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당신의 집은 어디인가요 [영화]

영화 <소공녀>를 통해 보는 서울 디아스포라
글 입력 2019.11.05 17:59
댓글 0
  • 카카오 스토리로 보내기
  • 네이버 밴드로 보내기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구글 플러스로 보내기
  • 글 스크랩
  • 글 내용 글자 크게
  • 글 내용 글자 작게


 

남자와 여자가 어떤 집 안의 베란다에 앉아 함께 담배를 피우고 있다. 이야기하는 남자의 목소리는 울음으로 인해 떨리고, 이를 잠재우려는 듯이 입술은 담배를 문다. 두 사람이 발을 디디고 있는 이 집은 남자의 것이 되어가는 중이다. 아마 지금은 그들이 앉은 면적 정도의 소유권을 가지고 있을까. 집은 꽤 넓지만 둘은 무언가에 밀려난 듯이 무릎을 접은 채로 몸을 구겼다. 남자가 온전히 집을 소유하기 위해서는 20년 동안 돈을 내야 한다. 남자의 월급은 190만 원, 그중 집을 위해 내야 하는 돈은 매달 100만 원이다. 남자는 소매로 눈물을 닦은 뒤 침착해지고 또다시 흐느낀다. 옆에 있는 여자는 얼마 전 월세 인상을 통보받았고 그 길로 집을 나왔다. 그녀는 옆에서 말없이 바라보았다가, 담배를 쥐지 않은 한 손을 뻗어 그를 위로해준다.

 

 

 

디아스포라, 낯설지만 익숙한 단어


 

디아스포라(Diaspora)는 고대 그리스어로 ‘~너머(dia)’와 ‘씨를 뿌리다(spero)’가 합쳐져 이산(離散)을 뜻하는 단어이다. 이는 원래 유대인의 이산을 가리켰으나, 후에 고국을 떠나 타지에서 살아가는 사람(또는 민족 집단)을 뜻하는 단어로 그 의미가 확장되었다.

 

우선 이전에는 ‘도시 디아스포라’라는 단어가 없었으며 최근 새롭게 조합된 단어임을 유의해둘 필요가 있다. 두 단어의 합은 다소 생소할 수 있지만, 이것이 가리키는 바는 낯설지 않다. 본래의 ‘디아스포라’ 단어는 두 개 이상의 국가가 존재해야 성립되지만 이제 하나의 국가만을 다룬다는 것이 큰 차이점이다.

 

변화된 디아스포라는 한국 사회에서 정주할 집을 찾아 떠도는 ‘도시 난민’에게 집중한다. 한 나라 내에서 이루어지는 이주임에도 불구하고 다른 나라에 간 것처럼 방황하는 이들이 늘어난 세태를 반영하는 것이다. 특히 작년 디아스포라 영화제에서는 국내 청년층과 여성을 중심으로 12편의 한국 영화를 선정하였다. 그 대표작 영화 <소공녀>는 여성 청년의 서울 방황기를 통해 우리나라 이삼십 대들의 도시 디아스포라를 그린다.

 

 

movie_image.png


 

영화 속 디아스포라는 크게 두 갈래로 나눌 수 있다. 첫 번째는 주인공 미소(이솜)가 겪는 물리적 디아스포라이다. 이는 ‘디아스포라’라고 부르는 단어의 핵심이기도 한 건축적 공간의 문제가 주를 이룬다. 즉 안정적으로 장기간 머무를 장소 없이 떠돌아다니는 것이다. 영화에서 미소는 월세도 오르고 담뱃값도 올라 적자가 나게 되자, 그녀가 사랑하는 위스키와 담배를 지키기 위해 집을 정리하고 디아스포라 속으로 과감히 뛰어든다.

 

두 번째는 대용(이성욱)이 겪는 심리적 디아스포라이다. 주인공 미소의 대학 시절 함께 밴드부를 했던 그는 꽤 번듯한 아파트에서 살고 있다. 그러나 그 집에 함께 살기로 했던 아내는 신혼이 끝나기도 전에 이혼을 요구하며 떠나갔다.

