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기억이라는 끈으로 이어진 우리들의 연대기 [공연예술]

연극 <알리바이 연대기>
글 입력 2019.11.11 20: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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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연대기를 돌아보며


 

바쁜 일상을 살아가면서 시간의 흐름을 인지하기란 쉽지 않다. 주어진 일에 충실하다 보면 어느새 한 계절을 보내고, 한 해를 떠나보낼 뿐이다. 그런 우리가 시간의 흐름을 인식하는 유일한 순간은 지나온 삶을 돌아볼 때인 건 아닐까. 빛바랜 사진을 펼쳐 본다던가, 편지 봉투 위에 쌓인 먼지를 털어낸다던가, 어느 순간 친구의 기일이 돌아올 때면 그렇다. 이렇듯 잠시 멈춰서 돌아봐야만 “아, 시간이 흐르고 있긴 하구나”라며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문득 시간이 흘러 과거가 되어버린 나의 연대기를 떠올리게 되었다. 태어나서부터 어제까지를 나의 연대기로 본다면 순탄치 않은 역사를 목격하고, 통과하고, 경험했던 것은 분명했다. 방과 후 책가방을 메고 촛불 행렬에 합류했던 스무 살의 나, 침몰하는 배 속에서 서서히 눈을 감았던 내 친구, 그리고 고개를 푹 숙인 채 장례식에 다녀왔던 열여덟 살의 나를 깊숙한 기억 속에서 꺼내어 보았다. 


잊어서는 안 될 순간들이 시간 속으로 자꾸만 숨어들었다. 모든 중력은 기억을 망각의 늪으로 끌어당기곤 했다. 그래서 나는 기억을 현재로 자꾸만 불러냈다. 그럴 때면 ”그때의 사건들이 기억과 함께 지금 내가 있는 공간 속으로 오는 느낌을 받게 되었다.“ 잊지 않도록 몸과 마음에 각인함으로써 역사적 과오를 반복하지 않는 것만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닐까.

 

 

 

아버지의 연대기를 돌아보며



연극 <알리바이 연대기>는 2013년 초연 이후, 관객들의 뜨거운 성원에 힘입어 삼연까지 마친 작품이다. 연출가 김재엽은 자신의 아버지 故 김태용(1930-2004)을 중심으로 실제 가족사를 다룬 바 있다. 기억을 더듬어 아버지의 삶을 반추한 뒤 가족들의 증언과 역사적 사실을 더해가며 텍스트를 창작했고, 이러한 점이 다큐멘터리극의 성격을 갖도록 했다.


연극은 오래 전 신병 훈련소 앞에서 아들을 기다리던 아버지가 눈물을 훔치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극 중 재엽은 “이상하게도 그날 아버지의 눈물을 두고두고 잊을 수가 없었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그 눈물을 이해하기까지는 생각보다 오랜 시간이 걸렸다”라며 아버지를 이해하기 위해 그의 유년 시절부터 임종 직전까지의 삶을 무대 위에 그려냈다. 개인의 역사 속에 한국의 현대사가 맞물려 한 사람의 삶이 만들어지고, 역사가 쓰이는 광경을 관객들은 목격하게 된다. 

 

 

“너한테 할 얘기가 있다. 살면서 처음으로 하는 얘기다.”


 

2003년 12월 29일, 재엽은 아버지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비밀을 알게 된다. 그토록 감추고 싶었던 과거와 끊임없이 만들어진 알리바이 앞에서 재엽은 물론, 관객들까지 긴장하게 되었다. 한평생을 숨겨왔던 사실은 바로 ‘중간’의 삶을 살았다는 것이었다. 한국의 현대사를 통과했던 아버지는 의무와 책임을 요구하는 사회로부터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남들보다 앞서지도 뒤처지지도 않는 ‘중간’을 택했다는 것이다. 그것은 격동기를 산 소시민이 선택해야 했던 일상의 알리바이였다.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삶을 바치거나 남의 일이라는 듯 방관하는 것이 아닌, 그사이의 경계를 꿋꿋하게 지켜나갈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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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1930년 재일교포 2세로 일본에서 태어나 유년 시절 태평양전쟁을 겪었던 아버지는, 한국에 돌아온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한국전쟁을 맞닥뜨린다. 전쟁 상황 속에 어디에서도 마음 편히 지낼 수 없었던 아버지에게 유일한 위안이 되어준 건 다름 아닌 책, 그 중에서도 외국어로 된 책들이었다. 특히 영어는 각별한 의미를 지녔는데, 어릴 적 봤던 미국 잡지는 아버지로 하여금 지금, 여기가 아닌 다른 곳을 꿈꾸게 해주었다고 한다.


수많은 책 중에서 셰익스피어의 『햄릿』 속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로다“라는 대사를 알게 된다. 젊은 시절 아버지는 삶이 까마득하게 느껴질 때마다 이 대사를 떠올리곤 했다. 주문을 외우듯 반복해서 말이다. 삶 속에서 곱씹고 또 곱씹어서 사유를 확장했고, 그 사유의 흔적은 태용문고 책장에 고스란히 남아 아들 재엽의 것으로 변형되었다.


어쩌면 연극 <알리바이 연대기> 또한 각인이라는 행위의 연장선일지도 모른다. 파란만장했던 나와 형 그리고 아버지의 삶을 무대 위에서 재현하고 발화함으로써 자기 자신과 배우, 그리고 관객들의 몸과 마음에 각인하는 일종의 제의가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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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우리들의 연대기



그렇게 개인의 역사 속에서 불가분하게 흐르는 국가의 역사를 따라가다 보면 우리는 알 수 있다. 끊임없이 반복되고 있는, 크게 달라지지 않은 현실이라는 것을. 그러니 사느냐, 죽느냐를 고민했던 햄릿처럼 고민하는 것 자체가 해답이 될 수는 없지만, 적어도 고민하기 때문에 더 나은 길로 갈 수 있다는 ‘가능성’이 생기는 것이리라. 개개인이 현실 속에서 명쾌한 답을 내릴 수 없어도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반복되는 역사적 과오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거듭해서 고민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극장을 나서는 순간, 우리는 한국의 정치적 분열과 다른 성향의 진영에 띠는 배타성, 서로를 향한 혐오를 끊임없이 마주하겠지만 한 가지만 기억하는 건 어떨까. 나의 역사와 타인의 역사, 그리고 국가의 역사는 분리된 시간이 아니라 상호적으로 영향을 주고받는 하나라는 것을. 그리하여 지난 역사가 곧 현재이고, 현재가 곧 지난 역사라는 것을. 기억하고, 각인하고, 고민하고, 더 나아가 목소리를 내는 건 우리의 몫이라는 것을 말이다.

 

 

[고은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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