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인생이 거지 같은 사건들로 채워진 이유 [도서]

우울은 어디에서 시작했길래
글 입력 2019.11.13 09: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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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이 거지 같은 사건들로 채워진 이유 

남연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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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한주는 어떻게 지내셨어요?"


상담 선생님의 질문으로 시작하는 첫 장은 이 책의 주인공 남연오가 마음의 병을 앓고 있다는 사실과, 최근 도에 수업을 수강하고 있다는 것, 그리고 그가 작은 책방을 좋아한다는 것을 알려준다. 그러다 작가 이름과 주인공의 이름이 둘 다 '남연오'라는 걸 깨달았다. 에세이일까? 에세이라고 하기에는 충실하게 전지적 작가 시점을 따르고 있는 소설의 형식이었다. 에세이와 소설 사이 그 어딘가에 위치해있겠거니 어림짐작하고 읽어나갔다.

 

남연오는 아팠다. 그는 다니던 직장에서 1달을 쉬기로 결정을 내렸고, 일상과 더불어 전반적인 생을 톺아본다. 우울은 어디에서 시작했길래 이렇게 아플까.

 

남연오의 인생이 거지 같은 사건들로 채워진 이유는 대체 무엇일까. 


 

 

직장

아주 보편적인 지옥 


 

 

연오는 정말로 열정적인 포부를 품고 은행에 취직했다. (중략) 그러나 입사 5년차, 4년 동안 배운 것은 오로지 부실 업체를 다그치는 말투였고, 연오는 그 패턴에 익숙해지는 것이 너무도 고통스러웠다.

 

- 67p

 


연오는 은행에서 5년째 근무 중인 직장인이다. 큰 포부를 품고 취직에 성공했지만 아무리 애를 써도 그는 사회와 회사의 톱니바퀴 중 하나일 뿐, 손에 잡히는 혹은 눈에 보이는 결과물을 만들어 낼 수 없다. 그의 눈앞에는 오직 거래처의 반 토막 나는 매출액 뿐이었다. 그렇게 연오는 지쳐갔다. 이것이 비단 연오의 문제일까. 대한민국에서 일하는 수많은 직장인들이 이렇게 살아갈 것이다. 자신의 한계를 넘어야 한다는 주문에 사로잡혀 죽도록 노력해하면 그 끝은 노동인구 1이 되는 것뿐. 연오는 이곳을 "아주 보편적인 지옥"이라고 표현한다.

 

반복적이고 무의미한 업무만으로도 죽을 것 같은데 그곳엔 연오를 죽을 것 같이 몰아붙이는 상사, 윤명열이 있었다. 윤명열은 부하직원의 학벌, 성별, 거주지를 따져 차별하고 모든 일을 자기중심적으로 판단하며 자신에게 조금이라도 피해가 오면 불같이 화를 냈다. 그의 비대한 자아에서 오는 분노는 보통의 사람이라면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의 모독을 담고 있었다. 언제 터져 나올지 몰라 불안에 떠는 시간들. 쏟아지는 모독의 말들. 연오는 병 들어갔다.

 

 

가끔 윤명열이 자리를 비울 때도 연오는 그 사람의 존재를 느낄 수 있었다. (중략) 연오는 숨이 막혀 죽을 지경이었지만 윤팀장의 허락 없이는 죽을 수 도 없었다. 그 사람이 돌아올 때 까지 덜덜 떨며 무너져내리지 않도록 무언가를 꽉 붙잠고 있어야 했지만, 주변 세상은 아무일 없이 돌아갔다.

 

- 81p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오는 버틴다. '존버'라는 말이 하나의 단어가 된 시대다. 조금의 공백도 없는 무한 경쟁 사회, 버티지 못하는 사람은 낙오자가 된다. 연오도 이 사실을 알고 있다. 다른 사람들과 달라 보인다는 것은 이 세상에선 어떠한 오점이나 다름 없으니까. 연오는 스스로에게 묻는다.

 

 

다른 사람들은 잘 버티면서 무탈하게 지내는데, 나만 유난스럽게 윤팀장을 못 견디는 건가? 윤팀장이 아니어도 애초에 나는 이 정도 맷집밖에 안되는 약한 사람인 건가? 언제부터 내가 이렇게 한심해졌지?

 

- 79p

 

 

글쎄, 연오는 언제부터 그렇게 '한심'해진걸까?

 

 

 

가족

아프고 아픈 이름



연오는 완벽주의인 엄마와 방관자인 아빠 밑에서 평생 자신을 재단하며 살아왔다. 그들의 기준에 맞추기 위해 자기 자신을 잘라내고 꾸며내고… 연오는 자신의 모든 행동에서 엄마, 아빠와의 관계가 드러남을 알지 못했다.

