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시간] 나의 나, 나의 나, 나의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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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1.27_
해야 할 일들을 모두 끝내니 지금이다. 눈 깜빡하니 지나있는 보름이라는 긴 시간이 너무 신기하다. 아무런 계획이 없어서 무작정 <아주아주아주아주특별한날> 이후에 올리겠다고 한 작품을 막상 다시 만나려니 너무 막연하다. 반년 가까이 만나기를 거의 포기한 작품이다. 다 그려놓고 사진 자료를 만들지 않았고, 거의 다 완성해 놓고 결국 렌더링하지 못한 영상 기록이다. 제목도 없다. 사실 지어야겠다는 생각을 계속했는데 마땅한 것이 떠오르지 않아 지어주지 못했다. 그리고 기록의 일부는 반을 아카이브 하다 말았다. 이렇게 다시 하나씩 짚어보니 생각보다 방대한 짓을 저지른 것 같다.
누가 봐도 이 짓을 저지른 사람은 마음 상태가 불안정하고, 빈센트 반 고흐의 작품을 떠나보지 못해서 꼼꼼함이라곤 없는 손을 가지고 허술한 놀이터를 지어 숨어 숨 쉬는 사람의 이야기다. 게다가 게으른 탓에 아마 한 달 남짓한 기간 내내 카메라를 켜고 그림을 그리고 울고 자빠지고 있었다. 아마 그림을 그어대던 ‘나’라는 그는 나의 노트를 보면 분명 화를 낼 것이다. 하지만 그때의 네가 감정을 다루는 데에 있어 전혀 성숙하지 못하고 그래서 정리되지 않았던 것이 보이는 것을 어떡하겠는가.
모든 과정을 기억하기엔 그 기억들이 차차 흐려지고 있지만, 그것만은 분명히 기억난다. 정말 선명하게. 처음으로 그렸던 나의 추상화 앞에서 다른 그림 앞에서 느껴보지 못한 알 수 없는 그 꽉 차오르는 기분을 느꼈던 것을. 내가 한 덩어리의 사과라면 온몸에 과즙이 터져 오르는 듯했던 그 기분을 기억한다. 내가 모르던, 그러나 마주하고 싶던 것을 비로소 긴 시간 내내 끄집어내어 마주한 그 묘한 기쁨을 기억한다.
아마 오늘 밤 집으로 돌아가서 모든 작품을 다시 펼쳐봐야지. 제목은 정말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다. 작품 이름으로 하던 노트 파일명은 일단 <.>로 해두어야겠다.
<나의 나, 나의 나, 나의 나>, 2019
<시간과 공간에 관계없이 우리는
존재로 이해받을 수 있을까 : 자아 콜라주>
2019
<대면을 위한 거울>, 2019
2019.12.02~
되돌아보면 어떻게 시작할지, 언제 시작할지 정해놓지도 않았고. 사실 시작하고자 했던 마음조차 들지 않아 당황스럽던 중, 그 힘든 밤이 갑작스레 시작되면서 너무나 혼란스러워졌고, 도망치려 했던 것인지, 자책하려 했던 것인지, 이해하고 싶던 건지 그 붉은 그림을 그리며 아무도 모르는 사이에 시작되었지.
-가을 즈음 다시 작품을 떠올리며 쓴 노트
가끔 작품을 만날 때마다 그런 것이 궁금하다. 한 명의 사람은 하나의 작품을 만들 때 그 시작을 어떻게 맞이하는 걸까. 특히 그것이 단 한 번도 해보지 못한 미지의 영역일 때는, 그 시작을 어떻게 가지는 걸까. 문득 노란 덩어리 모습의 작품에게 그렇게 물어보고 싶었다. 이번 작품은 시간이 지난 지금 다시 되돌아보면 생애의 당연한 순간을 맞이한 듯이 하나의 작은 의식처럼 치러지고, 태어났다. 태어났으니 이름을 부여받고 세상을 살아가는 것처럼, 스무 살이 되었으니 어른이라 불리는 것처럼, 스물셋의 우울증의 시작에는 마음속에 꼭꼭 기억하고 있던 해바라기를 기어가듯 찾아가게 되었다.
