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음악을 글로, 글을 음악으로 - 위화 "문학의 선율, 음악의 서술"

음악을 글로 쓰는 것은 어렵다?
글 입력 2019.10.02 1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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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을 글로 서술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음악에 관한 글을 쓰면 쓸수록 더욱더 그렇게 느낀다. 그렇다면 소리로 전달되는 음악을 글로 쓸 때 과연 무엇을 담아야 할까. 곡의 형식, 작곡가나 연주자에 대한 정보, 작품이 탄생하고 연주되는 사회적 맥락, 소리 그 자체. 이중 무엇을 선택하든 음악의 모든 것을 담은 글이란 불가능하다. 결국 음악은 듣는 것이고 글은 읽는 것이기 때문이다. 음악과 글의 이러한 본질적인 차이는 음악에 관한 글을 쓸 때마다 나를 괴롭히고 있다. 그래서 나는 항상 이런 질문을 갖고 있다.



"음악에 관해 공허하지 않으면서 공감할 수 있는 글을 쓰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작가 위화의 <문학의 선율, 음악의 서술> 출간 소식을 접했을 때 이 질문에 조금이라도 답을 얻었으면 했다. 그리고 책을 읽고 난 지금, 나는 분명히 무언가를 얻었다.


문학의 선율 음악의 서술 띠지 표1.jpg
 


1. 문학의 선율

<문학의 선율, 음악의 서술> 초반은 주로 문학에 관한 내용이다. 윌리엄 포크너, 보르헤스, 안톤 체호프, 카프카, 불가코프, 도스토예프스키, 헤밍웨이 등 걸출한 작가의 작품에 대한 내용은 위화가 갖고 있는 문학적 깊이를 여지없이 보여준다. 특히 하나의 작품에서 다른 작품으로 꼬리를 물고 나아가는 그의 서술은 아직 읽지 않은 책도 마치 읽어본 것처럼 느껴지게 한다.

그중 인상 깊었던 장은 바로 불가고프의 <거장과 마르가리타>에 관한 부분이었다. 이 장은 스탈린에게 보내는 불가코프의 편지로 시작한다. 출판이 금지되고 생계를 위해 스탈린에게 모스크바 예술극장의 조감독 직책을 부탁하는 불가코프의 편지를 두고 위화는 이렇게 말한다.


"작품을 금지당한 대가, 불가코프는 자긍심과 생계 사이에서 고민을 거듭하다가 결국 두 가지 모두를 선택한다. 그의 '부탁'을 보면 어디에도 구걸의 기미가 없다. 무대 관리직을 부탁할 때조차 오만하게 조치만 해주면 된다고 말한다". - 위화, <문학의 선율, 음악의 서술> 168-169쪽



그리고 시작되는 이야기는 바로 불가코프가 생애 마지막 12년 동안 저술한 <거장과 마르가리타>이다. 이 작품의 '거장'은 불가코프 자신을 대변하는 허구의 존재이며, 거장과 사랑하는 '마르가리타'는 결국 불가코프 자신을 위해 창작한 존재이다. 현실에서 작가로서 생계를 박탈당한 불가코프는 마지막 12년 동안 <거장과 마르가리타>라는 허구의 세계에서 자기 자신을 위한 온전한 글을 쓴다. 따라서 위화는 불가코프의 생애에는 출간되지 못하지만 오늘날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는 <거장과 마르가리타>를 두고 "모든 독자에게 속한 듯 보이지만, 사실을 불가코프에게만 속한다."라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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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의 작가 미하일 불가코프 (1891-1940)



2. 음악의 서술

<문학의 서술, 음악의 서술>에서 위화는 모차르트, 베토벤, 멘델스존, 베를리오즈, 브람스, 바그너, 차이콥스키, 쇼스타코비치 등 수많은 작곡가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중 작가 위화의 음악적 통찰이 가장 돋보였던 장은 바로 마지막에 나오는 "다시 읽는 차이콥스키"이다. 잡지 <애악>과의 인터뷰로 이루어진 이 장은 유일하게 대화체로 이루어져 그만큼 음악에 대한 위화의 목소리를 직접 들을 수 있다.

