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행복] 01 : 과거의 여행이 현재의 불안에게

돌이켜보면 내 삶은 항상 풍만했다
글 입력 2019.12.17 07: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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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나는 절망했다. 절망이라는 단어는 과하다. 그저 원하던 학과에 떨어지고, 반수를 했지만, 결과가 좋지 않았기 때문이다. 두 번째 대학 입학시험의 결과가 나올 때쯤에는 어릴 적부터 꿈꿔오던 장래 희망이 정말 내가 원했던 것인지, 그저 오랫동안 그 길을 준비했기에 관성의 법칙대로 가고 있는지 혼란스러웠다. 앞날이 안개에 쌓인 것처럼 희뿌옇고 앞으로 뭘 해야 할지 전혀 알 수 없었다. 일부러 미래를 생각하지 않으려고 애썼다.

 

부모님은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인지 물었고, 대답하지 못했다. 고기를 구우며 미래에 대해 토의했다. 속이 꽉 막혀 음식이 도무지 입으로 넘어가지 않았다. 불쑥 부모님이 말했다. 앞으로 뭘 해야 할지 모르겠다면 잠시 쉬어 가자고, 여행을 가보는 건 어떻겠냐고. 답답하던 속이 한순간 뻥 뚫렸다. 갑자기 모든 게 즐거웠고 웃음이 나려는 걸 꾹 참아야 했다. 그때도 지금도 여행을 좋아했던 모양이다. 약 1년 뒤, 나는 현실에서 도망치듯 혼자 긴 유럽 여행을 시작했다. 비행기 표와 일주일 치 숙소만 예약하고서.

 

여행을 끝낸 지 5년이 되었지만, 여전히 추억하면 즐겁다. 삶이 불만족스럽고 걱정이 잔뜩 쌓여있으면 있을수록. 여행은 과거고, 즐거웠던 일을 확실한 데다가 변하지 않지만 현실은 미래와 닿아있고, 즐거운 일이 있을지 확실하지 않은 데다 유동적이기 때문이다. 마냥 그립고 돌아가고 싶은, 그러니까 추억이 현실을 더욱 불만족스럽게 만드는 존재로만 인식된다면 여행 간 기억을 떠올리는 게 썩 바람직한 행위가 아닐 것이다. 그 대신에, 여행을 가서 어떻게 즐기고 무엇을 했으며 느꼈는지, 그때의 기록에 의존해 소소하게 적어보기로 한다.

 

 

나행복 버킷.jpg

 

 

여행을 갔을 때 몇 가지 개인적인 목표가 있었다. 유럽을 처음으로, 그것도 혼자 가는 만큼 순간순간을 길게 기억하고 싶어서 유럽 버킷리스트를 만들었다. 벨기에에서 와플 먹기, 맛있는 음식 해 먹기, 바닷가 해변을 맨발로 걷기 등 사소한 것도 있었고 공항 노숙해보기, 핸드폰 없이 움직이기, 기차 타고 아무 역에 내려서 걷기 등 다소 불안한 것도 있었다. 게 중에는 매일 여행 일기를 쓰기, 엽서 90편 보내기, 멋진 풍경, 조각상을 그려보기처럼 기록에 관한 버킷리스트도 있었는데, 덕분에 5년이 지난 지금도 여행이 생생하다.

 

광장에 백 명이 있다면 백 명 모두 여행 스타일이 다르다. 음식 취향, 관광지 호불호, 살면서 쌓아온 지식과 사상, 취향, 체력 등 많은 요소를 고려해야 하기 때문이다.

 

나의 경우는 한 마디로 '대책 없다.' 3개월 동안 길게 여행 가면서 교통수단에 대해 알아보지도, 예매하지도 않은 채 오직 일주일 치 숙소와 비행기 편만 들고 떠났다. 계획은 당일 아침이나 전날 세웠고, 장소도 여행하며 만난 사람들이 추천한 곳으로 움직였다. 어제까지는 이곳으로 가려고 준비하다, 마음을 바꿔 저곳으로 가는 일이 빈번했다. 차편이 잘 없어 새벽 일찍 움직이느라 고생하거나 간단한 일정임에도 제대로 알아보지 않은 탓에 상황이 꼬여 스트레스를 받는 날도 종종 있었다. 다 내가 죄인이니 무슨 일이 있어도 감당하는 수밖에 없지만.

