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내게 무해한 사람 [도서]

글 입력 2020.01.08 1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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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무해한 사람.jpg


내가 느낀 감정과 기억을 누군가의 글에서 발견할 수 있다는 건 반가운 일이다. 잊고 있던 기억을 다시금 찾아 반갑고, 이런 감정을 지닌 게 나뿐만은 아니구나, 내가 아주 지나쳤던 것만은 아니었구나, 안도감이 들어 반갑다. 그리고 이내 그리워진다. 지나간 시간은 다시 돌아갈 수 없는 거니까.

 

과거라고 해서 그리 거창한 게 아니라 '지금, 현재'의 시간을 뒤로하면 모든 순간이 과거가 된다. 내 기억이 된다. 현재로써 다룰 수 없는 영역으로 들어가 버린다. 그 사실을 알면서도 현실의 순간에 충실하기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그래서 미숙하고 멍청했던 과거의 기억을 끄집어내며 다시금 웃음 짓고 눈물짓게 되는 것 같다.

 

생각해보면 쓰라린 기억 속에는 언제나 어설픈 내 자신이 남아있다. 바보 같은 나를 아프지만은 않게 기억할 수 있는 문장을 쓰는 건 어려운 일이라고 믿는다. 섬세한 배려가 담겨있다. 흉내 내려 해도 결코 쉽지 않은.


이 책에는 그러한 표현들이 많아서 읽는 내내 마음이 따뜻하면서도 참 시리고 아팠다. 지금 와서 할 수 있는 게 기억뿐이라 그런 것 같다. 기억이라는 게 그렇지 않은가. 어쩔 도리 없는 수동성이 존재하는 것 같다.

 

바람과 몽상이 뒤섞인 기억의 마무리는 언제나 현실로 돌아오는 것이었고, 그러한 어쩔 수 없음이 나를 항상 막막하게 만들었다. 때로는 과거의 시간을 매 순간 다르게 회상하며 현실의 세계로 끌고 오기도 했다. 그럴 때면 기억은 다시금 현실에 영향을 미치고, 무의미한 생명력을 얻는다. 죽어버린 시간이 얻게 되는 생명력. 그 생명력이 현실에 닿아 지금의 시간마저 죽어버리면 어쩌지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래도 샛노란 표지처럼 노란빛이 돌며 나에게 괜찮을 거라고 말해주는 것 같아 괜찮았다. 이 책은 직접적인 위로를 주지도, 깨달음을 주려는 작정도 않지만, 따뜻한 빛으로 밀려오는 담담함이 있었다. 그 담담함에 많은 생각이 들었다. 수많은 생각과 문장들 틈, 고요한 시간들 사이에서 서서히 번지는 위로 같은 게 있었다. 그 위로에 젖어 들 수 있었다.


 

 

내게 무해한 사람


 


진희가 엎드려 자고 있을 때, 운동장을 가로질러 걸어갈 때, 볼펜을 이리저리 돌릴 때 미주는 자신이 진희를 안다고 생각했다. 넌 누구에게도 상처를 주지 않으려 하지. 그리고 그럴 수도 없을거야. 진희와 함께할 때면 미주의 마음에는 그런 식의 안도가 천천히 퍼져 나갔다. 넌 내게 무해한 사람이구나.


 

의도하든 의도하지 않았든 살다 보면 어떻게 해서든 누군가에게 해를 끼치게 된다고 한다. 그것이 정녕 내가 '절대로 상처입히고 싶지 않은 사람'일지라도.
 
이제 와 나의 모든 조심스러움, 상대방의 기분을 맞추려는 노력이 얼마나 큰 체력의 소비였는지를 깨닫는다. 나는 내 곁의 사람들을 편하고 안정되게 해주고 싶었지만 오히려 그들의 기분을 맞추려는 내 속이 전쟁통이었다는 걸 이제는 안다.
 
이 글을 보며 생각한다. 어쩌면 나는 무해한 사람이 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고. 그것이 맞다면 '그럴 수도 없을거야'라는 문장은 다시금 내 마음을 건드린다. 나는 어떠한 방식으로든 누군가에게 완전한 해를 끼쳤을 것이다. 무심코 뱉은 말이 상대의 입장을 고려하지 못해 화살처럼 와닿았을지 모르고, 무심한 나의 행동이 누군가의 모욕감을 불러일으켰을지 모른다. 상처 주기 위해 고르고 고른 거센 말이 아직까지 귓가에 남아있을지도 모르겠다. 내가 행동하지 못한 침묵으로 거친 말보다 더 큰 상처를 입혔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면서 쉽게 던진 미안해 말 한마디로 스스로 마음 편해하지는 않았을까 두렵다. 내 자신이 스스로에게 면죄부를 줄까봐, 그래서 누군가에게 또 다른 상처를 입힐까 봐. 하지만 그래서 택하게 된 침묵이 무시로 해석된다면 나는 또 얼마만큼의 상처를 입힌 걸까.
 
