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꽃남에서 어하루까지 [TV/드라마]

'꽃보다 남자'에서 나아가지 못한 '어쩌다 발견한 하루'
글 입력 2019.11.05 20: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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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시청률 32.9%를 기록하며 전국을 꽃남앓이로 만들었던 드라마 ‘꽃보다 남자’(이하 꽃남). 그 시절 꽃남을 안보면 대화에 끼지 못할 정도로 인기가 대단했다. 그로부터 10년이 지난 현재, 꽃남만큼은 아닐지라도 10대사이에서 인기를 끄는 드라마가 있다. 바로 ‘어쩌다 발견한 하루’(이하 어하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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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주인공 은단오는 어느 날 자신이 순정만화 ‘비밀’의 캐릭터란 것을 깨닫는다. 아픈 심장만 아니면 부족할 것 없는 은단오는 자신이 주인공이 아닌 일개 엑스트라라는 사실을 알고 격노한다. 게다가 살날이 얼마 남지 않은 시한부 설정까지 그를 절망시킨다. 그러던 중 눈앞에 남자주인공 하루가 나타난다. 그 또한 만화 ‘비밀’의 엑스트라이지만 은단오의 눈에는 어딘가 다르게 느껴진다.


만화 작가가 그려놓은 대로 행동해야 하는 ‘스테이지’와 어떤 행동을 해도 미래에 영향을 주지 않는 ‘쉐도우’ 속에서 등장인물 모두가 작가의 설정값대로 움직인다. 하지만 하루만이 스테이지에서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단 것을 알게 된 은단오는 자신에게 주어진 결말을 바꾸고자 한다.


'정해진 운명을 거슬러 미래를 바꾸려는 이들의 사랑 이야기.' 이 드라마의 복잡한 룰과 달리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단순하다. 자, 여기까지 본다면 어째서 꽃남과 어하루를 같은 선상에 놓은 것인지 의아할지 모른다. 전형적인 순정만화 스토리의 꽃남과 달리 어하루는 소재부터 분위기까지 달라 보이니까. 오히려 진부한 설정으로 가득한 순정만화 ‘비밀’을 통해 옛 드라마의 고루함을 유쾌하게 비꼬는 게 아닐까 싶다.


그러나 2009년에서 2019년. 그 10년간 바뀐 것은 없었다.

 



금잔디에서 은단오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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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남의 금잔디는 재벌 2세 구준표에 의해 황금마차를 타는 전형적인 신데렐라 여주인공이다. 씩씩하게 웃지만 결국 구준표로 인해 신분 상승하는, 반항 한 번 제대로 않던 수동적인 여자 캐릭터. 반면 어하루의 은단오는 시한부인 운명을 스스로 바꾸겠다 다짐하며 극의 초중반부를 발랄하게 이끈다. 금잔디보다는 주체적이고 매력적이다. 작가 뜻대로 움직이지 않겠다 노력하는 게 애잔하면서 귀엽다.


하지만 총 32부작 중 20부작까지 온 현재, 매력적인 은단오는 어디 갔을까. 스테이지를 바꿀 수 있는 건 오직 어쩌다 발견한, 하루뿐이다. 그를 발견하고부터 은단오는 일찌감치 그에게 제 운명의 키를 쥐어줬다. 그녀가 결말을 바꾸기 위해 노력한 결과 하루의 기억이 사라졌고, 하루를 잃을까 은단오는 아무것도 시도하지 못한 채 절망에 빠진다.

 

은단오의 굳센 희망은 어쩌다 찾아온 사랑 앞에서 사라졌다. 그간 보여준 은단오라는 캐릭터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좌절하지 않고 쉽게 순응하지 않는 것이다. 이름 모를 왕자 앞에서 물거품처럼 사라지는 인어공주가 아니라.

 

어떤 일에도 기죽지 않는 당찬 성품과 의지로 운명을 개척하겠다는 아이가 어느 순간부터 남자주인공만 찾아대며 눈물 흘린다. 언제부터 두 사람이 그리 절절한 관계였는지, 혼란스러움은 시청자의 몫이다. 브레이크 없이 가파른 감정선과 널뛰는 전개는 10대를 타깃으로 한 드라마라 할지라도 상당히 실망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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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경 - 그 자식이 했던 거 내가 하면 되잖아. 정해진 이야기 바꾸는 거 내가 도와주겠다고.

 

은단오 - 그건 하루만 할 수 있는 일이야.

