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비행기, 피할 수 없다면 즐겨라 [사람]

소소한 행복이 모여 커다란 행복이 되니까
글 입력 2019.10.15 09: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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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의 시작은 짐 싸기라고들 하지만 내게 정말 여행이 시작되는 순간은 비행기를 탈 때부터다. 짐을 쌀 때는 챙기지 못한 것과 챙겨야 하는 것, 빼야 할 것과 빼면 안 되는 것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느라 머리도 몸도 피곤해 여행 간다는 실감이 나지 않는다. 수화물을 부치고 비행기에 타는 순간 설렘이 시작된다. 특히나 장거리 비행의 경우 긴 시간을 보내야 하기 때문에 비행기가 이동수단에서 그치지 않고 하나의 추억으로 자리 잡는다. 썩 유쾌한 추억으로 남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짧게는 7시간, 길게는 10시간 이상을 한 곳에 앉아서 가만히 있는 건 누구에게나 쉬운 일이 아니니까. 아무리 부착되어있는 작은 화면으로 영화를 보고 드라마를 보고 게임을 해도 지루할 수밖에 없는 시간이 존재한다. 하지만 피할 수 없다면 즐기라는 말이 있다. 장거리 비행을 그렇게 많이 하지는 않았으나, 짧은 경험 속에도 약 10시간의 지옥이 좋은 추억으로 바뀐 일이 꽤 있었다. 뻔하지만 행복한 기억이다.
 
 

돼지라도 배부르면 좋다


사육을 당하는 느낌이다. 비행기가 어느 정도 안정적인 기류에 오르면 승무원들은 카트를 끌고 와 음료를 권한다. 마시고 나서 좀 쉬다 보면 어느새 기내식을 나눠주는 시간이다. 잔뜩 부푼 포장 용기를 보면 어릴 때 학교에서 배운 기압 어쩌구가 떠오르다 사라진다. 그것만이 내가 하늘 위에 있다는 걸 증명한다.

보통은 소고기와 닭고기, 혹은 생선 중에 고르라고 한다. 비행기 내에선 가장 어려운 질문이다. 셋 다 조금씩 맛보고 싶은데 맛보기 스푼이 있을 리 만무하다. 결국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것 중에 하나를 고른다. 기내식에 나오는 어느 항공사나 빵은 비슷해 보이는데, 버터를 발라 먹으면 맛이 꽤 괜찮다. 메인 요리도 항상 나쁘지 않다. 사실대로 말하자면 나쁘지 않은 건 아닌데 비행기에서만 먹을 수 있다는 희귀성 때문인지 맛이 어떻든 좋아하는 편이다. 작은 판 위에 에피타이저, 샐러드, 메인, 디저트까지 알차게 담겨있다는 것도 좋다. 아무리 음식이 맛이 없어도 판에 놓인 것 중 하나는 입에 맞기 마련이다. 특히 당근, 아스파라거스 등을 삶은 것같은 야채는 어딘지 구색맞추기에 불과해 보이지만 그래도 괜히 먹게 된다. 아무 맛도 나지 않는다. 밍밍하다. 오히려 그래서 더 좋아하는지도 모르겠다.

밥을 먹고 나면 졸리다. 어차피 할 일도 그렇게 없어서 몸을 잘 뉘어 자다 보면 어디선가 맛있는 냄새가 풍기기 시작한다. 컵라면이다. 국물이 끝내주는 한국 컵라면인 경우도 있고 덜 맵고 무난한 일본 컵라면도 나왔었다. 컵라면은 전염이 빨리 된다. 자던 사람도 냄새에 눈을 떠 주문하고, 그러면 또 그 근처 사람이 일어나 주문을 한다. 모르긴 몰라도 승무원이 가장 정신없을 때는 누군가 처음으로 컵라면을 주문한 이후가 아닐까. 바쁘게 움직이는 승무원을 보노라면 괜히 미안해지면서 더 예의 바르게 행동해야겠다는 생각이 슬며시 든다.