원래 처음부터 나는 조금 더 작품을 만들어 내 세상을 지어가겠다는 마음으로 고흐의 <해바라기>를 마음에 품고 있었다. 하지만 현실이 그 마음을 끝까지 이어갈 수 있도록 흘러가 주지 않았다. 순식간에 고흐의 <해바라기>는 주체 못하는 감정의 전쟁터 속 급박한 피난처가 되었다. 나는 전쟁이 일어난 밤을 원망하고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나를 원망했다. 나는 미리 준비해두었던 종이를 꺼냈고 생각 없이 옆에 <해바라기>를 두고 따라 그리기 시작했다. 작품의 시작은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순간에 이뤄졌다. 사실 조금 많이 아프게 시작한 것 같다.
그 첫날 밤에 그려진 해바라기의 일부는 그래서 다음 날 아침 바로 종이 뒤로 보내졌다. 아마 그 처참하고 못난 그림을 또 그대로 이어나가는 건 날카롭게 베인 상처 위를 손가락으로 문대는 것 같아 거북했던 것 같다. 상처는 그대로 두면 언젠가 아물 것이니 뒤로 보내고, 어차피 이미 시작된 것을 다시 마음을 추스르며 시작하기로 했다. 집 하나 작게 지어보자는 것과 닮은 결심이었다. 집을 한 번도 지어보지 못했으나, 땅을 펼쳤으니 그 위에서 무엇인가를 해야 할 것이 아닌가. 무엇보다 내가 머물 곳이 필요했다. 그때의 나는 마땅히 의지할 곳이 없었다.
하룻밤 사이 일어난 작품의 시작은 숨 한번 들이마시고 내쉬는 짧은 순간 작고 큰 모든 근육과 기관이 당연하다는 듯이 꿈틀거리며 제 역할을 하는 것처럼, 내 외면과 내면 모두를 아우르며 일어났다.
*
이 작품은 허우적거리는 나와, 그렇게 정처 없이 급박하게 휘젓는 손에 겨우 잡힌 어떤 것들이 뒤섞인 단상이다. 이 내면/외면의 행위의 모든 시작과 과정이 ‘나’라는 것에서, 그렇게 나타난 여러 형태의 작품은 자아의 콜라주하고 할 수 있다.
-조금 거칠게 말해서, 있는 대로 뜯어 모은 나의 단상을 나열하면 내가 나를 그리고 다른 이들이 나를 이해할 기회를 얻을 수 있을까.
-작업노트일부
그런 “시작”이 일어나기 전에 <해바라기>를 두고 함께 하고 싶었던 작업에 대해 생각하고 기록해두었던 계획도 역시 있었다. 이후에는 그것을 참고하려고 열심히 노력했지만 그런 모습으로 시작을 한 만큼 그림은 결국 또 내 마음을 따라 이리저리 흘러갔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계획과 제멋대로인 나를 작품 앞에서 하나로 연결해주는 한 단어가 있었는데, 바로 “콜라주”였다. 있는 대로 나의 모든 모습을 재료대 위로 올려 하나하나 영상이라는 시간의 흐름 위에 올리겠다는 방식에 대한 기초적인 목적이었다. 덕지덕지 가지런하지 못한 콜라주. 나는 모든 과정을 담으려는 형태를 하고 있는 이 영상을 자연스럽게 계속 콜라주라고 불렀다.
“지나치게 일상적이고 현실적인 근거들과 나만의 세계에서 이루어지는 인식 그리고 그렇게 일어나는 이미지들의 표면화된 형태들을 나열하면 어떤 간극이 일어날까. 그 사이에서도 연관성이 드러날 수 있을까”
: 나를 향한 나의 태도를 정해야 한다.
-> 수집된 의식과 인식, 이미지를 하나의 결로서의 나로 이뤄낼 수 있는가.
= ‘나’의 파편으로 이루어진 콜라주된 ‘나’
-> 정해지지 않음으로서의 무형태의 콜라주 = 모순
=> 결국 완성할 수 있는가, 아님 여전히 불가능한가가 중요한 지점이 될 것이나 이조차도 확언할 수 있는 기준이 있느냐가 모호한 상태.
