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살아있으며 동시에 죽어있는, 나는 슈뢰딩거의 고양이로소이다 [도서]

더 이상 헤어나올 수 없는 매너리즘을 겪을 때 내가 보는 것들
글 입력 2019.12.29 1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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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뢰딩거의 고양이
 

마취를 시켜 기절한 고양이가 어두운 상자 속에 1시간동안 갇혀있다. 그 상자 속에는 1시간동안 50퍼센트 확률로 고양이를 죽일 수 있는 알파 입자가 있다. 고양이가 살아있는지 죽어있는지는 우리가 고양이를 꺼내보기 전까지는 알 수가 없다. 고양이 본인 역시 마취 상태라 상자에 갇힌 한 시간동안은 자신이 살아있는건지를 알 수가 없다. 이때, 고양이의 상태를 Dead or Alive가 아닌, Dead & Alive라고 부른다. 고양이는 살아있는 동시에 죽어있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나 자신을 포함해 아무도 나를 관찰할 수 없던 그 시간동안 혹시 나는 닐스의 말처럼 정말로 살아있으면서 동시에 죽어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 <나는 슈뢰딩거의 고양이로소이다>, p.73

 

슈뢰딩거의 고양이는 말한다. 그렇다면, 아무도 살아있는지 모를 치매 노인의 고독사 문제에서 노인은 언제 세상을 떠났는지 모르기 때문에, 사람들이 발견하기 전까지는 살아있는 것도 아니며 죽어있는 것도 아닌가.


살아있는 동시에 죽어있을 수 있다는 것은 과연 양립할 수 있는 개념인가. 우주 바깥에 무엇이 있는지 몰랐을 과거에는 우주란 사실이 존재하지도 않았던 것인가. 굉장히 역설적인 문제이다. 그리고 일반적인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하기 힘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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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슈뢰딩거의 고양이로소이다> 책에는 SF 단편소설이 8편이 나온다. SF와 거리가 먼 사람들을 위해 소설의 앞, 뒤로 작가의 해설을 실었다. 단편소설 자체가 그렇게 길지 않고, 해설까지 있어 이해하기 힘들지 않아 청소년들을 비롯해 다양한 연령대에게 쉽게 접근이 가능해보인다.

 

나는 평소에 디스토피아, SF 드라마, 영상, 책을 즐겨보는 사람으로서 <나는 슈뢰딩거의 고양이로소이다>를 매우 흥미롭게 읽었고, 그 중에는 완전히 독창적인 생각도 있었으며 어디서 많이 보던 글감도 있었다. 아직은 SF를 잘 모르는 사람들을 위해, 그리고 나 같은 디스토피아 중독자들을 위해 그 중 몇가지 흥미롭게 읽은 부분을 소개해주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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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멘토 모리, 죽음을 기억하라


 

작가가 반지의 제왕에 나오는 불사의 엘프가 굳이 전쟁에 참여해 죽는 것을 보며, 인간들이 불사의 삶을 갖게 된다면 세상이 어떻게 될까 상상하며 쓴 글이다. 소설 속 주인공은 ‘우피’라고 불리는 노인이다. 인간의 유전자를 변형해 노화가 일어나지 않게 하는 불로불사의 약이 만들어지고, 모든 사람이 늙어죽고 싶지 않아 불로의 약을 먹는 것이 당연해진 시대에 불로의 약을 먹지 않고 자연스럽게 늙어 죽는 삶을 택한 사람을 일컫는 단어다.


 

“히피와 우피 사이에는 분명 공통점이 있는 것 같다. 사람들 대부분이 당연히 여기며 가는 길을 따라가지 않는 점이나, 그래서인지 자유 시간이 무척 많다는 것.”

 

- <나는 슈뢰딩거의 고양이로소이다>, p. 20


 

그러나, 안타깝게도 불로의 약은 늙어죽는 것, 노화는 막을 수 있지만 전염병에 걸리는 것, 교통사고 등 타인과 얽혀 생기는 병이나 사고는 막지 못한다. 약의 부작용으로 사람들은 결벽증에 대인기피증이 생긴다.