 

이런 여행 스타일에는 하나의 요소가 더 따를 수밖에 없는데, 느긋하게 생각하기다. 말 그대로, 20대 초반 첫 홀로 유럽 여행은 느긋하기 그지없었다. 길을 걷다가도 힘들면 한참 앉아서 핸드폰이나 만졌다. 도착했을 때 이미 문이 닫힌 관광지가 있다면 다음 날 다시 찾아갔다. 여행 기간이 길고, 욕심이 없었기에 가능했다.

 

느긋한 여행 속에서 착실하게 버킷리스트를 성공시켰다.

 

 

4월 30일

 

서서히 해가 떠오른다. 그 모습이 꽤, 확실히 아름답다. 새벽에 도착했으니 이 추운 바깥에서 한 시간이나 앉아있은 셈이다. 숙소 위치는 알지만 처음 도착한 어두컴컴한 도시를 걷고 싶지는 않았다. 어떤 위험이 도사리고 있을지 모르니까. 무엇보다 이틀 뒤면 새벽에 같은 길을 걸어야 하니까 미리 지형을 알아두는 게 좋을 것이다. 숙소의 체크인 시간은 오후 3시인데 다짜고짜 아침 5시에 짐을 맡아달라 하기도 뭣하고.


원래 5시쯤 일어나서 6시에 도착하게 천천히 걷고 싶었는데, 생각보다 해가 뜨지 않더라. 지금은 5시 40분.  6시쯤 숙소로 가서 짐을 맡겨야겠다. 사실 이러다가 감기에 걸릴까 봐 많이 걱정이다. 파리에서 자꾸 이것저것 보고 싶은 욕심도 들고 교통비를 아끼고 싶기도 해서 오랫동안 걸어 다니며 찬바람을 맞았더니 컨디션이 영 아니다. 아프면 안 되는데. 일단 2, 3일 지켜보고 아플 것 같으면 미리 약을 먹어야겠다.


아침에 숙소에 짐을 맡기고 노트르담 성당에 갔다가 근처 광장에서 연어 크림 바게트 샌드위치 비슷한 빵을 사서 먹었는데 참 맛있었다. 연어는 짭조름하고 그림은 달지 않게 고소하고. 빵을 살짝 뜯어 던졌더니 참새떼가 날아와 주변을 한참 배회했다. 계속 안 주면 기다리다 기다리다 다른 곳으로 날아간다. 그러다 다시 빵을 던지면 어디선가 날아와 서로 먹으려고 다투고. 처음에는 떼거지로 오는 게 너무 무서워서 피하다가 나중에는 재미 들려서 계속 빵조각을 던졌다.


빵을 대충 다 먹고 우표를 산 김에 친구들에게 줄 엽서 10장을 썼다. 1시간이나 걸리더라. 느긋하게 일어나서 쁘띠 프랑스를 둘러보고 (생각보다 작아서 예쁘단 생각은 들지 않았다) 특이한 기구가 많은 놀이터에서 놀았다. 지금은 앉아 쉬고 있다. 아무래도 많이 무리한 거 같다. 움직이기 귀찮고 자꾸 하품만 난다. 꼭 가고 싶은 두 곳을 가긴 했지만, 대충 훑어봐서 나중에 후회할까 봐 겁난다.

 

 

결과부터 말하자면, 후회하지 않았다. 지금 일기를 다시 읽기 전까지 스트라스부르에 쁘띠프랑스가 있다는 사실 자체를 잊고 있었다. 읽고 나니 얼추 기억난다. 예능 프로그램 <꽃보다 할배>에서 파리 스트라스부르에 있는 쁘띠 프랑스에 대해 방영한 적이 있다. 딱히 보진 않았지만, 여행지에서 만난 누군가가 그 프로그램을 언급하며 쁘띠 프랑스를 추천해줬다. 그렇게 아름답다고. 그래? 그러면 또 가봐야지. 그렇게 스트라스부르로 가는 버스를 탔다.

 

예정보다 일찍 도착했는데, 할 일도 없고 해서 밀린 일기를 쭉 썼다. 간단하게 정해둔 일정을 마치고 나선 그림을 그렸다. 놀이터에서 바라본 풍경이 예뻤다기보다, 움직이기는 싫고 멍하니 있기엔 심심하고, 가족들과 신나게 뛰어다니는 아이들을 보니 괜히 기운도 나서 버킷리스트를 하나 더 채워볼 요량이었다.