그렇다면 왜 다른 작곡가도 아닌 차이콥스키일까. 그리고 위화는 왜 차이콥스키의 음악을 읽는 것도 듣는 것도 아닌, 다시 읽는다고 했을까? 그가 차이콥스키의 음악을 다시 읽어야 한다고 말한 배경에는 차이콥스키에 대한 당시(1994년)의 평가가 있다. 위화는 차이콥스키 음악에 대한 중국 내의 평가가 두 가지 극단으로 나뉜다고 말한다. 하나는 차이콥스키의 음악을 음악문화의 근간으로 여기는 50세 이상 중국 지식인층이고, 다른 하나는 문화혁명 이후 고전음악을 접하기 시작 음악 애호가들이 차이콥스키의 음악을 '경음악'이라고 부르며 낮은 위치에 놓는 경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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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의 작곡가 표트르 일리치 차이코프스키(1840-1893)


그러나 위화에게 차이콥스키의 음악을 그저 '경음악'이 아니다. 그는 차이콥스키를 '지옥에 떨어진 죄인'이라고 표현한다. 차이콥스키가 지옥에 떨어진 이유는 세상에 대해 너무나도 아는 것이 많았기 때문이다. 또한 그는 자기 자신도 너무 잘 알고 있었다. 그런 점에서 위화의 눈에 차이콥스키는 러시아의 작가 도스토예프스키와 가깝다. 19세기 러시아를 산 두 사람은 작품 속에서 개인과 사회의 절망을 고스란히 드러낸다. 따라서 음악과 문학으로 영역은 달랐지만 그들의 작품에는 자기 자신과 사회가 분열하는 소리가 가득한 것이다. 특히 차이콥스키 음악에 대한 위화의 설명 중 가장 인상 깊은 구절은 아래 부분이었다.


"차이콥스키의 음악에서 우리는 갑작스러운 부조화를 자주 접합니다. 아름다운 선율이 이어지다가 갑자기 유리가 산산이 깨지는 듯하지요. (중략) 사실 차이콥스키의 음악 속 부조화는 자아와 현실 간의 긴장관계를 드러냅니다. 그와 현실 사이의 대치, 그 개인의 생명 속 이 부분과 저 부분 간의 대치를 남김없이 드러냅니다. 차이콥스키는 내면의 비틀림, 혹은 내적 분열을 가진 작곡가였습니다." - <문학의 선율, 음악의 서술>, 382



차이콥스키의 음악에서 보이는 갑작스러운 부조화는 그의 가장 유명한 작품인 <교향곡 6번 '비창'>에서 들을 수 있다. 아름다운 선율이 한창 이어지다가 갑자기 돌변하는 <비창> 1악장은 이 부조화를 잘 보여준다. 마치 마지막 악장처럼 끝난 3악장 이후 이어지는 4악장 역시 마찬가지이다. 이렇듯 위화는 섬세하고도 아름다우며, 동시에 삶의 비극을 담고 있는 차이콥스키의 음악을 다시 읽기를 권하고 있다.


차이코프스키 <교향곡 6번> '비창' 1악장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카라얀 지휘



3. 문학의 선율, 음악의 서술

<문학의 선율, 음악의 서술>에서 문학과 음악의 만남이 가장 돋보이는 부분은 쇼스타코비치의 <교향곡 7번>너새니얼 호손의 <주홍 글자>를 교차시킨 장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 도중 완성된 쇼스타코비치의 <교향곡 7번>은 20세기 교향곡 중 아마도 가장 극적인 사연을 갖고 있을 것이다. 쇼스타코비치는 이 곡을 자신의 고향이자 당시 독일군에게 포위된 도시 레닌그라드(현 상트페테르부르크)에 헌정한다. 독일군에 의한 레닌그라드 봉쇄는 1941년 가을부터 2년 넘게 이어져 엄청난 수의 시민들이 추위와 배고픔으로 사망했다. 쇼스타코비치의 <교향곡 7번>은 바로 이 봉쇄된 레닌그라드에 유일하게 남은 오케스트라가 포위가 한창인 1942년 8월 9일 레닌그라드에서 공연한 바 있다.