하지만 그것은 부작용이라기보다는 늙어죽지 않게 되었기 때문에, 다른 우연으로 죽기 싫은 불안감에서 나오는 것에 가깝다. 가만히 숨어있으면,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절대 죽지 않고 젊은 모습 그대로 삶을 평생 영위할 수 있는데, 굳이 바깥에 나가 위험한 활동을 해서 얻은 불사의 기회를 잃고 싶지 않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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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속 노인은 종종 햇살을 쬐러 바깥에 나가는데, 오랜만에 바깥으로 나온 사람들을 만난다. 아직 불로의 약을 먹지 않은 아이와 그 아이의 엄마다. 엄마는 나오고 싶지 않지만, 아이를 위해 나온 것처럼 보이는데 마치 노인이 병을 옮길까봐 아주 꺼려하고 있다. 아이에게도 노인과 대화하면 병을 옮을 수 있다는 것처럼 말한다.

 


“예전에 인간에게는 용기라는 게 있었지. 지금과는 달리 때로는 위험한 일에 자진해서 덤벼들곤 했단다. 자기가 믿는 신념이나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목숨을 걸기도 했어. 그건 우리가 반드시 죽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야. 죽음이 누구에게나 찾아온다는 것을 알았기에, 용기 있는 사람들은 죽음을 조금 앞당길지도 모를 위험에도 덤벼들 수 있었던 거야.”

 

- <나는 슈뢰딩거의 고양이로소이다>, p. 27-28


 

과연 인간이 영생을 얻게 된다면, 어떤 사고나 질병으로 죽지 않는다면 그의 소설 속 인물들처럼 집에 틀어박혀 나오지 않을까? 그럼 인간들은 과연 그 긴 시간을 무엇을 하며 지낼 수 있으려나. 삶의 목적을 다양한 데에서 추구하는 사람들, 예를 들면 yolo라던가, 자기계발이라던가, 어떤 위대한 과학적 사실을 발견하려고 하던 사람들도 삶의 가장 큰 목적이 살아남는 것이 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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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을 읽으며 약간의 조건을 바꾸어 영화화하거나 장편소설로 만들어도 괜찮은 이야깃거리가 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소설 속에서는 여기저기서 원조 불로불사의 약을 따라서 저렴하게 파는 곳이 생겨 모든 사람이 먹게 된다는 설정이 있지만, 과연 그 약이 저렴할 지 의문이다. 부자나 적어도 상류층이 독점하지 않을까. 하지만 그렇게 된다면 중산층이나 하층민에게서 엄청난 폭동이 일어날테고, 아무런 사고가 없길 바라는 마음에서 어쩔 수 없이 약을 저렴하게 나누어 줄 수밖에 없었을 것 같긴 하다.

 


“영생을 얻은 지금은 오히려 모두가 매순간 죽음을 두려워하며 살고있다. 죽음에 대한 경계와 저항이 삶의 유일한 목적이 되고 말았다.”

 

- <나는 슈뢰딩거의 고양이로소이다>, p.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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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삶에 나태해질 무렵, 목적의식을 잃고, 제발 누군가 내 삶을 구원해주길 바랄 때쯤 디스토피아물을 종종 찾아본다. 그저 평범하게 살아갈 때는 그냥 평범한 인간 중 하나였던 사람조차도, 생명을 위협하는 일이 생기면 최선을 다해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친다.

 

좀비, 핵미사일로 더 이상 살 수 없게 된 지구, 원인을 알 수 없이 병을 일으키는 비, 귀신에게 공물을 제공하기 위해 아이들을 기르는 학교, 그런 다양한 상황에서 살아남으려 애쓰는 사람들을 보고있자면, 결국 인간의 최종 목적은 “삶”인데, 나의 매너리즘은 삶의 조건이 모두 만족되어 있기에 찾아오는 나태함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렇게 내 삶의 무의미함을 안정시킬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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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고양이 반달이와 구해

 

 

길고양이들과 집고양이를 많이 관찰하고 길러본 사람으로서 이야기하자면, 길에만 살던 아이들은 야생에 아주 익숙해져서 밥을 먹을 때도 경계를 늦추지 않는다. 반면, 집에서 순화가 된 고양이들은 누가 쳐다보든 상관없이 밥을 먹는다.

 

그러나, 그것은 길고양이와 집고양이만의 차이는 아니다. 우리집에 새로 들어온 막내 고양이를 원래 있던 고양이가 털을 다 뽑아버리는 등 매일 습격하는데, 그래서 막내고양이는 사람 손에는 익숙해졌지만 다른 고양이에 대한 경계를 늦추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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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집고양이 왼쪽부터 귀동, 카레, 피망

 

 

안전한 환경을 제공받은 집고양이일지라도 그 환경에 매번 만족하는 것은 아니다. 살아남고자 애써야 하는 생명체의 본능이 제거된 너무 안전한 집에서 다시 밖으로 나가고 싶어하는 아이도 있고, 실제로 바깥세상이 궁금해서 탈출을 감행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것은 이미 길에서 생활할 수 있는 능력은 제거된 채 호기심에 하는 행동이라는 것을 명심하고, 이 땅의 모든 집사들은 고양이를 산책시키는 어리석은 짓을 하지말고 집에서 고양이의 본능을 충족시키도록 놀아주어야 한다.

