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노동 뒤에 사람 있어요 [도서]

《땀 흘리는 소설》 김혜진 外 7인 저
글 입력 2019.12.22 07: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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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노동이라는 단어와 그다지 친하지 않다. 프롤레타리아 따위의 장황한 어감의 단어가 연상되거나 각계 노동자들이 결연히 시위하는 모습이 언젠가 보았던 뉴스의 매몰찬 댓글들과 함께 떠오르며 관련 이슈에 왠지 모를 거리감을 느끼는 스스로에 대한 죄책감까지 들게 된다. 살면서 수없이 듣고 말한 단어인데도 마주할 때마다 뭔가 얹힌 듯 불편하다. 그저 ‘일’의 다른 말에 불과한 이 단어는 단지 한 음절의 차이가 나는 한자어로 등장할 때면 순식간에 무거워져 어딘가 짓눌리는 느낌을 준다.


그러나 노동만큼 보편의 삶에 친숙하게 닿아있는 것이 있을까. 노동은 삶을 이어나가기 위한 필수적인 요소이며 세상 모든 사람이 일을 하며 살아간다. 모두가 관계 맺는 만큼 법적, 경제적, 사회적, 정치적 문제 등 수많은 영역으로 담론이 무한히 확장된다. 수많은 노동과 노동자가 매일 서로를 맞닥뜨리며 수많은 고민과 갈등을 낳는다. 노동은 삶 그 자체다. 그래서 노동이라는 말이 더욱 무겁게 느껴지는지도 모르겠다. 생존을 위한 자연스러운 행위가, 생존이 아닌 다른 욕구는 희생해야 하는 부자연스러움을 자연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여야 했던 행위가, 어느 정도 비합리적이고 부조리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해 다만 일상에서 분리하기 급급했던 행위가, 사실 일상과 가장 밀접해 있으며 마땅히 합리적이어야 한다는 사실이 삶의 전 영역에 등장하는 두 글자의 단어 앞에서 심지 곧게 폭로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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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은 가장 일상적인 동시에 가장 많은 사람의 정서를 흔들어 놓을 수 있는 파격적인 소재가 되었다. 노동은 문학에서 마치 시한폭탄처럼 조심스럽게 혹은 제한적으로 다뤄졌고 노동에 관한 수많은 경험을 폭넓은 상상과 함께 직조하고 공유할 수 있는 길은 막막했다. 노동에 관한 이야기를 묶어 편찬하자는 아이디어는 이러한 상황에 대한 안타까움으로부터 출발했다. 《땀 흘리는 소설》은 김혜진, 김세희, 김애란, 서유미, 구병모, 김재영, 윤고은, 장강명 등 8명의 작가가 각자의 문법으로 노동을 다룬 것을 엮은 단편소설 선집으로, 수많은 삶과 사람이 응집된 노동이라는 소재는 여덟 개의 프리즘을 관통하여 다채로운 인물과 노동이 만들어내는 이야기를 쏟아낸다.


노동에 대한 낯선 시선은 소설을 읽는 동안 수시로 투영된다. 노동 현장에서의 내부인-외부인, 혹은 규범적-비규범적인 노동의 모습을 대조적으로 제시하여 흔히 알고 있었던 이상화되고 평면화된 노동의 현실과 입체를 깊숙이 드러내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어비》와 《알바생 자르기》에서는 한국 특유의 조직문화에 적응한 노동자가 화자로 등장해 동료들과 잘 어울리지 못하거나 싹싹하게 굴지 못하는 신입을 일을 하지도 않는다며 못마땅해하며, 《가만한 나날》과 《저건 사람도 아니다》에서는 일에 능숙한 노동자와 그러지 못하는 노동자가, 《P》에서는 회사의 명령에 순응하는 자와 저항하는 자가 나란히 등장한다.