 


갑작스레 하루를 잃은 은단오에게 서브남주 백경이 말한다. 네 운명을 바꾸는 것을 도와주겠노라. 하지만 은단오는 단칼에 거절한다. 아니 절망한다. 너는 하루가 아니니 내 운명을 바꿔줄 수 없다며. 이 대사 하나에도 어하루가 잘못된 길에 들어섰다는 걸 알 수 있다. 은단오의 캐릭터가 이렇게 의존적이었나.


금잔디에서 은단오까지 수많은 여성 캐릭터가 생겼다 사라졌다. 브라운관을 달군 여성들 사이로 은단오는 극 초반, 많은 지지와 사랑을 받았다. 주체적이고 당당하며 애달프기까지 한 여성 원톱 주연. 이 화려한 수식어가 너무 무거웠던 것일까. 시한부 판정을 받고도 울지 않던 캐릭터가 좋아하는 남자가 자신을 기억하지 못한다며 퍽 하면 울고 무너진다. 탄식이 나오는 순간이다. 눈만 뜨면 하루부터 찾는 은단오는 더 이상 매력이 없다. 혈혈단신으로 극을 이끌어온 여성 중심 서사는 순식간에 흔하디흔한 수동적 여성 캐릭터로 전락하고 만다.

 

금잔디와 은단오는 일반적인 서민과 재벌집 딸임이 다르지만, 남자주인공에 의해 운명이 바뀔 처지라는 것은 같다. 그리고 이 둘은 외로워도 슬퍼도 울지 않는다. 그들은 남자주인공에게 버림받을 때 운다.

 


 

F4에서 A3로


 

어하루가 꽃남에서 한보도 나아가지 못한 것은 비단 여자캐릭터의 문제만이 아니다. 고리타분한 설정은 극 중 순정만화 ‘비밀’의 주인공들도 마찬가지다. ‘비밀’의 여주인공 ‘여주다’는 A3의 서열 1위 ‘오남주’와 엮인다. 예상했겠지만 여주다는 가난한 서민이고 오남주는 재벌 2세다. 꽃남의 F4만큼이나 어하루의 A3는 여학생들의 흠모를 사는 인물들이다. 이 모든 것은 어하루 속에 ‘비밀’이라는 가상극이 있기에 가능한 설정이다. 일반적인 현실에서 F4니, A3니 하는 유치한 역할 놀이에 열광하는 여고생들은 그리 많지 않다.


여기서 어하루의 시청자는 기대한다. 그들은 꽃남의 F4를 보고 자랐고 이 설정이 환상일 뿐이란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이 지겨운 설정을 시원하게 깨부수길 바란다. 그러나 기대와는 반대로 ‘비밀’은 뻔한 길을 간다. 재벌 2세 남주와 가난한 여주의 고난과 역경 속으로. 돈으로 표방되는 신분 차이와 주변의 방해. 이 정도는 순정만화의 기본값이라는 넓은 이해심으로 드라마를 시청하는 이들에게 쐐기를 박는 설정이 이어진다. 바로 이들의 사랑을 방해하는 여학생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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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남의 금잔디는 밀가루 세례를 받았고 어하루의 여주다는 카레를 뒤집어썼다. 오남주를 흠모한 여학생들이 여주다를 질투해 그녀의 낡은 운동화를 질끈 밟는가 하면, 어김없이 남자주인공의 엄마가 등장해 돈으로 기죽인다. 괴롭힘은 더욱 심해져 사람 없는 교실에 여주다를 가두고 도망치기도 한다. 그런 여주다를 구해주는 것 또한 다른 남자 캐릭터다.

 

아직도 브라운관에서 여캐가 남주때문에 여주를 질투해 괴롭히는 설정을 봐야 한다니. 이 설정들은 여주다의 각성을 위한 장치일뿐 그 어디에도 비판 요소를 찾을 수 없다. 시대착오적인 설정을 비꼬는 드라마인 줄 알았더니 2019년판 꽃남이었다.

 

 

 

뒷전이 된 여성 캐릭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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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꽃남보다 더 퇴보한 구석이 있다. 바로 서브 남주 백경이다. 순정만화 속 은단오는 소꿉친구이자 정혼자 백경을 10년간 짝사랑했다. 하지만 그는 내내 은단오를 밀어내고 싫어하며 폭언을 멈추지 않았다.