라면은 항공사에 따라 제공하는 곳도 있고 아닌 곳도 있다고 한다. 기내에서 먹는 컵라면이나 집 앞 편의점에서 먹는 컵라면이나 특별한 맛은 없지만 이미 냄새에 자극된 식욕에 다른 때보다 더 맛있다.

이번에 모 항공사를 탔을 땐 컵라면을 먹고 조금 지나지 않아 간식이라며 삼각김밥과 피자 빵 중 택해 나눠주었다. 기내식을 먹고 컵라면을 먹어 배가 빵빵했는데도 피자를 준다면 원수도 용서할 나는 기어이 피자 빵을 먹었다. 두툼한 빵 위에 얇은 토마토소스를 발랐고, 소스와 치즈 사이에 맛은 존재하지 않는 작고 앙증맞은 야채가 섞인 바 모양 피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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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고 나면? 또 기내식이다. 항공사에 따라 다르긴 하겠지만 음료 카트가 두세 번 오가는 건 생략하고도 이렇게 많은 음식이 나온다. 기내식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라면 백 번을 먹든 한 번을 먹든 개의치 않겠지만 나의 경우는 달랐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는데, 지루함도 식후경인 듯하다. 다음에는 또 무슨 음식이 나올지 기대되어서 피곤함도 사라진다. 예전에 누군가 배고픈 소크라테스와 배부른 돼지 중에 배고픈 소크라테스가 되겠다고 말했는데, 비행기에서 이렇게 먹고 쉬고 먹고 자고를 반복하다 보면 배부른 돼지의 삶도 그렇게 나쁘진 않을 것만 같다. 이건 비밀인데, 공항에 도착했을 때 긴 여행을 떠난다는 부분보다 기내에서 먹을 음식이 가장 먼저 기대된다. 배보다 배꼽인 격이다.

창문을 열지 않으면 비행기를 탈 때와 버스나 기차를 탈 때의 느낌이 그리 다르지 않아서 하늘을 난다는 사실이 와닿지는 않는다. 기실 하늘 위에서 밥을 먹는 것과 지상에서 밥을 먹는 것의 차이도 그다지 크지 않다. 하지만 난 지금 구름과 몸을 나란히 하며 음식을 먹고 있다고 생각해보면, 괜히 신이 난다. 하늘에 떠서 술을 마시고, 컵라면을 먹는 행위가 오래  전에는 신만 가능했을 것이다. 그러니 지금 나는 신의 권리를 누리는 것과 마찬가지 아닌가.



손 끝만 스쳐도 인연이다

 

장거리일수록 옆 사람과 대화 할 일이 많아지는 것도 은근한 묘미 중 하나다. 보통은 끝까지 몇 마디 안 하겠지만, 앞에 부착되어있는 화면 사용기를 옆 사람에게 사용법을 물어보거나 알려주면서 한두 마디 건네는 게 은근하게 기억에 남는다.

2014년도였다. 여행을 마치고 한국으로 가는 비행기 옆자리에 중년 여성분이 앉으셨다. 한국분이셨는데, 어쩌다 보니 몇 마디 대화를 나누었다. 그분은 치과 의사였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딸이 있다고 하셨다. 자신의 딸도 여행하고 싶어하는데 아무래도 마음이 놓이지 않는다, 한국에 가면 딸에게 조언해주지 않겠느냐 물어보셨다. 먼저 간 사람이 도움을 주면 자신도 마음이 놓일 거 같다며. 나의 여행은 보통 즉흥적이고 운에 맡기는 경향이 있어 그리 좋은 도움이 될 거 같지 않았지만, 그러겠노라고 답했다. 10시간 동안 동행이 된 처지에 거절하는 건 예의가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그분은 명함을 건네주시며 밝게 웃으셨다. 딸과 친해지면 같이 해외여행을 가도 좋을 거라고 하셨다.

