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시대역행 [사람]

단기완성이 성행하는 시대 속, 하루 일곱 장
글 입력 2019.09.17 07: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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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초, 휴학을 다짐하고 제일 먼저 생각한 것은 외국어를 배워야겠다는 것이었다. 10년도 넘게 의미 없이 배우고 있는 영어 말고 다른 언어를 하나쯤 할 수 있다면 멋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멋모르고 교양수업을 들었다가 성조에서 피를 본 중국어는 제치고 일본어를 배우기로 했다. 어릴 때 심심찮게 본 애니메이션의 내공이 있으니 아주 어렵지는 않을 것만 같았다.


인터넷 강의와 학원을 알아보았다. 좋은 문제집을 사서 독학을 할까 잠시 고민도 했다. 여러 방법 중 내가 선택한 것은 학습지였다. 나의 의지를 냉정하게 평가한 결과였다. 지금은 외국어를 배우고 싶어 하지만 초반의 열정은 금방 식으리라는 것을 알았다. 열정이 식으면 남은 건 끈기와 의지뿐이다. 인터넷 강의는 내가 보지 않으면 그만이고 학원은 도중에 내용이 힘들어지면 안 갈 것 같았다. 독학은 말할 필요도 없었다. 선생님이 우리 집으로 몸소 오신다는데 적어도 학습지라면 풀지 않을까 하는 판단하에 내린 결정이었다.


일주일에 한 번 선생님이 집에 오신다. 학습지의 본문을 함께 읽고 새로운 개념을 익힌다. 10분 정도의 짧은 수업이 끝나면 학습지만 우리 집에 남는다. 선생님이 다시 오시기까지 학습지와 나의 일주일이 시작된다.


일주일에 4주 분량의 학습지를 풀고 있다. 1주 분량이 열 장이니까 나는 일주일에 마흔 장을 풀고 있는 것이다. 초반에는 익숙지 않은 히라가나와 가타카나를 외우며 1주 치 씩의 분량을 풀었다. 문제를 떼니 학습지를 푸는 속도가 빨라졌다. 분량을 조금씩 늘리다가 선생님과 상의 끝에 일주일에 4주 치를 푸는 것으로 정했다.


그렇게 몇 달 일본어를 공부하다 5월 중순쯤 욕심이 조금 생겼다. 이왕 하는 공부라면 나의 실력을 공인받는 게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었다. 그리고 일본어 능력 시험을 보기로 마음먹었다. 검색해보니 N4와 N5 단계는 너무 쉽다는 의견이 많아, 패기만만하게 N3 급수로 시험을 접수했다. 접수 확인 문자를 받고, 나는 풀고 있는 학습지의 진도가 마음에 걸렸다.


히라가나, 가타카나를 배우는 AA 단계서 시작해 A, B, C 단계를 걸쳐 D 단계를 배우고 있을 때였다. 밟아온 단계로만 치면 엄청 많이 배운 것 같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단계는 높아 보이지만 기껏해야 동사의 종류를 배우고 있었다. 시험과 관련된 문제집을 찾아보았고 이 책 한 권만 다 풀면 합격! 이라고 호언장담하는 두꺼운 문제집을 한 권 샀다.


그리고 주객이 전도되어 문제집을 주로 풀면서 남는 시간 틈틈이 학습지를 풀었다. 문제집으로는 고급 단어를 외우고 학습지로는 동사의 과거형을 배우고 있는, 지금 생각해보면 코웃음이 나오는 상황이었다. 이틀에 한번 꼴로 시험에 대해 검색하다 관련된 수많은 인터넷 강의 광고를 봤다.



단기완성 만점 목표, 한방 합격!

오늘 마감! 완벽 커리큘럼!



자극적이긴 하지만 솔깃한 문구들이었다. 인강까지 들으면 합격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새록새록 들었다. 합격 수기와 카페를 뒤지며 며칠 동안 고민했다. 친구들에게도 물어봤다. 친구들도 나와 비슷한 생각이었다. 어차피 보는 시험이면 붙어야지! 가격도 나쁘지 않네! 나는 친구들에게 온 답장을 보며 헤벌쭉하게 웃었다. 그래, 이왕 시험 보는 거 붙어야지. 그리고 곧장 출석체크와 시험 합격만 하면 수강료를 환급해준다는 강의를 결제했다.