 

 

나행복 그림.jpg

스트라스부르 놀이터에서 본 풍경


 

멀리 화려한 구조의 성당이 보이고, 앞에는 유리창이 달린 다락방을 여럿 둔 집의 지붕이 각자의 색깔로 칠해져 있다. 그 아래는 복사한 듯 유리창이 일정한 규칙으로 나열되었다. 존재하는 구조는 한국과 비슷한데, 건축물 자체는 굉장히 다르다. 여행하면서 유럽 양식의 집에 익숙해지다 못해 지루해졌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참 아름다웠다. 아기자기하면서 주변 건물과 조화를 이뤘다. 비록 실력이 모자라긴 하지만, 풍경화를 꾸준히 그리던 화가의 기분을 이해할 수 있었다. 풍경을 오래 관찰하다 보니 기억에도 오래 남는다. 무엇보다, 뭔가를 했다는 성취감이 여행을 좀 더 즐겁게 만들었다.

 

여행 내내 마냥 행복했던 건 아니다. 지금도 기억날 정도로 짜증 나고, 울고 싶었던 상황이 많은데, 일기에 거침없이 적혀있다. 한국에 있는 가족이나 친구에게 상황을 이야기하면 걱정할 게 뻔했고, 시차도 제법 났기 때문에 의논하거나 상담을 받기보다 일기장에 무작정 털어놓는 게 마음 편했다.

 


5월 4일


짜증! 투성이다. 아침에 암스테르담 가는 버스와 숙소를 예약한 뒤 오프라인 지도 앱만 믿고 중앙역으로 나갔는데, 위치가 안 잡혔다. 앱 문제인가 싶어서 캐시랑 데이터를 모두 지웠더니 저장해둔 지도도 모두 사라졌다. 말 그대로 홀몸으로 세상에 나오게 되었다. 어찌 되었건 중앙역으로 갔는데 필요한 유심칩을 판매하는 가게는 없고 시간은 2시.


본래 일정이던 겐트에 갈까 말까 하다가 아, 몰라! 죽기밖에 더 하겠어? 하는 생각으로 겐트행 기차를 탔다. 과연 오늘 무슨 일이 생길까. 데이터가 없으니 눈 감고 외줄을 타는 기분이다. 우선 독일에서 유심칩을 사던가 하고, 그전까지 어떻게든 견뎌볼 생각이다. 가능할지 모르겠다. 남은 2달이 걱정되는데, 누군가에게 털어놓을 수도 없고.

 

 

유럽 여행 중에 나를 가장 오래 괴롭히던 건 유심칩이었다. 핸드폰을 로밍하지 않더라도 유심칩을 바꾸면 데이터 사용이 가능한데, 여행지를 자주 옮겨 다니니 움직이는 나라마다 유심칩을 살 수 없었다. 방법을 찾다가 한국에서 몇 회사에서 유럽 전반적으로 쓸 수 있는 유심칩을 판다는 사실을 미리 알아갔었다.

 

본래 계획은 영국에서 유럽 전체적으로 사용 가능한 유심칩을 사 한 달 사용하고, 스페인에서 하나 더 살 생각이었다. 영국에서는 어찌어찌 유심칩을 잘 사서 사용했는데, 이 뒤부터 꼬였다. 미리 찾은 정보에 의하면 다른 나라에도 유럽 전역에서 사용 가능한 유심칩을 팔아야 하는데, 내가 찾아간 가게는 전부 팔지 않았을뿐더러 때로는 의사소통도 힘들었다. 독일에선 유럽 전반적으로 사용 가능하다는 줄 알고 유심칩을 샀다가, 다른 나라로 가자마자 데이터가 터지지 않아 낭패를 보기도 했다. 하루에 유심칩 가게만 세 군데 돌았던 적도 있다.

 

처음에는 종일 우울했고, 나중에는 만사 포기한 채 데이터 없이 여행했다. 숙소에서 와이파이를 사용할 수 있었고, 오프라인 지도를 미리 다운로드해두면 길 찾는 데 큰 문제가 없었다. 친구들과 대화할 수 없다는 게 유일한 단점이었는데, 대신 심심할 때 일기나 엽서를 쓰거나 그림을 그렸다. 그렇게 한 달 동안 데이터 없이 살다가, 여행 후반부 한 나라에 오래 있을 때면 소소하게 유심을 사서 썼다.

