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무의미의 ‘의미’를 찾아서: 현대미술 ‘알못’의 감상 도전기 [시각예술]

글 입력 2019.08.27 1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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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모든 문화예술 분야를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유독 어렵게 느껴지는 예술장르는 꼭 하나쯤 있기 마련일 것이다. 나에게 있어서는 특히 미술이 그런 장르였다. 학창시절 모든 예능영역의 수업을 좋아하고 점수도 잘 나왔지만, 미술만은 도무지 점수가 잘 나오지 않았다. 그리는 데 영 소질이 없었던 탓이다. 잘 그리지 못하니, 자연히 미술작품을 감상하는 것에도 흥미가 줄어들게 되었다.


그러나 고등학교 때 우연히 읽게 된 미술사에 대한 서적은 나를 다시 미술의 세계 앞으로 인도해 주었다. 아무것도 모르고 작품을 감상하는 것과, 작가와 시대를 이해하고 난 후에 감상하는 것은 완전히 다른 느낌을 주었기 때문이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처럼, 그때부터 미술 작품을 감상하기 전에는 반드시 작가의 생애와 추구한 사상에 대해 나름의 조사를 했고 그렇게 미술과 친해지기 위해 노력해왔다.


하지만 아직까지도 어려운 미술이 있다. 바로 ‘현대미술’이다. ‘20세기 후반의 미술’을 일컫는 개념인 현대미술은 아직까지 나에게 ‘미지의 영역’ 그 자체였다. 그 방식과 화법이 제각기 달랐다고 할지라도 사물이나 사람을 보이는 대로 담아낸 이전 시대의 작품들과 달리, 현대미술 작품들은 사물의 형태가 아예 없거나 극도로 추상적인 작품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아무리 작가의 생애와 작품세계에 대한 설명을 들어도 난해하기는 매한가지였다. 그림의 ‘의미’를 읽어내려고 애썼던 나에게 현대미술은 넘어서기 힘든 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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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이번 여름, 나는 기필코 현대미술과 조금 더 가까워지겠다는 일념을 가지고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 열리고 있는 <박서보: 지칠 줄 모르는 수행자> 전시에 다녀왔다.


먼저 간략히 작가에 대해서 소개하자면, 박서보 화백은 1950년대 이후부터 한국 현대 추상 미술을 발전시키는 데 선구적인 역할을 하며 국내 미술계의 변화를 최전선에서 이끈 작가이다. 특히 추상미술에 대한 개념이 거의 전무하던 50년대에 국내 최초의 앵포르멜(구체적인 형태를 부정하고 선, 기호, 색채 등에 집중하는 회화운동) 작품을 선보이며 한국미술사에 한 획을 그었다고 한다.


이 전시에서는 지금까지 70여 년 간 계속되어온 박 화백의 작품들을 시대 흐름에 따라 각각 ‘원형질 시기’, ‘유전질 시기’, ‘초기 묘법 시기’, ‘중기 묘법 시기’, ‘후기 묘법 시기’의 5가지 파트로 나누어 소개하고 있다. 흥미로웠던 것은, 나처럼 현대미술을 잘 알지 못하는 사람이라도 한눈에 느낄 수 있을 만큼 각 시기마다 화법이 확연하게 달라졌다는 것이었다.


마치 시기별로 각각 다른 사람이 작업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색다른 스타일을 추구해온 흔적이 느껴져서, 특히 첫 섹션인 원형질 시기를 지나 유전질 시기의 작품으로 넘어갈 때 처음으로 현대미술에 대한 궁금증과, 관심이 생기는 좋은 느낌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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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형질 시기의 그림이 대체로 어두운 색과 거친 느낌으로 가득하다면, 유전질 시기의 그림은 입체적인 조형과 밝고 강렬한 색채로 가득해 극명한 대비를 이루었다. 제작 기법 또한 차이가 도드라졌다. 원형질 시기의 작품은 화면을 칼로 깎거나 가죽을 불로 태우는 등의 방법을 사용한 반면, 유전질 시기의 작품은 스프레이를 분사하는 방법을 사용했다.


