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한 달 일찍 끝난, 내 스무살 이야기 [사람]

글 입력 2019.10.17 06: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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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스무 살은 수많은 사람들이 영화나 소설, 노래에서 말한 것처럼 반짝이거나 아름답지 않았다. 그 전까지는 스무 살이 되면 교복 대신 입을 옷들에 대해서, 머리에 염색 할 수 있는 수많은 색에 대해서, 앞으로 만날 사람들에 대해서 고민하게 될 줄 알았다.

 

하지만 정작 스무 살이 되자마자 고민해야 했던 건 망해버린 수능 때문에 불확실해진 내 진로였다. 내 수능점수는 처참한 수준이었다. 그때까지 한 번도 고려해 본 적 없는 대학들이 담임선생님의 입에서 튀어나왔다. 그나마 내 성적으로 갈 수 있는 몇몇의 대학에 지원했고, 그중 하나에 합격해서 다니기 시작했지만 적응하기가 쉽지 않았다. 수업은 듣기가 싫었고, 수업이 끝나면 가야 할 학원이나 풀어야 할 문제집이 없다는 게 당황스러웠다.

 

과 사람들과의 술자리도 대학에 적응하는 데 도움을 주지는 못했다. 좁은 과방에 다닥다닥 붙어 앉아서 서로의 벌게진 얼굴을 바라보는 것도, 종류는 많지만 어쩐지 다 같은 맛이 나는 안주를 집어 먹으면서 쓴 소주를 마시는 것도, 자신의 주량을 잘 알지 못해서 금세 휘청대는 동기들을 부축하는 일까지 모두 어색했을 뿐이었다. 1학년 1학기를 그렇게, 재단이 잘못된 옷을 입고 있는 것처럼 덜그럭거리며 지냈다. 결국 1학기가 끝나갈 무렵, 엄마에게 반수를 하고 싶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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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중반, 내 생일이 끝나자마자 가까운 재수학원에 등록했다. 강북에서 가장 ‘빡세다’는 소리를 듣는 학원이었다. 아침 6시에 일어나서, 7시에 학원차를 타고 학원에 오면, 밤 10시까지 학원 안에서, 내 자리와 화장실 사이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하루에 햇빛을 보는 시간은 등원할 때와 밥을 먹고 이빨을 닦으러 옥상으로 올라가는 단 10분뿐이었다.

 

학원 내부는 지금까지 내가 지냈던 그 어떤 공간보다 더 이상했다. 교실은 좁은데 사람들은 많아서 늘 발꿈치를 들고 책상 사이를 지나다녀야 했다. 모두의 의자 밑에는 수능 교재가 한가득 쌓여 있는 바구니가 놓여 있었다. 교실 밖 복도에는 소위 명문대에 합격한 사람들의 출신 고등학교와 이름이 가득 붙어 있었다. 화장실 벽엔 누군가가 비명처럼 급박하게 적어놓은 욕설들이 가득했다.

 

그 공간을 지배하고 있던 가장 강력하고 단순한 규칙은 ‘좋은’ 대학에 가는 것, 하나뿐이었다. 그 규칙 때문에 우리의 행동은 제약을 받았다. 화장실에 가려면 눈치를 봐야 했고, 몸이 안 좋아서 학원에 늦게 간 날에는 성적이 떨어질 거라는 협박에 시달려야 했다. 학원 안에서 연애를 하면, 술을 마시는 게 적발이 되면, 주어진 시간 외에 핸드폰을 하면, 자주 학원을 빠지면 퇴원을 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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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 공간이 싫었다. 그 공간이 나를 바꾸어 놓는 것 같았다. 어느새 우리는 누군가가 우리를 제약하지 않아도 스스로 우리의 행동을 제약하고 있었다. 낮은 성적의 반에 속해 있는 아이들을 무시했고, 복도에서 어깨가 부딪히기만 해도 짜증을 냈다. 사소한 오해에 사과를 제대로 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여자 화장실에서 서로의 목을 조르는 일도 있었다.

 

아무와도 이야기를 나누고 싶지 않았다. 하루에 열 마디를 넘겨서 말하는 일이 드물어지기 시작했다. 그저 그 복잡하고 빽빽하게 놓인 책상 중 하나에 내 얼굴을 뚝 떨어트리고 다섯 개의 선택지 중에 하나를 고르는 일에 집중했다. 누군가는 흥청망청 20살을 보내는 것보다 재수할 때 더 얻는 게 많다고 하지만, 내게 그날들은 누군가 한입에 삼켜버린 것처럼, 푹 꺼져버린 지반처럼, 돌이켜 보면 깜깜하고 잔인한 날들이었다. 그렇게 두 개의 계절이 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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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능 전날의 학원은 그때까지의 학원과는 사뭇 달랐다. 교실 전체에 빽빽하게 들어차 있던 수능 교재들이 빠져나간 교실은 휑해 보였다. 수능 전날이라, 나오고 싶지 않은 사람은 학원에 나오지 않아도 된다고 해서 더더욱 교실은 비어 있었다. 앙상한 책상다리만 교실을 채우고 있었다. 미처 챙겨나가지 못한 공책이나 이면지들이 나뒹굴고 있었다.

 

나는 그렇게 휑한 교실에 앉아서, 내일이면 전부 다 끝이라는 생각을 했다. 내일이면 그렇게 답답하던 학원도, 수많았던 제약도, 불쑥불쑥 튀어나오던 무력감이나 분노도 전부 다 끝이라고. 살짝 열린 창문에서는 겨울바람이 들이치고 있었다. 그 전날까지만 해도 밖에서 나는 소리 때문에 굳게 닫혀있던 창문이었다. 답답하던 교실의 공기를 바꿔주는 시원한 겨울바람이었지만, 그날의 나는 어쩐지 그 바람이 마냥 춥게만 느껴졌다.

 

스무살이 끝나려면 한 달이나 남았을 때였고, 그 뒤로 내 인생에는 수능을 포함해서 많은 일이 일어났다. 하지만 그때, 그러니까 휑한 재수학원 교실의 한구석에 앉아서나는 내 스무 살은 시리도록 추운 겨울바람과 함께 한 달 일찍 떠났다는 걸 깨달았다.

 

 

[권묘정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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