 

이때의 답답함은 일기에 적힌 그대로였다. 의지할 곳 없이 움직이면 늘 두렵고 겁난다. 막상 부딪혀보면 대게 별거 아닌데, 언제나 그 사실을 잊어버린다. 지금의 나 역시 막상 움직여 보면 별일 아니라는 중요한 사실을 잊고 사는 것 같다. 겁나서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무엇도 되지 않는 걸 알면서도 몸을 사리고 망설이게 된다. 잊고 살던 여행 중 깨달음을 몇 번이고 상기한다면 새로 도전할 용기가 날까.

 

편지의 뒷부분에는 이렇게 적혀있다.

 

 

나행복 일기.jpg

 

 

방금 듣고 있던 음악에서 ‘상관없잖아, 잃을 것도 없잖아. 앞으로 달려갈 수 있어.’ 하는 가사가 나왔는데 딱 내게 하는 말인가 싶다. 그래, 사실 돌이켜보면 내 삶은 항상 풍만했다.

 

겐트에서 지도를 찾을 수가 없어 무작정 걸어 다녔다. 길을 잃어버리지 않게 주의하느라 고생했다. 거리거리가 예쁘긴 하더라. 뭔가 유명한 게 있댔는데 그건 보지 못했다. 작고 주택가가 모인 평화로운 마을. 나를 뺀 모든 사람이 일상생활을 하는 느낌이었다. 월요일인데 쉬는 가게가 많았던 걸 제외하면.

 

음악을 틀지 않고 그냥 계속 걸었다. 처음 온 곳인데 익숙하다 했더니 작은 마을을 여행할 땐 항상 이런 식이었던 거 같다. 생각 없이 무작정 걷기. 겐트를 왜 왔지 싶으면서도 하늘이 푸르고 거리가 예쁘니 걸을 맛이 나고. 결국 마지막에는 늘 그렇듯 딴생각을 하느라 거리도 제대로 못 봤지만. 빵을 사서 고기를 구워 고추장 스테이크 샌드위치를 만들어 먹어야겠다는 생각이 제일 컸다. 점점 여행에 익숙해지나 보다.

 

이따금 보이는 벨기에의 몇몇 지붕은 와플 모양을 닮았다. 와플을 닮은 지붕이 많은 와플이 유명한 나라. 참 웃긴 거 같다.

 

 

과거의 여행기록을 읽으면 추억을 되새기는 것 외에 당시 글의 의미를 해석하는 재미도 추가된다. 돌이켜보면 내 삶은 항상 풍만했다는 게 저 부분에서 왜 나오는 감상인지 고민하거나, 와플 지붕이 대체 뭐가 웃긴 지 당시의 유머 감각을 의심하는 일은 미뤄두기로 하자. 그보다 중요한 건 당시에 들었던 음악이 굉장히 낯설다는 점이다. 내가 이런 노래를 안다고? 인터넷에 찾아보니 과거 짧게 좋아했던 아이돌의 노래였다. 좋아하는 가수의 노래는 모두 찾아 듣다 보니 가사도 제목도 모르는 경우가 많았는데 저 때가 딱 그랬다.

 

일기를 읽고 있으니 다시 그때 생각했던 게 기억난다. 여행도 얼마든지 일상이 될 수 있다는 점이다. 첫 한 주일은 실감이 나지 않아서 꼭 꿈을 꾸는 거 같고, 다음 일주일은 정말 여행 왔구나, 실감했고, 그 뒤로는 힘든 일이 일어나면 힘들어하고 즐거운 일이 일어나면 즐거워하다가, 한 달이 지나자 여행이 익숙해졌다. 짐을 가지고 움직이는 것도, 식사를 챙기는 것도. 한곳에 오래 있는 것도 아닌데 변화하는 것 자체가 지루한 일상으로 변했다. 이것도 여행을 길게 간 덕분에 알 수 있었다. 무엇이든 결국 적응할 수 있다는 것. 물론 그럼에도 스트레스를 받고 힘들다면 과감하게 벗어날 수도 있어야겠지만, 그와 별개로 당장 낯설고 힘들다고 평생 어렵지는 않다는 사실을 알았다. 운동도 처음 할 때는 너무 힘들고 지치지만 익숙해지면 좀 더 수월하게 할 수 있는 것처럼.