 

 

생각해보면 엄마는 언제나 숨 막혔다. 이해받는다는 느낌, 내 존재가 이대로 괜찮다는 느낌을 받은 적이 없다. 나를 뜯어고쳐야 인정받을 수 있다고 느꼈다. 뜯어고쳐질 수 없는 나는 내가 싫다. 애초에 내가 고장난 채로 태어난 것 같기 때문에.

 

- 139p

 


가족은 절대적인 존재가 아닐 수 없다. 한 개인이 사회로 나아가기 전 가족은 유일한 세계이다. '가족'이라는 단어만 들어도 애틋해서 미치겠다는 표정을 지어야 하는 한국. 이곳에서 어여쁜 감정뿐만 아니라 그 반대의 것-추악하고, 더럽고, 아프고, 축축한-들의 근원도 가족이라는 사실을 말할 수 있을까. 무한한 애정에 함께 어쩔 수 없는 원망이 따라붙는다. 그 모든 것이 내가 선택하지 않은 나의 뿌리라는 사실, 결국 나는 뿌리와 단절될 수 없다는 무력감, 그 무력감에 마비가 된다.

 

연오는 자신의 모든 행동에서 엄마, 아빠와의 관계가 드러남을 알지 못했다. 연오의 자아는 부모에게서 일정 거리를 떠나지 못하는 위성처럼 공전한다(109p). 이토록 낮아진 연오의 자존감은 그의 인간관계에도 드러나기 마련이다.

 

 

 

남편 진호

기울어진 관계의 시소



 

정필은 둘 사이를 '매우 의존적인 관계'라 정의했다. 실제로 연오가 느끼는 둘 사이는 딱 그랬지만, 진호가 생각하는 둘 사이는 적당히 독립적인 관계였다.

 

- 28p

 


연오의 세계에서 진호는 아주 큰 영역을 차지한다. 일찍이 가족에게서 사랑을 기대할 수 없었던 연오는 그가 택한 그의 새로운 가족 진호에게 아주 크게 의지한다. 하지만 그토록 사랑하고 의지하는 진호에게도 연오는 자신의 모습을 솔직하게 보여주지 못한다. 가족에게 조차도 좋은 모습만 보여야 한다는 그의 오랜 강박을 버리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이해받지 못할 것, 그리고 버림받을 것이라는 두려움 때문에 연오는 자신의 증상을 진호에게 구체적으로 설명하지 못한다. 결국 홀로 남았을 때의 연오는 자주 무너지곤 했다. 


 

진호라는 한 가닥 고민이 점점 확장되어 온 세상을 잃을 아픔처럼 아려왔다. 이렇게 불안하고 초조한 기운에 한참 휩싸여 있다가도 또 한순간에 괜찮아지기도 했다.

 

- 27p

 

 

*


 

우울증은 병이다. 어떤 임계치를 넘어서면 혼자 힘으로는 기분 조절을 할 수 없는 병. 모든 일이 버거운데 특별히 그럴만한 이유가 없어서 뇌가 그 상태에 붙잡혀 빠져나오지 못하는 병. 무기력하고 기분이 제멋대로이며 죄책감과 불안감에 뒤덮여서 예전에 즐거웠던 일도 더 이상 즐겁지 않은 병. 의사 선생님은 우울증이란 기분이  불안정한 것 같아보이지만, 사실은 아주 안정된 상태라고 했다. 빠져나오기가 어렵다는 의미에서 굉장히 안정된 상태.


- 87p

 

 

연오는 여러 가지 면에서 아팠다. 아니 이 병은 여러 가지 면이라기보다 아주 단단히 꼬아진 하나의 줄이라고 표현하는 게 더 맞는 것 같다. 어떤 이유들도 그 스스로 존재하지 않았다. 단단히 얽혀버려 모두 다 거지 같아져 버렸다. 

 

 

칼로 고기든 뭐든 찍어내리며 화를 분출하다가. 칼이 자신을 찔러버리도록 내버려두고 싶기도 했다. 그러면 모든 게 무너져내려 산산조각이 나는 내 세계가 드디어 고요해질 것 같았다. 

- 92p

 

 

연오가 자신의 증상을 표현하는 문장들은 굉장히 사실적이라서 우울증을 앓았던 혹은 앓고 있는 사람에게는 위로가 될 수도 동시에 트리거가 될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내가 분명히 느꼈지만 구체적으로 표현하기 힘들었던 그 감정들이 언어가 되어 눈앞에 있으니 내가 느꼈던 것이 가짜가 아니었구나-라고 생각할 수 있다는 면에서는 큰 위로가 되었다. 남의 불행으로 위안을 삼는 것은 질색이지만 작가가 이토록 사실적으로 적어내려간 것은 같은 아픔을 겪는(겪었던) 사람들과의 공감을 형성하기 위해서 일 것이다. 하지만 잠시 잊었던(혹은 잊고 싶었던) 고통들이 텍스트가 불씨가 되어 다시 살아나는 기분도 느낄 수 있으니 그런 부분은 염두에 두고 읽어야 한다.