아쉽게도 한국에 가서 연락하지 않았다. 내 일로 바빴고, 당시에는 낯선 사람에게 먼저 연락하는 일이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종종 그때 연락을 했다면 어떤 인연이 만들어졌을지 떠올려본다. 어쩌면 한두 번 대화하다가 끊어졌을지도 모르고, 의외의 인연이 되어 평생 친하게 지낼지도 모르는 일이다. 어찌 되었건 나는 전화를 하지 않는 선택지를 골랐고, 불확실한 미래는 확실하게 사라졌다. 하지만 그때의 기억만큼은 좋게 남아있다. 혹시 당사자가 이 글을 보고 있다면, 우리는 운명이니 연락을 주셨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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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장에서는 정해진 좌석 외에 다른 자리에 앉는 게 허락되지 않고, 일행과 동떨어진 상대가 자리를 바꿔 달라고 제안을 하는 일도 잘 없지만 교통수단을 탈 때는 흔치 않게 있는 일이다. 지하철을 탈 때 자리가 내 양쪽으로 비어있고 일행처럼 보이는 두 명이 앉으려고 한다면 옆자리에 앉아 두 일행을 같이 앉을 수 있게 배려하는 일이 한국에서는 흔한 편이다. 놀랍게도 이런 배려는 비행기에서도 일어날 수 있다.

가족과 같이 여행을 갔는데, 온라인으로 좌석 예매를 늦게 해서 뿔뿔이 흩어지고 말았다. 어쩔 수 없이 떨어진 채로 자리에 앉았는데, 무슨 영문인지 양 옆자리도 일행과 떨어진 사람이었다. 그분들이 먼저 자리를 바꿔줄 수 있겠느냐고 물었고, 그게 일이 커져 세 팀이 게임을 하듯 이렇게 저렇게 일행을 찾아 자리를 바꿨다. 그 결과 적어도 부모님은 서로 나란히 앉게 되었다. 애니팡이 전국적으로 인기를 끌었을 때도 인간 애니팡 행사 같은 건 일어나지 않았다. 그때 우리는 비공식적으로 지구에서 가장 몸집이 커다란 애니팡을 한 사람이 되었다.

여러 이유로 지정석이 엄연히 존재하는 곳에서 자리를 바꾸는 행위가 권장되지는 않겠으나, 합의에 따라 낯선 사람과 갑자기 협동하고 단결해 짝을 맞춰 움직이던 일은 소소하게 유쾌했다.



발 밑의 우주


 

장거리 여행일수록 통로 쪽에 앉는 게 좋다는 사실은 누구나 알 것이다. 화장실 이용이 편리하고, 몸이 뒤틀리는 기분이 들 때는 잠깐 복도를 돌아다닐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좌석 지정이 되지 않는데 창가에 앉았거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창가에 대한 로망이 있다면 꼭 해야 할 일이 있다. 창가에 앉은 모두가 알 테니 굳이 말할 필요도 없지만 창밖을 보는 일이다.

낮의 하늘은 하늘색이다. 파랗고, 하늘 옆에, 태양 가까이에 내가 있다. 이카루스의 날개처럼 녹아내릴 일도 없이, 매우 안전하게. 구름은 수증기가 응집된 거니 구름 속으로 들어가도 큰 차이가 없을 거라 생각했던 것 착각이었다. 옅은 구름으로 들어가면 안개에 휩싸인 듯 하늘이 희뿌옇게 변하지만, 크고 짙은 구름으로 들어가면 온 세상이 하얗다. 그런데다 햇빛이 너무 강하면 눈이 부셔 창문을 닫을 수밖에 없다. 가끔 비행기가 움직이며 천하를 내려다볼 수 있는데, 이게 또 묘미다.

산이 많은 지역은 사방이 짙푸르고 능선이 뚜렷하게 보이기도 한다. 산의 윗부분에 만년설이 있는 것과 그 아래 울창한 숲이 한눈에 보인다. 도시를 가면 사회 교과서에서 위성에서 찍은 사진을 확대한 사진으로 나올 법한 회색의 땅덩어리가 보인다. 푸른 바다가 창문 전체를 채우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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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아름다운 순간은 야경이다. 도로 위 차는 줄줄이 선을 잇고 도시 중심가는 크고 작은 빛으로 반짝거린다. 밤, 모두가 잠들어 기내에 불빛이 거의 없고 창문 밖에도 짙은 어둠이 깔린 밤, 비행기가 목적지를 향해 가는 만큼 지상의 불빛이 뒤로 밀리는 밤, 잠결에 몽롱하게 창문 아래를 보노라면 꼭 우주처럼 느껴진다. 어떤 큰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조용하고 차분하다. 이 기분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먼 미래에 우주를 여행 간다고 해도 낯설지 않을 것 같다.