 

여행 일기를 쓰거나 그림 그리는 일 모두 좋은 추억이 될 것 같아서 시작했다. 비슷한 이유로 시작한 버킷리스트가 바로 엽서 쓰기다. 일기나 그림은 자신에게만 추억을 남기지만, 해외에서 도시마다 풍경이 다른 엽서에 지금의 기분과 상황을 섬세하게 적어 친구에게 보낸다면 친구에게도 좋은 추억이 될 테니까. 워낙 글을 길게 쓰는 편이라, 엽서 한가득 글이었다. 편지에 가까운 모양새였다. 폼페이에서 넓은 돌 위에 앉아 엽서를 쓸 때, 한 외국인은 뒤에서 무슨 뜻인지 모를 글을 읽더니 굉장히 길게 쓴다며 놀랐었다. 엄지를 치켜올리곤 유유히 갈 길을 가던 그 모습이 우스웠다.

 

처음에는 가볍게 시작한 엽서가, 점점 하나의 프로젝트처럼 변했다. 버킷리스트 중에 ‘엽서 90편 보내기’에 체크가 되어있지 않은 걸 보면 90편까지 보내진 못한 모양이다. 그래도 약 70편 넘게 보냈을 거다. 엽서는 싼 편이어도 해외 배송 우표는 제법 비싸서, 엽서에만 30만 원은 사용했다. 친구 대부분에게는 엽서 하나씩, 가족에게는 두세 편씩 썼다. 내게도 엽서를 보냈다.

 

 

나행복 엽서.jpg

일기를 적었던 공책,

가족과 나에게 보냈던 엽서


 

엽서를 받은 친구들의 기분은 잘 모르겠으나, 내게는 실제로 좋은 힘이 되었다. 힘들고 피곤해서, 내가 언제부터 이렇게 축 늘어져 아무것도 못 했는지에 대해 고민하던 날, 방 청소를 하다 내게 보낸 편지를 발견했다. 엽서 속에 들뜬 감정이 느껴지고, 세상을 향한 밝은 시선이 보였다. 색달랐다. 언젠가의 나는 이렇게 긍정적이고 자신감이 넘쳤다는 게 놀라웠다. 고작해야 5년 전이니, 지금과 다를 게 없다고 생각했는데 제법 변화한 모양이다.

 

엽서를 읽고 있으니 괜히 코가 찡하고, 용기가 생겼다. 그때처럼 뭐든 할 수 있을 것 같다. 언젠가의 내가 희망에 차 있었다는 건, 지금의 나도 그럴 수 있다는 증거니까. 다른 사람이 한 번 해본 일을 왠지 나도 할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나의 여행은 언제나 회피에서 시작한다. 현실에서 피곤하거나, 두렵거나, 지치는 일이 있다면 절실하게 여행 가고 싶어진다. 몇 번은 꿈만 꿨고, 몇 번은 실제로 갔다 왔다. 여행을 가기 전에 나에 대해 좀 더 알고 고민을 해결하고 싶다는 기대에 부풀지만, 여행은 평상시보다 더 많이 걷고 더 많은 걸 보게 할 뿐 현실을 완전히 바꿔주거나, 현실과 멀어지게 해주지 않는다. 회피는 부메랑 같아서 결국 언젠가는 돌아오게 된다.

 

그러나 여행은 또 하나의 일상이기에, 일상에서 그러듯이 소소하게 깨닫는 일이 생긴다. 이때 경험을 살면서 잊어버릴 수는 있지만, 사라지지는 않는다. 여행의 기억을 들추다 보면 다시 생각난다. 느긋하게 지낼 때의 행복이나, 풍경을 오래 바라볼 때의 평화, 막상 겪게 되면 다 별일 아니라는 사실과 무엇이든 시간이 지나면 적응할 수 있다는 용기까지. 물론 아무것도 깨닫지 않고 끝나는 여행이라 하더라도, 여행은 일상을 벗어나 즐긴다는 자체로 큰 가치가 있다. 사람은 때로 잠깐의 기억으로 평생을 살기도 하기 때문이다.

 

 

나행복 여행.jpg

 

 

교훈을 주는 척 글을 마무리 짓는 버릇을 고치려고 했는데, 결국 또 이렇게 되었다. 일기를 읽고, 그림을 보고, 엽서를 읽으니 그때 깨달았던 긍정적인 교훈이 새삼 다시 와닿아, 어쩔 수 없었다. 비단 여행이 아니더라도 사소한 기억, 추억, 행복하고 새로 무언가 깨달았을 때의 희열이 나를 살게 한다.

 

더 젠체하지 않기 위해, 마치막으로 그때 내게 보낸 엽서의 내용을 남겨둔다. 지금을 잊지 말라는 말을 실천하기 위해.