 

 

미소: 너도 이 집 얼른 정리하고 이사 가면 되잖아...

 

대용: 못 벗어나. 누나...집이 아니라 감옥이야. 이 집 한 달 대출 이자가 얼만 줄 알아? 원금 합쳐 자그마치 100만 원이야. 내 월급이 백구십이거든. 이걸 얼마나 내야 되는 줄 알아? 20년이야. 매달 100만 원을 20년 동안 내야 이 집이 내 것이 돼. 그럼 이 집은 또 엄청 낡겠지?

 

 

 

껍데기만 남아버린 '즐거운 나의 집'


 

이는 단순한 영화적 설정이 아니다. 우리나라에서 월급을 받고 사는 이들의 평균 월급은 264만 원이며 중위소득 총가구 중 소득순으로 순위를 매긴 다음, 정확히 가운데를 차지한 가구의 소득은 월 191만 원이다. 그런데 2015년 수도권 대학가의 월세 평균이 42만 원으로, 중간쯤 되는 소득을 버는 사람도 대학가에서 월세로 집을 마련하기 위해서는 소득의 20퍼센트 이상을 내야 한다. 소득의 30퍼센트 이상이 주거비에 쓰이면 정상적으로 소비생활을 못 할 가능성이 큰데 이에 거의 근접하는 것이다.

 

소득 대비 임차료 비율(RIP)이 25~30퍼센트면 선진국에선 정책으로 개입해야 할 대상으로 간주한다. 더불어 1인 청년 가구 월 소득 대비 임대료 비율(RIR)을 보면 RIR 20 이상이 전체 56.9퍼센트에 해당하고 RIR 30 이상은 37.0퍼센트를 차지한다. 이는 월 100만 원을 번다고 했을 때 임대료로 20만 원 이상이며 RIR 수치가 높을수록 주거비 부담이 크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의 일상대화를 비롯하여 많은 창작물에서 ‘집’이라는 단어 안에는 어떤 상징적인 의미가 자리 잡고 있다. 그리고 그 의미는 주로 편안함, 휴식, 안정과 같은 긍정적 감정으로 연결된다. 즉 집은 인간에게 단순히 건축적 공간뿐만 아니라 심리적인 공간 역시 제공하는 것이다. 그러나 대용을 비롯하여 많은 청년에게는 오히려 무거운 짐이 되는 듯하다. 인간의 삶에서 중심을 차지하는 집은 내부의 의미는 사라지고 그 껍데기만이 남았다.

 

 

 

집을 버린 자의 여유


 

이런 현실에서 미소의 결정은 사소하지만 큰 파동을 일으킨다. ‘내 집 마련’이라는 목표를 이루기 위해 좋아하는 것과 하고 싶은 것을 미루는 세상에서 오늘의 위스키를 마시고 담배를 피우기 위해 집을 버리는 행동. 이로 인해 그녀는 물리적 디아스포라를 겪지만, 심리적으로 방황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영화 속 집을 소유한 인물보다 더 의연하며 여유 있다. 미소에게는 위스키와 담배, 남자친구 한솔(안재홍)이 곧 집과 같은 든든한 안식처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난 갈 데가 없는 게 아니라, 여행 중인 거야.”라고 말하며, 미소를 비난한 뒤 집을 마련하는 데 보태 쓰라는 정미(김재화)의 돈을 망설임 없이 거절하고 나온다.