-작업노트일부
영상은 내가 그림을 그리는 과정이 찍힌 모습을 제일 현실적이고 객관적인 순서대로 나열하고 있다. 그리고 이미지와 텍스트의 형태를 한 이야기와 “작업 중 겉으로 드러나지 않은 일”들이 저마다의 형태로 영상에 함께하고 있다. 죽은 꽃, 노란 덩어리 등 여러 상징은 내가 이 그림들을 그리는 과정 중에 생각 대신 자주 떠올리던 언어들이다. 나는 그렇게 종종 감정을 느낌이 아니라 형태로 떠올리는 나의 모습을 처음으로 가시적인 영역으로 끌어올렸다. 동시에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작업 기간 동안 읊었던 모든 내용을 최대한 기록했고 그중 몇 가지 이야기를 시간 위로 콜라주 했다. 최대한 많이 토하고 나에게서 나온 나의 근거들을 열심히 기록하고 반죽했다.
그리는 사람과 그 위에 무심코 올려진 드러나지 않은 이야기들은 관계를 맺는 듯하면서 그러지를 못한다. 왜냐하면 다른 레이어로 맞대고 있는 두 흐름은 한 사람 안에서 동시에 일어났으면서도 동시에 일어나지 못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는 의식과 감정, 그리고 의지는 시간의 틀로서의 “순간”에만 잔류할 수 없기 때문일 것이다.
알 수 없고 모호하다는 이유로 관심에서 배제된 채 일어나는 빈틈 사이를 노닐면서 그곳에서 ‘나’라는 존재의 가능성을 수집하고 싶었다. 나를 설명하기 위해서 굳이 볼 가치가 없다고 취급되던 구석구석을 처음으로 깊이 들어가 끌어 올렸다. 모든 요소들이 ‘이성적인 논리’라는 관계로 맺혀져 하나의 작품을 이루었다고 할 수 없을지는 몰라도, 이 모든 일이 나와 작품이 보내는 시간 동안 일어났다는 것에서는 분명한 관계를 맺고 있다. 서로 다른 정체성의 작대기들일지라도 모두 내 영혼을 관통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들은 불가피한 한 덩어리를 이루고 있다.
나는 늘 궁금하다. 완벽히 파악될 수 없는 나의 모든 파편들과 그것들의 연결구조들이 구태여 객관적으로 이해받기 위한 논리 위에 올려져야 하는가, 그래야 그것이 나를 증명하는 것이 될 수 있는 것인가. 당신은 당신 자신을 논리적으로 펼쳐낼 수 있는가? 그것이 가능한가, 할 수 있다면 그것이 혹은 그것만이 유의미한 것인가.
그리고 지금껏 그 모든 행위들이 남아있는 나를 위해 그리고 나를 향해서 이루어졌던 순간이 있었던가.
나는 어디에 서 있어야 하고, 나는 도대체 누구인가. 우리의 존재를 정의하는 기준과 잣대는 결국 어디에 있는가. 그 잣대라는 것이 존재한다면 반대로 우리의 얼마나 많은 곳이 잊히고 있는가.
“나의 그림은 내가 말로는 할 수 없는 것들을 보여준다”
-빈센트 반 고흐
최근에 다시 마무리 작업을 하면서 작품이 나와 나 사이에서만 일어난 이야기가 아니라, 내가 바라본 세상을 향해 묻는 작은 목소리들도 숨겨져 있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곳에서의 나)는 무엇인가에 홀린 사람처럼 “존재”라는 단어를 읊조린다. 그는 불가피하게 자신이 존재하게 된 시간과 공간을 탓해본다. 우리가 다른 시대에 태어났다면, 다른 곳에서 태어났다면 비로소 존재로서 이해받을 수 있었을까. “존재”를 둘러싼 나를 향한 그리고 내가 살고 있는 세상을 향한 물음과 독백이 작품 전체를 이끌어가고 있다.
고흐의 <해바라기>는 아름다운 작품이기 전에 나에겐 “존재”를 바라보는 시선에 대한 것이다. 이전에 남긴 기록들을 살펴보면 나는 이미 작품을 시작하기 전부터 고흐의 영혼을 바라보는 시선을 동경하고 있었다는 걸 다시 확인할 수 있었다.