 

찰리 채플린의 자전적 영화 <라임라이트>에 이런 대사가 나온다. “죽음만큼 불가피한 게 있지. 그게 삶이야. 인생이라고. 지구를 움직이는 우주의 힘을 생각해 봐. 그게 바로 당신 안에 있는 힘이야. 그걸 사용하려는 용기와 의지만 있다면.” 그때 내게 보낸 엽서는 꼭 이 글을 읽는 기분이다. 언제 읽어도 낯간지럽지만, 싹이 피어나듯 울렁거린다.

 


안녕.

여행지마다 엽서를 사서 내게 보낼 생각을 여행의 1/3이나 지난 뒤에 하게 되네. 모든 거리가 비슷한 듯 색달라서 이동을 할 때마다 처음 본 도시의 아름다움에 넋을 잃고 바라보게 되는 거 같아. 지금 내가 보고 있는 풍경이 진짜인가, 혹시 꿈은 아닌가 싶고. 우울할 때는 한없이 우울해지다가 다음 날이면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황홀경에 빠져.


체리 맥주 하나에 행복하다는 말이 절로 튀어나오고 여행했던 것과 그보다 조금 더 과거의 일상을 떠올리면서 내 삶은 언제나 풍만하고 벅차오르는 일로 가득했다는 걸 깨달았을 땐 조금 놀라기도 했지. 음식의 소중함을 알고 빨아서 깨끗해진 옷을 입을 때의 즐거움을 깨닫고 햇빛이 주는 마음의 평화를 느끼면서 조금 덜 보고 엉망진창으로 다녀도 난 지금 좋은 여행을 하고 있구나 싶어. 아무 일 없이 한국에 돌아가길 바랄게.



또다시 나에게.

난 지금 12즈와티, 약 7천 원짜리 만두를 먹고 있어. 여기 폴란드에선 dumpling이라고 하나 봐. 한국이랑 맛이 좀 달라. 속의 고기를 갈아서 아몬드나 계피와 함께 넣은 거 같아. 좀 짜긴 한데 맛있어. 따뜻해서 기분이 좋고. 지금 이 여행이 네게 어떤 의미로 다가올까. 잘은 모르겠지만 또 다른 여행을 할 용기의 밑바탕은 분명 되었을 거야.


지금의 넌 뭘 하고 있을까. 난 상상할 수가 없다. 항상 네가 꿈꾸던 미래는 오지 않았고 세상은 내 생각보다 늘 넓어서 작고 보잘것없는 나라도 할 수 있는 일이 무궁무진하다는 걸 깨달았거든. 난 남들보다 하고 싶은 게 많고 할 수 있는 것도 많으니까. 만일 평범한 삶이라면 축하해! 가장 평범해지는 것만큼 가장 어려운 것도 없으니까.



안녕.

내가 15년도 유럽에서 네게 쓰는 마지막 엽서야. 난 지금 폼페이에 와있는데 덥지만 참 좋다. 마지막을 축복해주는 듯 바람이 잔잔히 불어서 땀이 날 정도는 아니야. 그동안 참 많은 일이 있었는데 3개월은 생각보다 긴 시간이라서 짜증 나고 스트레스받은 일은 벌써 기억나지 않아. 잘 됐지. 돌이켜봤을 때 드디어 이 지긋한 여행이 끝나는구나가 아니라 더 여행하고 싶고 이 아름다운 곳을 떠나기 싫다는 생각이 드니까.


수고 많았어. 정보 하나 없이 낯선 땅에, 그것도 한밤중에 떨어져서 느닷없이 바뀐 호텔을 찾아가느라 고생했을 때부터, 유심 때문에 스트레스 받았던 날, 이유 없이 아무것도 하기 싫어 한국으로 돌아갈까 고민했던 베를린을 지나 이곳 이탈리아의 로마, 그리고 폼페이까지 오느라 고생했어. 덕분에 즐거웠고, 좋은 사람들을 만났고, 믿을 수 없는 광경을 두 눈으로 보고 느끼고 만지고 깨달을 수 있었어. 너도 알다시피 피에타는 뜻이 ‘신이여, 나를 구원하소서’야. 이 여행이 나의 피에타였던 거 같아. 지금 이 시각과 감각과 감정과 나를 잊지 말아줘.

 

 

 

 

전문 김혜원.jpg

 

 

[김혜원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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