 이 '인생 게임'에서 선택할 수 있는 게 불행 뿐일까.


책은 특이한 형식이다. 장이 나눠져 있는 것도 아니고 처음부터 끝까지 연결이 되는 것도 아니다. 첫 장을 펼치면 다짜고짜 선택지가 나온다. '당신은 좌뇌형 인간인가 우뇌형 인간인가' 라고. 오기가 생겼다. 최상의 선택지는 없을지라도 더 나은 선택지를 선택해서 괜찮은 엔딩을 보고 싶었다. 하지만 몇 번 선택을 해 보고 나서 내 자신감은 무너졌다.


예를 들어, 초반에 '당신'은 스스로 글쓰기에 재능이 있다고 믿는 작가 지망생이다. 어떤 작가가 될 것인지 당신은 A,B,C 타입 중에서 골라야 한다. A타입의 문항을 읽다 보면 이 작가는 시크하고 까다로우며 대중보다는 평단의 관심을 더 많이 받는 타입임을 알 수 있다. B타입은 덜렁거리고 털털한 대중작가다. C타입은 예쁘장한 외모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적당히 소탈하고, 대중과 평단 모두를 만족시키는 타입의 작가다. 가장 이상적으로 보이는 C타입을 고르면 이런 문구가 튀어나온다.

 


거짓말하지 말라. 사실 C는 B를 가장 많이 선택한 사람의 환상 속에서나 존재한다. (중략) 몸매는 호리호리하고, 매일 글을 쓰고 칭송받는데, 이미 자존감이 높아 외부의 평가에 연연하지도 않는다. 38쪽



어떤 상황에서든 아름다움을 유지하지만 까다로워서는 안 되며, 뛰어난 능력을 가지고 있지만 타인을 압도할 정도여서는 안 된다. 현실에서 그런 여성은 거의 없는데도 미디어는 반복해서 불가능한 여성상을 보여주며 수많은 보통 여성들을 제촉한다. 미디어에서 그려지는 남성의 직업군과 성격, 나이대가 다양한 것과는 대조적이다. 이처럼 초반부터 이 책은 여성들이 얼마나 불가능할 정도로 완벽한 여성상을 목표로 잡고 있는지, 그리고 그런 여성상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현실과 어떤 괴리가 발생하는지 여러 선택지를 제시하며 묻는다. 선택지를 고르며 진행할수록 마음 속에 드는 의문은 '과연 나에게 선택권이 있는가'이다. 이제 막 게임을 시작한 '당신'의 삶은 벌써부터 위태위태하다.


 

 

많이 먹으면서 날씬한 여성 되기



책의 초반은 섭식장애와 관련된 선택지가 주를 이룬다. 설정상 당신은 몸무게에 강박을 갖고 있다. 당신은 매끼 칼로리를 꼼꼼히 계산하고, 많이 먹은 날에는 토해내기까지 한다. 뒤따르는 폭식은 이제 자연스럽다.

 


당신은 2018년을 살아가는 여성으로, 머릿속은 이미 스스로를 꼼짝 못하게 옭아매는 수많은 유혹과 기대, 모순된 버전의 상들로 가득하다.(중략) 어떤 경우에도 원하는 걸 다 먹으면서 순전히 과정이 즐거워서 운동하는 '날씬한 여성'은 될 수 없다. (중략) 자동반사적으로 머릿속에서 칼로리를 계산하는 습관을 버리고, 세상의 많은 것들에 더 관심을 가져보자. 가끔은 아예 몸의 존재 자체를 잊어버리는 것도 좋다. 77-78쪽



악순환에서 빠져나오는 데 거듭 실패하고 가까스로 고른 선택지의 결과다. 이 파트를 읽는 데 시간이 오래 걸렸다. 어떤 선택지를 골라도 몸의 강박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책 속 당신은 페미니스트인데도 그렇다. 섭식장애 상담사는 당신에게 몸무게가 그 여성의 내면과 아무 상관이 없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지 않냐고 묻는다. 당신은 그 점을 인정하면서도 현실에서는 날씬한 여성으로 살아가는 게 여전히 훨씬 더 유리하다고 반박한다. 아마도 당신은 페미니스트로서 의견을 표명할 때조차, 아니 어쩌면 오히려 페미니스트임을 자처하기 때문에 외적인 요소가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있을 수도 있다. 역사적으로 페미니스트를 향한 인신공격은 유구하다. 사람인 이상 그걸 완전히 무시하기란 결코 쉽지 않다. 화낼 가치가 없는 것과 실제로 화나는 것은 다른 문제다. 당신은 가능하다면 외적으로 공격받을 필요 없는 '예쁜' 페미니스트가 되고 싶을지도 모른다. 세상은 그런 사람의 말을 더 귀담아 들으므로.


현대 사회에서 날씬한 몸은 건강한 몸과 자주 동일시된다. 따라서 몸은 자기관리의 영역으로 취급된다. 건강해 보이는 몸에서 벗어난 몸, 특히 비만인 몸은 게으름의 산물로 오인되며 혐오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물론 이러한 외모지상주의가 비단 여성만의 문제는 아니다. 그러나 유난히 여성에게 몸의 기준과 조건이 세세하고도 까다롭게 제시되곤 하는 현실을 고려하면, 이 문제가 우리 모두의 문제라고 뭉퉁그려 말하기는 어폐가 있다.


여자 연예인들은 머리 끝부터 발끝까지 세세하게 평가의 대상이 된다. 사회적으로 성공한 여성일지라도 외모 평가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CEO든, 스포츠 선수든, 여성의 성과는 그의 외적 요소와 늘 결부된다. 여성을 향한 외모 압박은 섭식장애를 앓는 대부분이 여성이라는 결과로 나타난다. 이런 현실 속에서 위험한 수준의 다이어트를 하고, 무언가를 먹기 전에 습관적으로 칼로리를 계산하는 여성의 행동을 '개인의 선택'이라고 말하기 어렵다.