 

이 모든 걸 관망하던 시청자는 훗날을 기약하며 미리 희열을 맛본다. 백경이 자아를 찾고 지난날 행동을 후회하는 것은 당연한 전개이기 때문이다. 흔히 ‘후회남주’라고 부르는 이 설정은 인기가 많은 클리셰기 때문에 방영 초부터 많은 시청자가 기대한 부분이었다.


그러나 모두가 예상하던 ‘후회남주’로의 루트는 제대로 엇나갔다. 백경은 자아를 찾고 폭력성이 더욱 짙어졌다. 제멋대로 여자주인공의 손목을 잡고, 소리를 지른다. 후회는커녕 뻔뻔해지기만 했다. 특히 최근 편의 백경은 분노를 자주 표출하는데, 연기하는 배우조차 캐릭터를 이해하지 못하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더 이상 드라마 '파스타'의 이선균이 먹히는 시대가 아니다. 소리를 지르고 손목을 잡아채는 것은 '까칠남'이 아니라 '폭력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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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의 설정도 극 전개를 이상하게 만든 원인이다. 기억을 잃기 전 하루는 주변을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은단오만 바라보는 신비롭고 맹목적인 조력자였다. 극 초반, 은단오에 이끌려 그 뒤를 지켜주고 도와주었지만, 그만이 스테이지를 바꿀 수 있다는 설정 때문에 그녀의 운명을 통째로 쥐었다. 완전한 주객전도다. 설상가상 기억까지 잃은 그는 서브남주 백경과 둘도 없는 친구가 되더니 기억을 찾고 다시 앙숙 상태로 돌아간다. 일관성 없는 모습에 초반의 매력은 찾기 힘들다. 그야말로 캐릭터 붕괴.

 

게다가 하루 vs 백경의 구도로 변한 전개에 드라마는 방향을 잃었다. 이게 은단오의 운명 바꾸기인지, 사내들의 자존심 대결인지. 두 장정의 싸움에 은단오는 무대에서 밀려나 이리저리 휩쓸린다. 분명 중심 서사는 은단오를 위주로 돌아가지만 어느 순간 남캐들의 매력 어필을 위한 존재처럼 느껴진다.

 

   

   

어하루의 아이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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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릭터 붕괴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은단오의 친구 새미는 감초 역할을 하며 귀여운 행동으로 극에 활력을 불어넣었다. 그런데 회차가 지날수록 여주다를 질투하고 괴롭히는 폭력을 행사한다. 그동안 쌓아온 새미의 성격을 단번에 무너뜨리는 설정이다.

 

이처럼 인물들의 성격이 자꾸 이랬다, 저랬다 하는 것은 작가가 '주인공' 여주다의 서사를 위해 '단역'을 이용했기 때문이다. 이게 어하루의 가장 아이러니한 부분이다. 극 중에서 은단오는 스테이지가 활성화될 때마다 여주다의 서사를 위해 이용되는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는데, 진짜 작가 또한 그렇게 행동하고 있다. 엑스트라도 제 삶에선 주인공이란 교훈이 어하루의 궁극적인 기획 의도라면 주인공의 계기를 위해 단역을 휘두르는 것이 옳을까.


원인은 작가와 감독의 역량 부족이다. 한참 전에 먹히던 구시대적 설정을 끌고 왔으면 한껏 조롱해도 모자랄 판에 되려 그 설정에 갇혀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다. 너무 이곳저곳 판을 벌린 탓에 수습은 가능한지 의문이다. 현재 벌어진 일들만 주워 담기에도 급박한데 회차는 점차 줄어들고 전개는 지지부진하다. 곳곳에 구멍이 난것 같은 생뚱맞은 편집은 개연성 없는 대본과 무관하지 않다. 작가, 감독이 놓은 덫에 스스로 걸려들어 작품을 시청자들에게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이제는 '설득'해야만 하는 지경이 되어버렸다.


그나마 아직 드라마가 끝나지 않은 게 위안이다. 부디 시청자가 납득할만한 전개로 '엑스트라라고 해도 각자의 이야기에서는 주인공'이라는 아름다운 교훈을 마무리하길 바란다. 그러기 위해서 끝을 향해 가는 지금, 어하루는 그 의도대로 가고 있는 걸까 고민해야 한다. 무조건 핑크빛 필터를 장착한다고, 잘생긴 남자 캐릭터들이 우르르 몰려나와 좋아한다 말한다고 여심을 사로잡는 시대는 지났다. 누구의 정혼자, 여자친구, 딸이 아닌 은단오 그 자체로 어엿한 주인공이 되기를 바란다.


 

[장재이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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