이러한 사연 때문에 쇼스타코비치의 곡은, 특히 <교향곡 7번>은 음악 자체보다는 사회적 맥락에만 귀를 기울일 위험이 있다. 쇼스타코비치 본인 역시 솔로몬 볼코프가 엮은 회고록 <증언>에서 이 점을 안타까워했다. 그러나 위화는 쇼스타코비치의 작품이 처한 사회적 맥락에서 나아가 그의 음악에 분명히 귀를 기울인다.

위화는 쇼스타코비치 <교향곡 7번> 1악장의 침략자 주제에 주목한다. 무려 175차례 반복되는 북소리는 점점 크게, 즉 크레셴도의 방식으로 곧장 나아간다. 작은북에 현악, 목관, 금관이 하나 둘 더해지자 선율은 엄청난 힘을 갖고, 클라이맥스가 다가온다. 그리고 바로 이 클라이맥스에서 등장하는 것은 가장 크고 위압적인 음악이 아닌, 짧은 서정이다. 지독한 먹구름 속 한줄기 햇빛은 '가벼움'이 '무거움'보다 더 강력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쇼스타코비치 <교향곡 7번> '레닌그라드' 1악장
시카고 심포니 오케스트라, 레너드 번스타인 지휘


이는 너새니얼 호손의 <주홍 글자>의 서술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남편도 없이 임신해 가슴에 주홍색 글자 A를 달게 된 주인공의 고된 여정을 보여주는 <주홍 글자>는 마치 쇼스타코비치 <교향곡 7번> 1악장의 침략자 주제가 그랬듯이 크레셴도의 방식으로 점점 더 고통을 더해간다. 그리고 그 정점에 오른 순간 펼쳐지는 것은 짧고도 간절한 차분함이었다.

*

<문학의 선율, 음악의 서술>에서 위화는 마치 문학작품을 음악처럼, 음악을 문학작품처럼 다루었다. 위화의 글에서 문학과 글이 갖고 있는 읽기와 듣기라는 본질적인 차이는 거의 느껴지지 않는다. 이것은 아마 위화가 음악을 글처럼 하나의 서술 작품으로 접근했기 때문일 것이다. 덕분에 위화와 글에서는 문학과 음악이 마치 한 몸처럼 느껴졌다. 그가 머리말에서 언급한 눈이 하나, 날개가 하나라서 혼자 날 수 없는 새 만만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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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해경>에 나오는 만만
 


책의 머리말에서 위화는 텍스트와 독서 행위가 둘이 함께 하기 전에는 공허한 만만이라고 비유했다. 그러나 <문학의 선율, 음악의 서술>을 읽고 난 뒤 글과 음악의 관계 역시 어쩌면 만만에 가깝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따라서 '음악을 글로 서술하는 것은 어렵다.'는 나의 생각은 뒤집어서 '음악과 글은 만만처럼 함께 해야 날아오를 수 있다.'로 바꾸어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동안 음악을 글로 표현하려고 한 많은 작가들의 노력과, 수많은 문학 작품을 음악으로 표현하고자 했던 작곡가들의 노력 역시 이해가 된다. 그들은 이미 오래전부터 음악과 글이 함께 할 때 얼마나 빛날 수 있는지 알아보았던 것이다. 위화의 <문학의 선율, 음악의 서술>은 문학작품과 음악 속 서술을 따로, 그리고 같이 보여주며 음악과 글의 관계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할 수 있게 해주었다.


[홍진주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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