자신을 위한 영혼의 눈으로 보고 남겨진 당신의 꽃들은 화사하게 개화된 꽃들만으로 채운 것이 아니라 각자의 삶의 모습을 그대로 그려낸 모습이다. 그냥 나는 그런 것이 좋았던 것 같다. 사람은 결코 순수할 수 없으나, 예술과 그림이기에 비로소 실현된 당신이 바라본 영혼의 순수함이 끌어 올라온 그 작품들의 모습이 좋았던 것 같다. 그래서 내가 동경할 수밖에 없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나는 사람으로서의 순수한 존재로 존중받는 것이 더이상 불가능하다고 믿고 있기 때문에.
-2019년 6월 24일
포근한 노란빛도 좋고, 그에 어울리는 해바라기를 그려낸 고흐만의 손길도 너무나 아름답다. 하지만 나는 그 따스한 세계를 이루고 있는 주인공들이 이미 삶의 끝을 바라보고 있는 존재들이라는 지점에서 고흐의 존재를 바라보는 시선을 더 가까이 느끼곤 했다. 해바라기들이 죽어가고 있다는 것이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그림은 따스하고, 아름다움을 이루고 있는 해바라기는 잎을 떨구고 기이하게 뻗쳐있고 구부러진 제 모습을 고흐의 세계 안에서 함께 지키고 있다.
나는 삶의 마지막에 이른 해바라기마저 노란빛의 포근한 품에 안아 든 이 작품이 너무나 좋다. 그대로의 모습을 살펴봐 주고 담아내는 고흐의 순수한 시선이 너무나 좋았다. 좋아하는 사람이 들어올 방을 꾸미기 위해 그리는 그림이라면 당연히 다들 멋지다는 화사한 해바라기를 그릴 수 있을 것을, 아마 고흐는 눈에 담긴 해바라기 그대로를 그리기를 포기할 수 없었던 걸까. 아니, 이 질문도 틀린 것일지도 모른다. 구부러지고 잎이 떨어진 해바라기도 충분히 아름다웠던 것일지도 모른다.
어떻게든 화려하게 제 모습을 비춰내는 해바라기를 피워내기 모자라 만들어내는 세상 사이에서 내가 찾던 것은 삶의 끝을 바라보는 해바라기 모습마저 안아주는 시선이었던 것 같다. 그런 마음이 있었기 때문에 내가 고흐의 해바라기를 그렇게 바라볼 수밖에 없던 것이 아닐까.
거창한 것이 좋은 게 아니었다. 나는 그냥 “그대로”라는 그 시선이 너무 좋았다. 존재를 그렇게 바라볼 수 있음을 그의 작품에서 다시금 확인하곤 했다. 존재의 모습과 함께 담긴 고흐의 마음도.
나는 이 해바라기가 축복을 받은 것 같다. 시들어 잎이 떨어져 가는 모습을 외면하거나 왜곡하지 않고 그 모습 그대로 따스하게 바라봐주고 또 그림으로 기억해준 이가 있지 않은가.
나도 나를 그대로 바라보고 싶다. 근데 이미 너무 어려운 지경에 이른 것 같아 허우적대는 것이 지난날의 모습이었다. 그 누가 아는가, 나를 나 그대로 바라보는 방법을. 한 사람을 정의하는 수많은 단어를 배제하고, 나의 이름도 배제하고, 나의 주변을 배제하고 오롯이 ‘나’라 부를 수 있는 나를 지긋이 바라보는 방법을. 그런 방법이 이 세상에 없다면, 그럴 수밖에 없다면 나는 내 세상을 쌓아 올리는 것밖에 방법이 없었다. 그랬다. 이런 의지를 작품을 그리는 당시에는 알지 못했지만 그런 것이 없었다면 이 여정을 지금처럼 완주하지 못했을 것이다. 의지 역시 한순간에 잔류하지 않으니까. 모든 마음은 지금 여기에도 조용히 존재한다.