 

누군가는 내 글을 읽으며, 인간과 고양이의 본능이 어떻게 같냐고, 인간은 고귀한 인권이 있다고 말할지도 모르겠다. 나는 그저 인간과 고양이 모두 똑같은 본능을 가진 생명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니 의견이 맞지 않은 사람이라면, 앞으로도 종종 이런 가치관이 튀어나올지도 모르는 내 글을 스킵해주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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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연 인간이 영생을 얻게 된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종종 3개월 뒤에 죽는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라는 말은 많이 들어봤고, 대충 내가 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를 단편적으로 나열할 수 있다. 그러나 영원히 살 수 있다면? 이라고 하면 막상 할 대답을 찾기가 힘들다.

 

나 혼자에게만 영원한 삶이 주어진다면 그것은 아주 외로운 삶이고, 나는 아마 거부할 것이다. 그러나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 내가 싫어하는 사람들을 포함한 모두에게 영원이 주어진다면 그것은 받아들일 수 있을까.

 

천재적인 머리를 가진 과학자는 인류의 삶을 편리하게 하는 과학기술을 발전시킬 것이고, 갑부들은 더 많은 돈을 벌어들여 빈부격차는 더욱더 심해질 것이다. 좋은 소설을 쓰는 소설가는 글을 하나 쓸 때마다 엄청난 관심을 받고, 늙지 않는 연예인은 끝나지 않을 찬사를 받을 것이다. 그럼 그 중에 일반 사람들은? 우리는? 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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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깊은 고민하지 않고 그냥 아무 생각없이 사는 게, 가장 큰 삶의 의미일지도 모른다. 나의 삶 바깥에서 일어나고 있을 진지하고 철학적인 일, 사후세계 등은 정말 나에겐 아무런 의미가 없을지도 모른다.

 

스마트폰으로 오늘 하루를 즐기고 있을 사람들의 머릿속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이 정말 그냥 삶 그 자체일지도 모른다. 과학자라고, 명문대 학생의 삶이라고, 정치인이라고 대단한 것도 아니며 그들의 직업이 보통 사람들보다 더욱 더 가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냥 저마다 살면서 누군가 할 수밖에 없는 역할을 하고 살아갈 뿐이며, 인생이란 뭔가 거대한 야망이나 거대한 목표 같은 것이 있어야 흘러가는 것이 아님을, 이런 글을 읽으며 깨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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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이미테이션 게임

 

 

튜링 히어로


 

영화 이미테이션 게임을 본 사람이라면 알겠지만, 베네딕트 컴버배치가 연기한 주인공 앨런 튜링은 제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군의 암호를 해독해서 연합군이 승리하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고, 또 동성애자라는 이유로 경찰에 구속되어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람이다.

 

그는 천재적인 두뇌를 가졌지만, 늘 자신이 로봇인지 인간인지 확신을 가지지 못한다. 영화의 제목 이미테이션, 역시 '흉내'라는 뜻으로, 기계가 인간을 흉내내는 것이란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1950년도 그는 튜링 테스트를 제안한다. 시험자가 기계와 인간을 다른 방에 두고, 다양한 질문과 대화를 통해 기계가 인간을 속여 인간이라고 믿게끔 만든다면, 기계에게 지능이 있다고 결론을 내리는 것이다.

 

안드로이드가 인공지능을 갖게 되고, 인간처럼 자의식이 생겨난다면 인간과 구별이 힘들어진다. 안드로이드의 외관도 세포를 배양해서 만든 거라 인간과 내면과 외면도 별 다를 것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튜링 테스트는 안드로이드는 절대로 통과할 수 없는 맹점을 만들어 인간과 안드로이드를 99퍼센트의 확률로 구분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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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이미테이션 게임

 

 

<튜링 히어로>라는 이야기는 인간에게 위협을 주는 안드로이드를 모조리 말살하기 위해, 공항이나 사람이 많이 몰려드는 장소에서 필수적으로 튜링 테스트를 실시한다. 99퍼센트에 속하지 못한 아주 적은 확률로, 튜링테스트에서 안드로이드로 판별된 인간 맥스가 인간 세계에서 사살당할 위기에 처한다. 동굴로 도망친 그를 안드로이드가 발견해서 안드로이드의 세상으로 가게 된다.