이러한 대조 방식은 직장 내 서사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기도》에서는 신림동 일대를 위풍당당 걸어 다니는 명문대 학생들과 신림동 서점에서는 9급 공무원 수험서를 팔지 않는다는 사실을 모르고 헛걸음을 한 수험생 언니가, 《어디까지를 묻다》에서는 번듯한 대기업 직원과 그 기업의 하부 조직인 콜센터 직원이, 《코끼리》에서는 내국인과 이주 노동자가 대조적으로 등장한다. 이 세 이야기에서 내부인 혹은 규범적 노동자에 속하는 이들은 이야기 바깥에 존재하며 직접적으로 등장하지는 않지만, 화자들이 느끼는 소외감과 박탈감은 공통적으로 자신이 외부인이자 비규범적 노동자로 구분되는 것에서 기인하기 때문에 전자의 시각은 강압적인 모양새로 잠재하여 암묵적 권력을 행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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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을 장식하는 김혜진 작가의 《어비》와 김세희 작가의 《가만한 나날》이 전자의 시각을 가진 화자가 후자를 관찰하는 식으로 전개되기 때문에, 독자는 책을 펴기 시작한 순간부터 스스럼없이 내부인의 시선을 장착하고 싹싹하지 않은 성격의 ‘어비’와 일에 적응하지 못하는 ‘예린’을 팔짱 낀 채 바라보게 된다. 그 때문에 각 소설의 화자가 일을 그만둔 후 인터넷 방송을 하며 돈을 버는 ‘어비’를 볼 때, 퇴직한 ‘예린’에게 가 자신도 사실 일에 적응하지 못했다고 외치고 싶어 할 때 느끼는 혼란은 고스란히 독자에게도 전달된다. 화자가 내부자의 시각을 체화하여 차곡차곡 쌓아놓은 노동관은 이에 속하지 않는 외부인에 대한 우월감이 단지 상대성에서 오는 허상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달을 때 무참히 붕괴된다. 자신만이 진정한 노동자인 줄 알았던 화자들은 그토록 그들이 무시했던 ‘가짜 노동자’와 다를 게 없었다. 독자들은 일순간에 어그러진 이분법적 도식에서 한 발짝 물러나 여기서 던져진 질문, 일다운 일은 무엇이고 노동자다운 노동자는 누구인가에 대한 물음에 대답하기 위한 고민을 시작한다.


세 번째 작품인 김애란 작가의 《기도》가 수험생 언니와 실직자 동생의 삶을 중심에 놓고 일다운 일이 무엇인지 고민할 여유는커녕 일을 할 기회조차 없는, 어쩌면 외부자보다 외부에 있는 자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임으로써 고민의 폭을 한층 넓혔다면 네 번째 작품인 서유미 작가의 《저건 사람도 아니다》에서는 드디어 이상적인 노동의 현현이 등장한다. 일다운 일을 하는 노동자다운 노동자이자 내부자 중 내부자, 그것은 다름 아닌 기계였다. 완벽한 노동은 가사 노동과 직장에서의 노동을 홀로 떠안은 끝에 지쳐버린 주인공이 제작 주문한 사이보그에 의해 비로소 가능해진다. 노동자 없는 노동만이 완벽한 노동이 된다. 책의 초입부터 제기된 질문에 대한 대답이 드디어 주어지나 했는데, 오히려 일다운 일과 노동자다운 노동자라는 개념 자체가 허구에 불과하다는 사실만이 단호하게 드러난다. 그렇다. 인간이 할 수 없는 노동에 성공해야만 노동하는 인간으로 인정받는 세상에서, 완벽한 노동과 노동자란 존재할 수도, 실현될 수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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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계다운 일과 기계다운 사람만이 진정한 노동과 노동자가 되기에, 기계가 사람이 될 수 없으니 사람이 기계가 된다. 차례로 수록된 구병모 작가의 《어디까지를 묻다》와 김재영 작가의 《코끼리》, 윤고은 작가의 《P》는 각각 콜센터 직원과 이주 노동자, 회사의 임상시험에 ‘참여 당한’ 회사원을 주인공으로 제시하여 기업의 부품 그 자체가 되어버린 노동자들의 현실에 주목한다. 이들은 인간 대우를 받지 않는다. 전화를 받는 순간 온갖 욕설과 성희롱을 아무 이유 없이 감내해야 하며, 손가락이 잘려 나가도 아무런 보상을 받을 수 없고, 검증되지 않은 이물질을 몸속에 넣고도 회사에 어떠한 책임도 요구할 수 없다.