숨 쉬는 방법을 몰라 숨 쉬는 이에게 찾아가 숨을 쉬는 법을 물어보고 천천히 연습한 것처럼, 한 번도 봐보지 못한 외부에 다듬어지지 않은 나를 바라보고 싶어서 내가 아는 순수한 시선을 가진 이를 찾아가 천천히 손을 움직였다. 아마 내가 힘을 내어 이 알 수 없는 처음의 작업 방식을 마무리 할 수 있던 이유일 것이다.
사실 이 노트도 기적이다. 열심히 나는 이 상자 안에서 나를 노래한다. 아팠던 나를, 내게 힘을 주었던 이를, 내가 나도 모르게 바라왔던 것을 이야기해나간다. 세상은 불필요하다 정의한 나의 시선을 감히 부른다.
*
2019.12.06~
내가 만든 모든 작품 뒤에는 나라도 나를 안아주고 싶은 마음이 있는 것 같다. 안으려니 팔을 파고들어 가야 할 곳은 어딘지, 어떻게 안아주어야 하는 모습인지 몰라서 나를 더듬는 이야기. 말로는 작고 단순한 행동인데 그것조차 너무 어려워서 이런 과정을 겪고 이런 나의 일부를 만들어낸다. 그래서 요즘의 나에게 존재하는 나의 세계는 나로부터 시작해서 다시 나를 향해 말려 들어가는 모습이다. 구멍이 있으나 구멍이 없는 도넛의 모습이다. 분명히 존재하나 보이지 않을 세상의 시작점의 이름은 갈망일 것이다. 제 목의 뼈와 핏줄을 더듬는 손끝의 간절함일 것이다.
새까만 상자를 다 쓰고도 나는 아직도 이번 작품의 제목을 정하지 못했다. 다시 돌아봐야 한다는 의미인 것 같다. 가장 처음으로 돌아가 작품을 그리는 내내 놓치지 않고 기록한 노트를 살펴봤는데 그곳에서 내가 이 그림을 “거울”이라 부르고 있던 것을 발견했다. 이 그림은 나도 한 번도 보지 못한 내 영혼과 그 주변의 마음을 비춰본 내 생애 최초의 거울이다. 어지러운 마음 사이에서 제빛을 잃지 않은 노란빛의 덩어리. 그것이 내 안에 있는 모습이다. 감히 내 영혼의 모습이라 말할 수 있을까.
“그때는 몰랐는데 다시 보니 어지러운 마음이다. 애써 가리고 애써 밝아 보이고 싶은 모습이 그림에서 보이는 것 같아서 마음이 조금 아리다. 왜 이리 안쓰러운 마음이 드는지 모르겠다. 많이 아팠을 것이다. 작은 것에 의지하려 할수록 더 절박하다는 의미일 테니”
내 영혼의 모습은 계속 자라고 변하고 흘러갈 것이다. 스물셋의 내가 가진 영혼의 모습을 간직할 수 있게 되어 기쁘다. 그때의 나에게 의지할 수 있는 존재가 있어서 다행이라며 안도의 숨을 내쉰다. 세 개의 작품과 그 뒤에 수두룩하게 쌓인 여러 기록은 너무나 무겁지만 너의 마음을 알고 있기 때문에 이번 기회에 안아 보았다. 이렇게 기록됨으로써 앞으로도 너를 데려갈 수 있을 테니 또 다른 안도의 숨을 내쉬어 본다.
손바닥에는 어떻게 작업을 했을지 가늠조차 어려울 정도로 노란 페인트가 지독하게 묻어있는 아이. 동경하는 <해바라기>와 그것을 따라 그린 거울과 그 앞에 비친 숨겨져 있던 영혼의 모습과 그 풍경을 모두 지켜보고 발견한 덩어리들을 올린 시간의 흔적. 안식처였다. 작고 네모난, 각설탕처럼 물러도 제 모습을 충분히 지켜내는 단단한 안식처. 그때의 나에겐 아무도 모르게 의지할 존재가 있었다. 그 존재와 내가 뒤엉키던 시간의 콜라주다. 저 해바라기와 나의 관계를 설명하라면 여전히 어떻게 해야 할지 잘 모르겠지만 그렇게 만났기 때문에 많은 것을 내 안에서 끌어올릴 수 있던 것은 사실인 것 같다. 이미 많은 것이 증명하고 있다.
[오예찬 에디터]<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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