목적지 도착 시각이 밤이면 몸이 녹초가 된다. 정신도 몸도 피곤한데 비행기에 내려서 짐을 찾기까지 해야 할 일이 수두룩하다. 거기다 공항에서 나간 뒤에도 목적지를 향해 한참 움직여야 한다. 생전 처음 방문한 곳이라면 숙소로 가기 위해 교통편을 찾는 일도, 가는 일도 두 배나 더 복잡하다. 그런데도 밤 비행기를 싫어할 수가 없다. 우주에 누워있었으니까.



착륙, 그들만의 작은 축제



타인이 보기에는 단점일 수도 있다. 비행기 타는 일을 두려워하는 사람에겐 어쩌면 가장 힘든 시간일지도 모른다. 비행기가 착륙할 때 기류가 불안정하거나 바람이 세게 불면 기내도 흔들린다. 특히 지상으로 내려가는 동안은 큰 소리가 나고 몸도 붕 뜨는 느낌이 드는데, 그런 일련의 상황이 사람의 불안을 야기한다. 게다가 기체가 땅에 닿을 땐 바퀴를 사용해 천천히 이동 속도를 줄이는데, 이때 기내에는 커다란 소리가 나며 진동한다. 몸이 덜컥거리기도 하고, 앞으로 쏠리기도 한다. 안 그래도 내려가는 동안 소음이 크고 흔들리는데 땅에 닿는 순간에도 이러니 비행기가 멈추고 안내 방송이 들리면 비로소 아, 살았구나 싶어진다.

기체가 작을수록 이런 소리는 크게 들리기 때문인지, 이런 상황은 장거리 이동을 위해 비행기를 탔을 때보다 저렴한 항공사의 비행기를 타고 2, 3시간 짧게 이동할 때 더 자주 느꼈다. 고등학교 수학여행을 갔을 때는 기류가 불안정해 두어 번 비행기가 아래로 내려갔다 다시 올라가 상황을 살피는 일을 지속하였다. 내려갈 때마다 소소하게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고, 마침내 착륙할 때에는 급하게 앞으로 쏠리는 느낌에 모든 학생이 소리질렀다.

이럴 때 비행기는 롤러코스터 못지않은 짜릿함을 주는데 유일한 단점이라면 불안감은 롤러코스터를 탈 때보다 몇 배 이상 증가한다는 부분이다. 롤러코스터는 위험한 상황을 조작한 것이고, 아무리 안전하다 해도 비행기는 조작되지 않은 상황이 위험하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런지 몇 번 단거리 비행기가 착륙에 성공했을 때 여기저기서 박수가 터진 적 있다. 비행기 안에 있던 모두가 함성을 지르고 손뼉을 치면 오늘도 살았구나, 하는 생각이 들면서 웃음이 난다. 모두 은근한 불안에 시달리다 곧 비행기에서 해방될 거라는 기쁨을 만끽하는 순간은 꼭 작은 축제가 벌어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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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나 그렇지만 사소한 기쁨은 삶을 즐겁게 한다. 일상을 벗어났다는 즐거움에 이런 사소한 기쁨까지 더해지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해진다. 이런 행복은 향수 같은 것이라 은은하고 오래 지속한다. 굉장히 은은한 나머지 고기 굽는 냄새처럼 강렬한 10시간의 비행이 진행되는 동안은 딱히 맡을 수가 없을 수도 있다. 하지만 손목에 코를 대고 있는 힘껏 숨을 들이마시면 은근한 향이 나듯 가까이에서 즐거운 일을 찾기 위해 둘러본다면 은은한 행복이 다시 곁으로 찾아온다. 짧거나 긴 여행에도, 여행을 하러 가기 위한 비행기 안에도, 여행을 가기 전이나 다녀온 후의 일상에도, 힘든 날과 기쁜 날에도 변치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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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원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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