 

“모든 정보와 사회 시스템 전체를 인간이 틀어쥐고 있는 가운데 안드로이드들이 어떻게 나를 발견했는지는 지금도 알지 못한다. 어쩌면 그들은 아직도 네트워크에 접속이 가능하고 생각보다 많은 영향력을 세상에 발휘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안드로이드들이 나를 동족으로 여기고 구하려고 고생 끝에 이곳까지 왔다는 사실이다. 그 순간 내게 필요한 선택은 자명했다. 자연스러운 연기다.”

 

- <나는 슈뢰딩거의 고양이로소이다>, p.140

 

 

이야기 자체가 단편소설이라 맥스가 안드로이드 세상에서 무엇을 했는지 더 많은 전개를 읽을 수 없어 아쉬웠지만, 작가가 장편소설화하고 싶다고 말할 정도로 세계관이 명확하고 앞으로의 내용이 기대되는 내용이다. 맥스가 안드로이드 군대를 형성할 지, 살아남기 위해 인간 세상을 침공할 지 정말 궁금하다. 작가의 후속작이 기대된다.

 


“아주 구체적인 신념을 갖고 살지 않는 한 – 우리 대부분처럼 – 이렇게 의도치 않은 상황이 연속되면 평소의 생각 같은 것은 가볍게 잊어버리고, 마치 연극의 배역을 맡은 듯 자연스럽게 주어진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 인간이기 때문이다.”

 

- <나는 슈뢰딩거의 고양이로소이다> p. 152

 

 

위에 소개된 이야기 이외에도, 산타의 존재 의의와 실존 유무에 대해 작가의 상상력이 돋보이는 <산타 신디케이트>, 우주의 다른 생명체가 지구를 살리러 왔지만, 아무런 귀환 장치 없이 개를 우주 밖으로 내던진 지구 인간들의 행동을 보며 구원을 취소한 <계몽의 임무> 등 논리적으로 정확한 증거가 없기에 믿을 수 없지만, 어쩌면 그런 세상도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만한 일을 많이 접할 수 있다. 내 눈에 보이는 세상이 이 세상의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 또한 마찬가지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정말 주어진 내 세상을 즐기면서 사는 것이 인간으로 태어난 나의 가장 큰 본분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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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상상력 사전>에 나오는 이야기인데, 그는 어쩌면 지금의 우주가 아주 사소한 마찰에서부터 생긴 찰나인 것은 아닐지 의심한다. 당신이 글을 쓰기 위해 컴퓨터 키보드를 치는 순간, 타자기와 손가락 사이에서 일어나는 엄청난 마찰들 사이에서 수많은 충격이 발생하고, 어쩌면 거기에서도 또다른 우주가 생겨날 수도 있다. 우리 우주의 대부분을 이루고 있는 것이 수소와 헬륨, 분자들과 원자들이다. 그리고 우리가 보고 있는 세상을 아주 잘게 쪼갠다면 그런 분자들과 원자들로 이루어져 있다. 결국에 우리의 세상은 누가 발로 걷어찬 콜라캔에서 만들어진 아주 사소하고, 그러면서도 순간적으로 끝날 수도 있는 세상일 수도 있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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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생각을 하고 있자면, 내가 정말 별 것 아닌 사람같아서 어릴 때는 좀 화났고, 그 사실을 부정하고 싶었는데 지금은 오히려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더 편하다. 내 삶이 별 것 아니고, 좀 유별난 행동을 해도 결국 아무것도 아니라는 생각에 더 다양한 것들을 시도해 볼 수 있는 것 같다.

 

바쁘게, 바쁘게, 남들이 말하는 세상에 존재하는 행복을 얻기 위해 내 길이 아닌 길을 달리기 위해 준비하다가도, 그냥 내 자리로 돌아올 수 있게 된다. 더 큰 세상을 상상하고 꿈꾸다보면, 지금 여기를 살고있는 나에게 만족하게 된다. 나는 그래도 지금 여기, 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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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슈뢰딩거의 고양이로소이다>는 SF를 쉽게 접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또는 SF를 좋아하며 더 많은 아이디어를 접하는 사람들에게 다 추천해주고 싶은 책이다. 나처럼 인생의 매너리즘에 빠진 사람들이 자신의 삶을 더욱 사랑하기 위한 방식으로 읽어도 괜찮고, 어쩌면 그냥 별 의도없이 삶을 즐기기 위한 수단으로서 독서를 해도 좋을 것 같다.

 

 

[박지수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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