나는 어느 유명 가수의 노래처럼 사실 내 의도는 모두 좋은 쪽이었다고 듣기 좋게 자기변명을 하지 못한다. 나의 실수였고 미안하다며 반성하는 태도를 보이지 못한다. 그렇게 행동하며 나를 착하고 좋은 사람으로 한 계단 올려놓지 못한다. 허울뿐인 말은 공허할 뿐이다.

대신 굳이 무해한 사람이 되기를 칭하며 청정한 상태로 상대가 듣고 싶어 할 말만을 늘어놓지 않기로 한다. 상대의 아픔을 짐작하며 상처를 다스릴만한 말을 모두 토해낸 후 상냥한 사람이라도 된 양 마음 편해하지 않기로 한다. 어쩔 수 없이 상처를 주고받을 수 밖에 없는 것이 인생이라면, 내가 들려주고 싶은 말이 아닌 내가 하고 싶은 말을 하기로 한다. 그리고 이후 겪게 될 대화의 장에서 우리끼리의 올바른 정답을 찾아보기로 한다. 정답이 아니어도 좋다. 굳이 정답이라고 정해놓지 말자. 오늘은 정답이어도 내일의 사람들과는 오답으로 여겨지게 될 테니까. 그렇게 이리저리 흔들리며 알 수 없는 빛을 풍기다 운 좋게 그 색이 맘에 든다면 잠깐의 만족을 느끼고 다시 모르는 색으로 칠해가도록 하자.
 
언젠가는 내 속이 나조차도 알 수 없는 먹물이 되는 날이 올 것이다. 그런 날은 새까만 마음이어도 괜찮다면 누군가의 밤이 되어주었으면 좋겠다. 밝은 빛 하나 없어도 잠시 쉬어갈 수 있는 고요함이 되어줄 수 있으면 좋겠다. 그런 마음이어도 쓸모가 있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그건 어느 누구에게뿐만 아니라 내 자신에게도 그래 주었으면 좋겠다.


 

 

아치디에서


 


말의 눈을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으면 아주 오래, 이백 년은 살아온 사람의 눈을 보는 것 같았다. 사람이 아는 것을 말은 모르지만, 말이 아는 것을 사람은 모른다. 그리고 나는 말이 알고 우리는 모르는 그 무언가가 우리가 알고 말은 모르는 것보다 더 크고 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곤 한다.


 

어쩌면 예술이란 자연을 닮고 싶은 인간의 활동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곤 한다. 자연의 동물, 식물, 바람, 파도, 나무는 모두 알고 있는 것을 정작 대뇌를 지닌 복잡한 인간은 모르고 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래서 우리는 매번 노을을 향해 넋을 잃고 끝없이 펼쳐진 바다에 힘을 얻고 초록색 나무들에 둘러싸여 무한한 기운을 느끼곤 한다. 자연이 주는 메시지와 깨달음을 바쁜 현실 속에서도 잊지 않을 수 있다면 우리는 조금 더 편하고 행복하게 살 수 있지 않을까.


자연 또한 그들 나름의 치열한 삶을 살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인간처럼 누가 누구를 흉기 없이 다치게 하지는 않을 것 같다. 상처받은 존재는 분명히 존재하는데 상처 입힌 대상은 또렷이 한정지을 수 없다는 사실이 두렵고 또 미안하다. 사실 나는 이런 말을 할 자격이 없다. 내가 뭐라고 쉽게 말할 수 있을까. 쉽게 말하고 쉽게 잊을 자격이 있을까. 그 누가. 그런데 이때다 싶어 아파하던 이름들을 전면에 내세우는, 쉽게 훈계하고 자신의 이야깃거리로 만들어버리는 사람들은 어떻게 모든 것이 그리 쉬운지 묻고 싶다.


 

 

지나가는 밤


 


엄마 손을 잡고 집으로 걸어가던 길, 늘 엄마를 만날 수 있었던 그때의 기다림을 윤희는 아프게 기억했다. 어른이 된 이후의 삶이란 아무리 기다려도 오지 않는 것들을 기다리고 또 기다려야 하는 일이었으니까. 윤희야, 온 마음으로 기뻐하며 그것을 기다린 자신을 반갑게 맞아주고 사랑해주는 것이 아니었으니까.


 

서로의 손을 잡고 골목길을 걸을, 그들의 뒷모습을 상상했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도 엄마 손을 잡고 있어 든든했을 아이. 머리가 자랄수록 걱정 없이 충만한 기분을 누리기가 어렵다. 행복한 와중에도 불안하다. 스스로 만들어 낸 온갖 가설들에 뒤엉켜 행복으로 붕 뜬 마음을 다시 가라앉혀야 했다. 알 수 없는 것은 흥미롭지만 알 수 없어 불안하다. 아직 마음은 어린아이인데 어른 행세를 하려다 보니 망가지고 삐걱대고 그러는 것 같다.