지난 7월 7일, 시험을 봤다. 시험장에서 문제를 풀며 여태껏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는 푸르뎅뎅한 기분이 들었다. 푸는 내내 나의 부족한 실력이 너무 절실하게 느껴졌다. 물론 거기엔 내가 공부를 꼼꼼하게 하지 않은 탓이 가장 컸다. 쉬운 급수의 공부를 소홀히 했다. 기본 개념조차 충분히 쌓이지 않은 상태로 나에게 과분한 급수의 공부를 했으니 이대로 시험에 불합격해도 할 말이 없을 정도였다.


8월 말 불합격 결과를 받고도 별 느낌이 들지 않았다. 처음부터 다시 해야지라는 생각만 머리속에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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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5와 N5의 급수는 너무 쉬워서

합격을 해도 알아주지 않는다.

N3 급수 정도는 따야 한다.

한 달 정도 공부하면 누구나 합격할 수 있다."



시험에 대한 정보를 알아보며 가장 많이 본 문장들이다. 분명 스펙으로써 누군가에게 인정받거나, 나의 어학능력을 수치로 매기고자 공부를 시작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제 와 지나간 두 달간의 수험생활을 뒤돌아 보니, 본래의 목적은 온데간데없었다.


이 정도는 해야 한다길래, 그런 급수는 있어도 필요가 없다길래, 남들 하는 말에 휩쓸려 이상한 공부를 한 나는 어중이떠중이 그 이상도 아니었다.


최근 친구와 영어 공부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영어 공부를 안 한지 오래 돼서 다 까먹었다는 내용으로 시작한 대화의 주제는 자연스럽게 토익으로 흘러갔고, 다음 달에 토익학원 같이 다닐래? 로 끝이 났다. 친구와 토익학원을 알아보면서 다시 비슷한 문구들을 볼 수 있었다.



목표 점수 4주 달성!

2달 만에 토익 900점대 정복, 초단기 완성!

단 30일 만에 필요한 토익 고득점 접수!



몇 달 전 이와 비슷한 문구에 혹하던 나의 모습이 떠올랐다. 요즘같이 취업을 위해 외국어 자격증 한두 개 따는 건 예삿일도 아닌 시대에, 나 같이 단순한 이유로 외국어를 공부하는 건 너무 낭만적일 수도 있다. 하지만 10년도 넘게 배운 영어도 매번 찰나의 순간을 모면하기 위해 be 동사가 어쩌고, 시제 변화가 어쩌고를 다시 공부한다. 그게 지겨워서 일본어를 공부한 것이었는데 결국 또 똑같은 결과가 나왔다. 나는 헛공부를 했고 다시 시작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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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비쿼터스’라는 단어가 이미 진부할 정도로 우리는 배우고자 하는 의지만 있으면 다양한 매체를 통해 공부할 수 있다. 하지만 반대로 이를 활용하기 힘든 세상이기도 하다. 학생들의 기초학력이 떨어지고 있다는 기사가 연일 올라오고 문맹률은 제로에 가깝지만 글을 읽고 이해하는 문해력 역시 낮다는 평가 결과가 나오고 있다. 이러한 사실들이 모순으로 느껴지듯 자기소개서에 쓰일 한 줄을 위해 합격하면 모두 잊힐 공부도 현재 시대와 상반된다고 생각한다.


공부는 학문이나 기술을 배우고 익힌다는 뜻이고, 학문은 어떤 분야를 체계적으로 배워서 익힌다는 의미이다. 우리는 ‘공부’를 하고 있는 것일까? 이제는 본래 의미로 다시 돌아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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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은 F 단계를 공부 중이다. I 단계까지는 가야 문법이 모두 끝난다고 하는데 올해 안에 문법을 끝낼 수 있을지 잘 모르겠다. 느린 진도만큼 반복되는 부분이 많은데 확실히 머릿속에 각인되는 느낌이 든다. 가끔 그런 생각을 한다. 내가 만약에 시험에 합격했다면 내가 아직도 공부를 하고 있을까? 자격증을 받았으니 일본어 공부 끝! 을 외치지 않았을까 싶다. 그 점에서는 오히려 내가 시험에 떨어진 게 천만다행이라는 생각을 한다.


매일 출근을 하면 자리에 앉아 학습지를 편다. 일곱 장을 풀어내면 비로소 나의 하루가 시작된다. 오늘도 일곱 장을 풀었다. 아마 나는 내일도 일곱 장을 풀 것이다. 매일 그랬듯이.





[김혜정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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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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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미술하는스누피
    • 재밌는 글이네요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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