그러나 이들은 괜찮냐고 묻는 고객의 형식적인 인사에 울음을 터뜨리고, 표백제에 얼굴을 문대면서 피부가 하얘질 수 있다는 실낱같은 희망에 설레 하며, 몸 안에 자리한 내시경이 뇌 속을 사찰할 수도 있다는 말도 안 되는 걱정에 몸을 벌벌 떠는, 참으로 나약하고 그래서 애틋한 인간들이다. 사회는 완벽한 노동을 실현하기 위해 이들을 강철 멘탈의 노동 기계로 둔갑시킨다. 그러나 더욱 대조적으로 드러날 뿐인 이들의 인간다움은 지금 요구되는 노동이 과연 누굴 위한 것인지, 누굴 위한 것이라면 이래도 되는 것인지 재고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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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수록된 장강명 작가의 《알바생 자르기》는 공교롭게도 첫 번째 소설인 《어비》와 수미상관을 이룰 정도로 서사적인 공통점을 갖는다. 두 작품 모두 꼭대기에 있는 상사와 사회성이 결여된(결여되었다고 여겨지는) 아르바이트생의 갈등 과정을 그리고, 상사의 시각에 동화되어 아르바이트생을 어느 정도 보호하면서도 그에게 마뜩잖은 시선을 보내는 이가 중심인물이며, 결국 적응하지 못한 아르바이트생은 일을 그만둔다는 플롯까지 똑같다. 그리고, 알바생인 어비와 혜미는 모두 제 이름으로 불리지 못한다. 어비는 그가 보살피던 개의 이름을 화자가 따서 임의로 붙인 별명이고, 혜미는 작품 내내 ‘여자아이’로 불린다. 어비는 동료들과 어울려 대화하지 않을 권리를, 혜미는 퇴직금과 서면 해고 통보 등을 요구할 권리를 주장한다. 중심인물의 입장에서 외부인이자 비규범적 노동자에 해당하는 이들은 당연한 권리를 주장함에도 주위의 따가운 시선을 피하지 못한다.


그런데, 《알바생 자르기》의 마지막 문단은 《어비》의 엔딩과 사뭇 다르다. 상사와 아르바이트생 혜미의 중간에 놓인 직원 은영의 시점에서 시종 전개되던 이야기가 혜미가 해고된 이후 혜미의 시점으로 전환되며 마무리된다. 《어비》는 일다운 일이 무엇인지 질문하며 끝났지만 이 작품은 일에서 벗어난 직후의 사람을 조명하며 막을 내린다. 그리하여 이 책은 일로 시작하여 사람으로 끝난다. 노동의 의미와 가치를 찾아가기 위한 기나긴 여정은 역설적으로 노동에서 이탈한 자의 마지막 퇴근길에서 끝이 난다.

 

한낱 알바생인 주제 업무 시간에 딴청을 피우고 꾀병을 부리며 행사에 불참하면서 퇴직금과 보험금은 악착같이 받아내려고 하는 영악한 여자아이는, 사실 1차 회식비보다도 못한 월급을 받고 학자금 대출금 납부 독촉에 시달리고 있으며 퇴직금은 인대를 수술하는 데 다 써버린, 혜미라는 이름의 그저 외로운 인간에 불과했다. 싹싹하지 못한 성격의 그는 외부 인사가 방문할 때 평소에 짓지 않은 웃음을 억지로 지어낼 수 없었고 업무를 위해 아픈 다리를 안 아픈 다리로 바꿔치기할 수도 없었다. 그 여자아이는 혜미와 분리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노동과 사람은 구분될 수 없기 때문이다.


 

 

땀을 흘린다는 것


 

노동에 관한 치열한 상상들 사이 힘없이 불거진 실직자의 얼굴을 책의 마지막 페이지에서 마주하며, 일다운 일이 무엇인지에 대한 질문에 매몰되어 정작 사람을 사람답게 하는 것에 관해서는 소홀했던 것은 아닌지 생각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노동의 본질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노동과 노동자들을 두 갈래로 나눈 다음, 한 갈래는 낙오시키고 남은 한 갈래도 다시 두 갈래로 나누어 낙오시키기를 끊임없이 반복하는 동안 결국 진정한 노동과 노동자의 의미는 아득해졌다. 가장 인간과 친해야 할 노동이 인간의 인간성을 부정하는 방식으로 쓰이니 우리의 관계는 서먹해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노동은 땀을 흘리는, 무엇보다 인간적인 메커니즘으로 완성되는 행위이다. 어떠한 노동과 노동자도 그들을 함부로 재단하는 차가운 이분법에 좌절하지 않고 땀 흘릴 수 있는 세상이 오기를 바란다. 땀 흘리지 못하는 자들 또한 춥지 않게 세상이 먼저 따뜻해졌으면 하는 소망도 동봉한다. 노동이라는 두 글자의 단어가 마음에 얹힌 무거운 돌에 턱턱 막히지 않고 매끄럽게 굴러 나와 자유로이 고민하고 대화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바람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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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현정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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