나도 단단하고 무던한 어른이 되고 싶었다. 마치 스위치를 켜듯이, 스무 살이 넘으면 어른 버튼을 눌러 그에 맞는 마음가짐으로 맞춰지고 싶었다. 크고 작은 일에도 담담할 수 있고 남을 챙길 여유까지 장착하길 바랐다. 나는 그러지 못했다. 그리고 그건 누구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욕심은 또 커져서 내 것이 되기를 바랐던 모든 것들. 내 것이 되지 않는다면 이해해야 했던 스스로의 무능함. 인연이 아니라는 쉬운 선택지도 있는데 굳이 나를 갉아먹으려 선택했던 자조 섞인 말들. 아무리 기다려도 나를 기다려주지 않았던 모든 것들. 그들 속에서 익숙해져 외로움조차 느끼지 못했다. 하지만 이 글을 읽으며 누군가의 손을 잡고 걸었던 뒷모습은 기억할 수 있었다. 아무런 조건 없이 나라는 이유만으로 기다리고 있던 엄마 아빠. 어린 어깨 위 올려놨던 가방을 한쪽 어깨에 걸쳐 매며 오늘 하루 어땠냐고 물어보던 목소리. 밝은 빛 하나 없는 어두운 골목길에서 우두커니 나를 기다리고 있던 어른의 실루엣. 쭈뼛대며 달려가면 팔짱을 낀, 혹은 뒷짐을 진 익숙한 얼굴이 그제서야 보인다. 항상 당연하다고 생각했는데, 그런 건 당연한 게 아니었다. 앞으로 어느 누구도 나를 그렇게 기다려줄 수 없을 것이다.


내가 받을 수 있는 평생의 사랑을 어릴 때 다 받은 듯한 기분이 든다. 앞으로 살아가면서 어떤 사랑을 나눌지는 모르지만 그런 조건 없는 사랑은 받을 수 없을 것 같다. 아버지로서, 어머니로서의 그들의 역할과는 별개로 그것은 특수한 것이었다.


그런 건 당연한 게 아니었다.


 

 

누구에게도 무해하지 못한 우리 모두의 이야기


 

책의 맨 마지막 장에 위치한 작가의 말에서 최은영 작가는 개인행동을 하고 싶었다고 말한다. 반듯하게 세워진 줄로부터, 조회 시간 국기에 대한 경계로부터, 지껄이는 입들과 너무 가벼운 손찌검들로부터, 멀리, 아주 멀리 벗어나고 싶었다고. 그렇게 행하게 될 개인행동은 아무에게도 해를 끼치지 않을 것이라 믿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럴 수 있었는지 되물었다. 최은영 작가는 그런 사람이 될 수 없었다고 답했다. 이루어지지 않은 건 개인행동이 아니라, 그 행동이 아무런 해를 끼치지 않을 것 같았던 자신의 오랜 믿음이었다.


내가 이 감정에 온전히 공감하는 건 나 또한 어딘가에서 싫증과 역겨움을 느꼈고, 그것들을 뒤로하기 위해 걸었던 걸음걸이에서 애써 담담하려 애썼던 부자연스러움을 기억하기 때문일 것이다. 내가 자유롭기 위해 디딘 발걸음에는 누군가의 상처가 깔려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해낸 개인 행동의 끝에서 나는 개운함을 느낄 수 없었다. 자유롭고 싶었지만 그런 평온함은 조금도 느끼지 못했다. 나는 계속해서 무언가와 얽혀 있었고, 그건 나였는지 타인이었는지 상황이었는지 명백하게 구분지을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러면서도 누구에게나 좋은 사람이기를 바랐다. 그런 망상은 내가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쌓아둔 벽이었고 금방 무너져버렸다.

 

가장 두려운 것은 상처 준 영혼들에게 쉽게 사과한 후 쉽게 개운해할까 봐, 그것으로 좋은 사람이 되었다고 스스로 우쭐해할까 봐. 그렇게 또 다른 상처를 안겨주는 멍청하고 둔한 사람이 될까 봐. 그것이 두려웠고 나는 지금도 조화롭게 균형 잡는 방법이 어렵다.

 

아마 살아가면서 누구에게도 무해한 사람이 되지 못할 것이다. 그건 스스로에게도 마찬가지다. 그렇다고 마음 놓고 못된 존재가 되기는 싫다. 정답은 모른다. 어떻게 살아야 잘 사는 것인지. 위에서도 썼듯이 정답은 없다. 어떻게 살아야 덜 상처 주고 덜 상처 받을 수 있는지.

 

하지만 상처주고 받을 수밖에 없는 사실을 인정한다면, 먼저 손 내미는 선택지가 상대보다 먼저 내 눈에 띄기를 바란다. 그래서 더 용기 있고 자연스럽게 손 내밀 수 있기를. 상대도 그 사실을 알아 내민 손을 기꺼이 잡아줄 수 있기를. 그런 용기가 나에게도 찾아오기를. 그제서야 진정한 어른이 될 수 있기를 바라본다.

 

숨죽인 채 떠오르는 많은 생각들 틈에서 위로를 찾을 수 있는 따스한 작품을 발표해주신 최은영 작가님에게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그의 행보를 응원하는 마음을 전하고 싶다. 그리고 오늘도 *누구와도 불화하지 않기 위해 애쓰고 있을 이들에게도 이 책이 각자만의 위로로 닿을 수 있기를 바란다.

 


*쇼코의 미소, 최은영 저 中 '한지와 영주' p. 176, 18째 줄

 




[김소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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