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조금은 낯선, '진짜' 모던걸 이야기 - 연극 '모던걸 타임즈'

그 시절 여성들도 일을 했답니다
글 입력 2019.09.11 2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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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은 낯선 이름이었던 삼일로 창고극장. 을지로에 위치해 있다 하여 오랜만에 을지로 3가역에서 내렸다. 을지로 3가역은 3호선 환승을 할 때나 내리던 곳이어서 개찰구 밖 풍경은 꽤 낯설었다. 하지만 역 밖으로 나오는 순간, 아, 여기 버스로 많이 지나다녔지, 싶어 순식간에 눈앞이 친숙해졌다.

버스에 올라 창밖으로 흘러가는 풍경으로 마주할 때와, 길거리를 두 발로 직접 걸으며 건물 생김새 하나하나를 눈에 바를 때와는 꽤나 느낌이 달랐다. 버스 타고 다닐 땐 몰랐는데 이 건물이 이 회사 건물이었구나, 을지로 3가역을 지날 때 유독 지하철이 미어터지는 이유가 여기에 있었구나, 하는 생각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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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사실 삼일로 창고극장은 명동역과 조금 더 가까이 위치해 있었다. 간판들이 일본어와 중국어로 점철되기 전, 부모님과 함께 명동을 자주 들렀던 기억이 났다. 명동 성당은 오랜만에 봐도 위엄이 여전했고, 명동의 시그니처가 된 음식들은 다시 먹어도 정말 맛있었다.

이런 추억, 이런 회상. 서울의 중심이 된지 꽤 오랜 시간이 흘러 이제는 곳곳에 세월의 흔적이 묻은 도심. 연극 ‘모던걸 타임즈’를 더욱 특별하게 만드는 요소이지 않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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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동 풍경


약 100년 전, 우리나라에 불어 닥친 변화의 폭풍은 어마어마했다. 한복 대신 양복을 입고, 고봉밥 대신 커피와 빵을 먹고, 집안에서 바느질을 하던 여성들이 사회로 나가 자본을 벌어들이는 세상이 열렸다. 모던의 탄생이었다.

모던보이, 모던걸로 묘사되는 1920, 30년대 인물을 떠올려보자. 그들의 외양은 어떠한가. 대부분 서양식 머리 스타일과 복장을 갖추고 조금은 도도한 표정을 지은 채 경성 거리를 활보하고 있을 테다. 그렇다면 그들의 내면은 어떠한가. 쉽사리 말하기 어렵다. 어쩌면 우리는 신여성과 모던걸의 그늘 아래 그들의 진짜 이야기를 외면하고 있었던 게 아닌가.

연극 ‘모던걸 타임즈’는 지금껏 매체를 통해 재현되어 온 모던걸의 이미지를 해체한다. 1%의 부유한 명문가 출신 엘리트 여성 혹은 남성 지식인의 연애 상대로 묘사되었던 모던걸을 넘어, 그 시대를 직접 겪었던 실제 여성들의 이야기를 사실적으로 담는다. ‘역사를 통과하는 여성의 몸과 말’이라는 수식어답게 이 극은 놀랍도록 세세한 고증으로 그 시대 여성들의 삶을 묘사한다.

연극 ‘모던걸 타임즈’는 국사편찬위원회에서 제공한 구술자료와 인터뷰를 통해 얻은 신여성의 전문직 노동 이야기를 탐구한다. 이를 통해 미용사, 양재사, 그리고 타이피스트까지, 1930년대를 이끌어 간 여성 노동자의 삶이 사실적으로 드러난다.