 

 

로맨스가 하는 거짓말



겨우 섭식장애 파트를 마무리하면 외로운 당신을 위해 '파트너 찾기' 선택지들이 준비되어 있다. 당신은 낭만적으로 생각되는 여러 상황을 연출하고 스스로 배우가 된다. 매력적인 내연녀를 연기하며 유부남과 밀회를 즐기려 하는가 하면, 나이 많은 남성 작가의 뮤즈가 되려 애쓰기도 한다. 여행지에서 운명적인 상대를 만나려 하거나 낯선 사람과의 섹스를 시도하기 위해 내키지 않는 모임에 나가 보기도 한다. '샴페인 한 병이면 오늘밤 나는 당신 거예요'같은 외설적인 농담을 건네기도 한다. 그러나 현실은 영화와는 다르다. 기혼 남성이나 나이 많은 작가에게 당신은 하룻밤 즐길 상대일 뿐이다. 운명적인 상대를 찾기 위해 시도하는 행동들은 대부분 우스꽝스럽거나 실망스러운 결과로 이어진다. 당신은 욕망되는 걸 즐기면서도 동시에 그들의 욕망이 당신을 파괴할까봐 불안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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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로는 선택지가 없기도 하다. 당신은 술에 취해 데이트 앱에서 만난 남자를 유혹하고 그가 보내준 우버를 타고 그의 집에 가지만, 막상 도착해서는 너무 피곤해서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다. 하지만 남자는 그런 당신의 의사를 존중하지 않고 섹스를 강행한다. 당신은 다음날 아침에 엄청나게 후회하지만, 그에게 먼저 성적인 농담을 건네고 그의 집에 제발로 걸어갔다는 사실이 자명하기에 아무에게도 자세히 말하지 못한다. 이것에 대한 불쾌함과 부당함을 털어놓으면 당신이 어떤 말을 듣게 되고 어떤 반응과 마주하게 될지는 이미 정해져 있기 떄문이다.

 

당신의 이런 행동은 알게 모르게 각종 미디어가 당신에게 주입한 여성상을 바탕으로 한다. 떠오르는 여성상이 두 가지 있다. 하나는 독립적이고 능력있는 싱글 여성으로, 치명적인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어 여러 남자를 홀리고 그것으로 자신의 가치를 확인하는 쪽이다. 다른 하나는 세상물정 모르는 어린아이에 가까운 여성으로, 자신을 진짜 세상으로 이끌어 줄 나이 많은 남성을 만나 '세기의 사랑'을 펼치는 것이다. 두 이야기는 아주 다른 것처럼 보이지만, 여성을 물(物)화한다는 점에서 비슷하다. 대상화된 여성들은 상대 남성과의 관계에서 자신의 가치를 확인하고, 더 많이 욕망되기 위해 애쓴다. 우리는 미디어가 만들어내는 여성상을 거울처럼 보고 배운다.


문제는 세상이 보여주는 여성상과 우리가 스스로 추구하는 여성상 사이에 명확한 경계가 없다는 것이다. 당신의 마음 속의 욕망이 어디에서 비롯된 것인지, 그것이 옳은 것인지 그렇지 않은 것인지 판별하기는 매우 어렵다. 그래서 당신은 계속 혼란스러워한다.


 

 

끝. 그리고...



많은 이들은 페미니즘이 필요없을 만큼 세상이 평등해졌다고 말한다. 오늘날 20대, 30대 여성은 여성도 성공할 수 있다고, 성공하라는 메시지를 들으며 자랐다. 하지만 사회가 정의한 성공에 다가가기 위해 여성은 자신의 능력 못지 않게 외모에 신경을 써야 하고, 여전히 일과 커리어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순간이 남성에 비해 훨씬 더 많다. 그런 과정에서 부당한 일이 발생했을 때, 나는 그게 개인의 능력이 부족한 탓인지, 구조적인 불평등의 문제인지 계속 고민한다. 기회가 늘어난 만큼 선택하고 고려해야 할 것도 늘어난다.

 

책은 작가인 데이나 슈워츠의 자전적인 이야기를 바탕으로 하고 있으므로, 책 속의 '당신'은 93년생이다. 그가 나이가 들어 기성세대가 되면 또 새로운 세대의 여성들이 등장할 것이다. 그들은 어떤 삶을 살아갈까. 미래의 여성들이 살아갈 삶이 있을 것이고, 우리에게는 우리의 삶이 있으며, 과거의 여성들에게는 또 그들의 삶이 있었다.

 

실제 인생은 훨씬 더 많은 선택을 해야 하지만, 어쨌거나 <당신의 불행을 선택하세요>는 책이므로 읽다 보면 어떻게든 엔딩을 맞게 된다. 여러 버전의 끝이 있다. 그 모두는 같지 않지만 크게 다르지도 않다. 나는 이런 엔딩이 나왔다. 그리고 아주 마음에 들었다.

 


당신이 어떤 존재이기를 바라건 간에, 바로 그 순간, 거기서, 당신은 시작할 수 있다. 매일매일 당신은 새로 시작할 수 있다. 364쪽


 

<당신의 불행을 선택하세요>를 읽으며 잠깐 경험한 '당신'은 모순투성이일지언정 삶을 포기하지는 않는 인물이라 좋았다. '당신'처럼 우리는 계속 살아간다. 매번 새롭게 혼란스러워하고 새롭게 고군분투하며.

 


[김소원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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