 

 

작은 행복의 불씨

도예와 북클럽



책을 읽다 보면 "대체 남연오가 괜찮아지기는 해?"라는 질문을 하게 된다.

 

다행히 연오는 조금씩 일어선다. 한 달간의 휴직을 신청한 후 연오는 자신이 좋아하는 것들로 시간을 채운다. 쉬려고 했는데 오히려 더 바빠지다니 자조하기도 했지만 온전히 자신이 좋아하는 일로 시간을 채우는 것은 주어진 일정을 소화하는 것과는 확연히 다르다.

 

 

원래 불씨를 살려내는 것은 이미 타닥타닥 타는 땔감이 아니라 풀무질로 새롭게 불어드는 바람이다. (중략) 행복은 새로운 불씨, 새로운 활동에서 타오를 수 있었고, 그게 바로 도예와 북클럽이었다.

- 199p

 


휴직 전에도 일주일에 한 번씩 수강하던 도예 수업을 일주일에 두 번으로 늘렸다. 흙은 연하고 부드러워 연오의 손길대로 그 형태를 바꾸었다. 물레를 돌릴 때는 연한 흙이 중심을 잡을 수 있도록 오래도록 매만져주어야 했다. 그러다 보면 흙이 중심을 잡기 시작하고 컵, 화분, 그리고 접시가 되었다. 자신이 손대는 것들은 모두 망한다는 생각과 오랜 패배주의를 겪은 연오에게 이런 눈에 보이는 결과물은 어떤 안정감과 만족감을 주기에 충분했다.

 

우연히 들른 책방 <주인공>에서 인연이 되어 시작하게 된 북클럽은 자욱한 안개 같던 연오의 마음에 작은 빛이 되어준다. 나를 알던 사람이 아닌 낯선 사람과의 만남이 편할 때가 있다. 연오는 그런 게 필요했다. 낯선 사람에게 외면당하는 일은 사랑하는 사람에게 버림받는 것보다야 훨씬 나은 일이었다. 큰 기대 없이 풀어낸 자신의 이야기에 따스한 반응을 돌려주는 사람들에게 연오는 적잖이 놀란다. 좋은 인연은 이렇게 예기치 않게 찾아온다. 그렇게 연오는 북클럽을 통해 타인과 더불어 자신에게 관심을 쏟을 수 있게 되었다.

 

 

연오는 이런 괜스러운 두근거림, 마음의 아른거림이 필요했다. 소박하지만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무언가가 더 있었으면 했다. (중략) 그러다 문득 깨달았다. 그동안 한없이 무기력하기만 했떤 내가 조금 변한 것일까. 하고 싶은 것을 찾고 열망할 만한 대상을 탐내다니.

 

- 201p

 


연오는 자신의 마음 속에서 조금씩 피어나는 '의지'라는 것을 발견했다. 그리고 책방 <주인공>을 이어받을 사람이 필요하다는 말에 그는 덥석 기회를 잡는다. 

 

부딪혀 깨진다고 해도, 생긴 모양 그대로 세상에 나와서 일단 한 가지만 해보면 왠지 그다음 한 가지도 해볼 수 있을 것 같았다(207p). 안정적인 직장으로의 복직을 1주일 남기고 연오는 책방 주인이 되었고 사업을 시작했다. 스스로조차도 인정해주지 않았던 연오는 그 자신만의 모양대로 책방을 꾸며가고, 아프지 않은 남연오를 꿈꿀 수 있게 되었다.



 

인생은 거지 같은 사건들로 채워졌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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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아팠던 시절이 지난 후에 그 시절을 돌보아주는 행위가 필요하다. 작가는 그 시절을 솔직한 언어들로 엮어냄으로써 자신 스스로와 같은 경험을 한 타인들에게 위로를 줄 수 있었다. 근거 없는 막연한 긍정의 말들보다 '거지 같은' 따위의 자조적인 말들이 더 큰 위로가 된다.

 

우울증은 완치가 되는 병이 아니다. 남연오에게 봄이 찾아왔다고 해서 한 평생 봄일거라고 장담할 수 없다. 연오는 앞으로도 계속 '도예'와 '북클럽'같은 작은 바람을 계속 불어 넣어주며 스스로를 돌봐야한다. 어쩌면 요즈음의 내가 집착적으로 기록을 남기는 것도 나를 돌보기 위한 일종의 방법일지 모른다. 인생은 거지같은 사건들로 채워졌지만 그 사건들 틈으로 작은 행복들을 채우는 것은 스스로의 몫일 것이다.

 

 



[이지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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