고데기가 없었던 1930년대에는 어떻게 머리에 컬을 넣었을까, SNS가 없던 그 시대에는 어디서부터 유행이 번지고 퍼졌을까, 그리고 인터넷이 없던 30년대에는 메일을 어떻게 주고받았을까. 흥미로운 소재다. 그리고 이 모든 질문 가운데에는 여성 노동자들이 자리해 있다는 것도 놀라운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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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 중 등장하는 화신백화점


연극 ‘모던걸 타임즈’는 극 속 인물이자 실존 인물인 임형선, 이종수, 양충자 세 여성인물의 이야기로 이루어진다. 종로에서 제일가는 미용사로 성장하기도, 유학 제안을 받을 만큼 실력 있는 양재사로 이름을 떨치기도 하고, 일본인으로 가득 찬 회사에서 당당히 실력을 뽐낼 수 있는 타이피스트로 일하기도 한다. 사회의 중심이었던 남성들을 실력으로 제쳐버린 여성 인물들의 삶, 놀랍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사회가 호락호락하지만은 않았다. 시국이 좋지 않다는 이유만으로 여성들의 외모 치장을 금지하는 혐오 사회였기에, 이들 역시 고난을 피할 수 없었다. 결혼으로 인한 경력단절은 100년 묵은 문제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사회가 여성들에게 조금이라도 관대했더라면 역사는 다시 쓰이지 않았을까.

좋았던 점은 여성 인물들의 고난을 비극적 요소로 소비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여성혐오 앞에 무릎 꿇고 눈물 흘리는 캐릭터는 없다. 대신 ‘내가 사람들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고민하는 캐릭터가 있다. 후학 양성을 위해 학원을 짓거나 학교를 설립하는 등의 연대도 보인다.

이 극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건 실제 인터뷰 영상이었다. 극이 끝난 후 스크린에 제작진들이 직접 인터뷰 한 극 속 인물들이 등장한다. 이 시대를 살고 있는 여성들에게 ‘끝까지 포기하지 말고 밀어붙이라’고 말해주고 싶다던 대답이 머릿속에 남았다. 그 시대를 살았던 진짜 여성들, 진짜 사람들의 이야기라는 것이 피부로 와 닿아 잊을 수 없는 극이 된 것 같다.

*

극장을 나와서 명동 거리를 걸었다. 화려하게 빛나는 간판들 사이로 영어, 일본어, 중국어, 프랑스어 등 수많은 국적의 언어들이 허공을 떠다녔다. 명동 거리를 빠져나오자 이제는 하늘까지 닿을 만큼 뻗어 있는 고층 건물들이 눈에 들어왔다. 을지로 3가역으로 향하는 짧은 순간에 서울역이 어딘지 아느냐는 질문을 세 번 들었다.

100년 전 이 거리에서 수많은 여성들이 머리를 다듬고 옷을 만들었을 생각을 하니 기분이 묘해졌다. 야근을 마치고 피곤한 얼굴로 퇴근하는 여성들 이전에 이종수와 임형선, 양충자가 존재했겠지. 그리고 100년 후 이 자리에는 또 다른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여성들이 있겠지. 연극 ‘모던걸 타임즈’가 그려낸 여성 노동자의 삶이 낯설면서도 친숙했던 이유였다.


시놉시스

일하는 여성을 통해 본 모던타임즈, 
역사를 통과하는 여성의 몸과 말
 
경성 제일의 미용사, 임형선
부산 패션계의 큰손 양재사, 이종수
카네보 상사의 유일한 조선인 타이피스트, 양충자
 
일제강점기부터 해방 이후를 살아간
보통 여성들의
일상적인 노동이야기


공연 정보

공연일시 | 2019.08.30 - 09.08 / 평일 20시, 주말 15시, 월요일 쉼
공연장소 | 삼일로창고극장
출연진 | 김별, 신윤지, 이은조
구술 | 양충자, 이종수, 임형선
구술 편집 | 김미선
구성•연출 | 강보름
조연출 | 조규혜
움직임디자인 | 고권금
음향디자인 | 조연하
조명디자인 | 윤지영
조향디자인 | 곽혜은
영상디자인 | 이가윤, 이화승
의상•소품디자인 | 이윤진
텍스트 드라마투르기 | 권미란
무대감독 | 박한서
PD•그래픽디자인 | 김은정
멘토 | 신재

제작 | 프로젝트 레디메이드
후원 | 서울문화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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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지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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