 

영화의 마지막 5분에서 주인공 미소의 얼굴은 카메라에 선명하게 담기지 않는다. 지병으로 인해 뿌리 부분이 살짝 하얬던 머리가 이제 백발에 가까워진 것으로 시간이 꽤 흘러갔음이 유추될 뿐이다. 그러나 여전히 위스키를 마시고 담배를 피우며, 가사도우미 일을 하는 모습이 단편적으로 스쳐 지나간다. 그렇게 미소의 여행기는 서울 어딘가에서 끊겨버린다. 높게 솟아오른 아파트 건너 인적이 드문 강가에 있는 주황색 텐트 안에 있는 누군가의 모습이 그녀의 마지막 발자취이다. 카메라는 끝내 텐트 안을 보여주지 않고, 엔딩 크레딧이 올라온다.

 

그 때문에 영화가 해피엔딩인지 새드엔딩인지 결정하는 것은 관객의 몫이다. ‘남들 다 하고 사는 것들’을 위해 사우디아라비아로 간 미소의 남자친구 한솔이는 돌아오지 않았을 수도 있고, 삶에 대한 가치관이 달랐던 둘은 결국 헤어졌을 수도 있다. 그녀가 지은 얇은 집은 법에 저촉되어 심판을 받게 될지도 모른다. 어쩌면 너무 지쳐버린 나머지 자신이 지키려던 것들을 포기해버릴 수도 있다. 하지만 여전히 위스키를 마시고 담배를 피우는 짧은 씬을 통해 성공적인 여행을 하고 있다는 것으로 해피엔딩을 기대하게 만든다.

 

 

소공녀_NonDRM_[FHD] 0006086187ms.png

 

 

 

집이 없는 게 아니라, 여행 중인 거야


 

엔딩에서도 알 수 있듯이, 미소는 ‘집’ 그 자체를 거부하는 반체제적인 인물은 아니다. 오히려 그녀는 빚지지 않고 사는 것이 목표인, 소시민적인 사람이다. 그녀를 집 밖으로 몰아낸 것은 자신의 의지보다는 월세 5만 원을 올리겠다는 집주인의 말이었다. 이런 캐릭터가 주인공인 영화 <소공녀>가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집을 포기하고 좋아하는 것들을 지키라는 머나먼 이야기도 아니며, ‘각박한 상황이지만 당신은 젊으니 노력하고 꿈을 이루어라’라는 성공한 이들의 위로도 아니다.

 

그저 하루하루 일급을 받고 월세도 하루 단위로 나누어 계산하는 캐릭터가 디아스포라 속에서 내일이 아닌 오늘을 바라보며 사는 이야기를 보여준다. 이는 촘촘한 짜임새를 갖춘 미래를 요구하는 사회에서 무모하고 철없는 행동으로 보일 수 있다. 그러나 그 하루는 자신이 좋아하는 것, 자신의 신념이 담긴 행동으로 가득 차 있다. ‘남들 다 하고 사는 것’에 집착하지 않으며, 번듯한 회사에 다니는 친구와 자신을 비교하지 않는다. ‘지금 이대로도 좋다’는 미소의 언어에는 어떠한 거짓도, 기만적 자기 위로도 없다. 그래서 그녀의 디아스포라를 여행이라 말하는 것에 확신이 든다.

 

그래서 영화 <소공녀>는 어떤 형식으로든 방황을 겪고 있으며 그럴 예정인 관객에게 방황이 주는 부정적 관념을 다르게 바라볼 시점을 제시한다. 당신은 떠도는 것이 아니라, 여행하는 것이라고. 그리고 그 여행의 동반자로 미소를 소개하며, 영화는 관객의 마음에 새로운 집으로 남는다.

 

 

[안루비 에디터]



<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등록번호/등록일: 경기, 아52475 / 2020.02.10   |   창간일: 2013.11.20   |   E-Mail: artinsight@naver.com
발행인/편집인/청소년보호책임자: 박형주   |   최종편집: 2024.04.19
발행소 정보: 경기도 부천시 중동로 327 238동 / Tel: 0507-1304-8223
Copyright ⓒ 2013-2024 artinsight.co.kr All Rights Reserved
아트인사이트의 모든 콘텐츠(기사)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습니다. 무단 전제·복사·배포 등을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