다음 시기인 초기 묘법 시기로 넘어가면 작품의 스타일은 또 한 번 혁신에 가까운 변화를 맞는다. 캔버스 위에 유백색을 칠하고, 그 위에 연필로 화면 가득히 선을 반복해서 그어간 것이다. 이후 중기와 후기 묘법 시기가 되면 화법은 다시 변화해, 한지를 문지르거나 긁어 화면을 가득 채우는 방식이 된다.


사실 처음 전시장에 들어가서부터 작품의 3분의 1을 감상했을 때까지, 나는 역시 ‘현대미술 알못’답게 도대체 전시가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전시장 초입부터 자세히 적혀 있던 작가의 생애와 작품세계에 대한 설명을 꼼꼼하게 읽어도 소용이 없었다. 각각의 작품이 가진 의미를 찾는 데에만 매달렸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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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전시장 한쪽에 서서 핸드폰으로 잠시 작가의 정보를 더 검색해 보던 중 발견한 박 화백의 말을 보고나서, 지금까지의 내 감상 방법이 크게 잘못된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그것은 “자신의 액션을 통한 자기표현의 미학을 이해함으로써 회화를 해석해야 한다”는 말이었다. 다시 말해서, 작가가 ‘무엇을’ 그리려고 하는지 집중하기보다 ‘어떻게’ 그렸는지를 이해해서 현대미술을 해석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나는 그제야 각 시기별로 작가가 계속해서 화법의 변화를 추구해온 이유를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는 그림을 통해 꼭 어떤 특정한 것을 표현하려고 했던 것이 아니라, 미술이라는 언어를 통해 자신은 ‘이런 방식으로’ 말을 한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은 것 같았다. 그런 생각이 들자 그동안 내 머릿속에 가득했던 ‘현대 미술은 왜 그림을 이렇게 그리지?’라는 의문을 마침내 풀 수 있을 것 같았다.


음악에서도 힙합과 클래식을 이해하는 초점이 서로 다르다는 것을 모든 사람이 알고 있듯이, 현대미술도 당연히 다른 장르와 다른 초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이해하면 되는 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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곧 나는 전시장의 첫 부분으로 되돌아갔다. 그리고 처음부터 전시를 다시 감상하기 시작했다. 굳이 한 작품, 한 작품의 의미를 찾으려고 하지 않았다. 작품이 무의미하다고 느끼면 그 느낌을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작품들 하나하나가 모여 있는 이 공간이 나에게 ‘어떻게’ 말을 건네고 있는지에 대해서 집중했다.


그러자 조금씩 작품의 의미에 대해서 집착하지 않게 되었다. 어둡고 거친 원형질 시기의 작품에서는 불안함을, 유전질 시기의 기하학적이고 밝은 작품에서는 신비로움을, 묘법 시기의 작품에서는 차분함과 고요함을 느끼며 그 모든 감정들을 포용했다. 이윽고 전시장을 빠져나왔을 때, 분명 나는 전시장을 처음 들어섰을 때의 나와 다른 모습이었다.


이렇게 나의 현대미술 전시 감상 도전기는 꽤 만족스럽게 끝이 났다. 영원히 친해지지 않을 것만 같았던 현대미술에 한발짝 더 가까워진 만큼, 나는 앞으로도 한동안 현대미술 전시를 꾸준히 찾아다니며 더 친해져 볼 생각이다. 혹시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도 나와 같은 ‘현대미술 알못’ 중 한 사람이라면, 망설이지 말고 당장 전시장으로 가 현대미술 작품과 직접 부딪혀보라고 말해주고 싶다.


단번에 작품을 꿰뚫어보고 싶다는 욕심 대신, 한번도 가본 적 없는 대륙에 가서 처음 여행을 시작하듯이 먼저 마음을 열길 바란다. 무의미하다면 무의미한대로, 알 수 없다면 알 수 없는 대로. ‘언제나 예술에 정답이란 없다.’고 말했던 누군가의 말이 빈말이 아님을 실감하게 되는 순간이 당신에게도 올 것을, 나는 조심스럽게 확신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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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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