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어쨌든 다 할 건데요 – 모든 것이 되는 법 [도서]

포기한 게 아니라 이것도 저것도 하다가 마침내 모든 것이 되는 게 목표입니다
글 입력 2019.08.25 2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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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아노 학원, 미술 학원, 태권도장, 플루트 학원, 줄넘기 학원, 수영 교실… 나열한 것은 내가 어린 시절 삼 개월에 한 번씩 철새처럼 옮겨 다녔던 학원들이다. 보습학원, 영어학원, 과외 따위는 너무 당연한 기본 옵션이어서 언급하지 않았다. 내가 유치원부터 시작해 대학교까지 이어지는 유구한 등교 거부의 역사를 간직한 몸이라는 걸 누구보다 잘 아는 우리 엄마는 십여 년 전까지만 해도 ‘남들처럼’ 딸아이에게 이것 저것 시켜보고 싶은 욕심을 채 버리지 못한 ‘남들’ 같은 젊은 엄마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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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가 어떤 성향을 가지고 있는지에 관계 없이 딸이면 미술 학원, 아들이면 태권도장 따위의 사교육 현장으로 보내지는 것은 내 또래 초등학생들에게 아주 자연스러운 일과였다. 정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는 노란 봉고차가 신발 주머니를 꼬리처럼 휘두르는 꼬마들을 아파트 상가 어딘가에 위치한 학원으로 실어 나르는 지극히 익숙한 풍경. 이 그림의 일부가 되어본 적 없는 90년대생은 아마 흔치 않을 것이다.

나는 이런 열풍에 휩쓸려 많은 것들을 배웠다. 새로운 걸 배우기 좋아하는 성정이 사교육 광풍과 꽤 잘 맞아 떨어져서 학원도 즐겁게 다녔다. 그러나 엄마의 기대와 달리 나는 삼 개월 이상 흥미를 지속하는 법이 없었고, 빠른 속도로 다른 분야에 관심을 옮겨가곤 했다. 엄마는 나의 철새 기질을 못 견뎌 매번 ‘다신 학원 보내 달란 소리 하지 마!’ 하고 으름장을 놓았지만 그래도 내가 새로 배우고 싶은 것이 생기면 못 이기는 척 들어주었다. 물론 이렇게 새로 배운 것들 역시 유효기간 삼 개월을 넘기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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떡잎부터 남다른 철새로 유년을 보낸 나는 서서히 시간이 지나면서 애매한 재능을 여러 개 간직한 채 갈팡질팡하는 청소년이 되어 선생님의 안타까움을 자아냈다가 현재는 욕심은 많은데 방향은 모호해 습관적으로 불안해하는 대학생으로 성장했다. 이 과정에서 내가 얻은 결론은 노력도 재능이며 나는 아무 것도 꾸준히 하지 못하는 사람이라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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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행복하기 위해서 여러 분야를 넘나들어야만 하는 사람이라면, 과연 제 구실을 하는 사람이 될 수 있을까? 이런 생각들을 하고 나니, 나는 본질적으로 무언가를 완수하거나 끝낼 수 없는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걱정이 들었다. 내게 문제가 있는 것이 분명했다.


에밀리 와프닉, 「모든 것이 되는 법」 p.17


나의 불안감이 성장기를 거치며 점점 커졌던 이유는 어느 순간 ‘꿈’이 ‘진로’라는 이름으로 교묘하게 모습을 바꾸고 다가와 나에게 일관성과 전공적합성을 보여줄 것을 요구했기 때문이다. 고등학교에 진학하면서 이런 것과 저런 것을 아무 연관도 없이 동시에 좋아하는 것은 위험했다.

이 년 뒤에 대학교 면접 보러 가서 이거 왜 했냐고 물어보면 뭐라고 대답할래? 이것도 좋고 저것도 좋으면 저기 가지, 왜 굳이 여기에 지원했냐고 물어보면, 우리 학교가 이 길만 보고 달려온 아이들을 두고 왜 자기 확신도 없는 너 같은 애를 뽑냐고 다그치면 그 땐 어떻게 할건데? 너, 어중이떠중이처럼 깔짝대기만 한 것 말고 확실히 잘하는 게 하나라도 있어?

열일곱의 내가 무수히 쏟아지는 질문 중에서 단 한 가지라도 제대로 대답할 수 있을 리 만무했다. 몇 가지를 동시에 좋아하면서도 생활기록부가 학생부 종합 전형을 쓰기에 적절하지 않다는 이유로 한 가지만 두고 전부 포기했다. 나는 수없이 많은 것들을 사랑했고 시작하는 걸 두려워하지 않았는데, 이제는 전부 다 내 길이 아닌 것만 같았다. 어디서도 환영 받지 못하는 존재가 된 기분에 단 한 발짝도 앞으로 나아갈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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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은 당신에게 목표나 목적이 부족한 것이 아니라는 데 있다. 당신의 운명적 일이 무엇이든, 다능인 기질을 억누르는 동안에는 목표에 다다를 수 없다. 반드시 그 기질을 받아들이고 사용해야만 한다.


에밀리 와프닉, 「모든 것이 되는 법」 p31



책 「모든 것이 되는 법」의 저자 에밀리 와프닉은 다양한 분야를 옮겨 다니며 끊임 없이 새로운 정체성을 시도하는 경향을 가진 사람들을 멀티포텐셜라이트(multipotentialite), 다능인으로 명명했다. 에밀리 와프닉에 따르면 목표에 도달하는 길이 반드시 일직선이어야만 하는 것은 아니며, 다능인이 시도하는 다양한 분야는 일견 무작위적이고 혼란스러워 보일 수 있으나 사실은 실용적인 방향으로 서로 시너지 효과를 낼 수 있다고 주장한다.

개인적으로 가장 위로가 되었던 것은 바로 나의 자기 혐오의 근원이었던 모순에 대해 ‘모순되는 점과 놀라운 점을 모두 소유하고 있는 것이 다능인의 장점’이라고 설명한 부분이다. 그녀는 오로지 즐거움만을 위해 무언가를 하거나 수익만을 위해 무언가를 하는 것이 전혀 수치스러운 것이 아님을 강조한다.

그동안 나는 스스로에게 유희만을 위해 투자하는 비용을 두고 ‘낭비’라고 일축하면서도, 오직 돈을 위해 들이는 시간과 에너지에 대해서는 ‘무의미한 소모’이라고 비난하곤 했다. ‘단 하나의 천직’이 존재하고 그 천직을 위한 스펙과 커리어를 쌓기에도 시간이 부족하다는 강박에서 비롯한 습관적인 채찍질이다.


그러나 에밀리 와프닉은 이런 압박에 사로잡혀 있는 나에게 삶을 지탱할 정도의 돈이 있다면 우리가 추구하는 활동 중 어떤 것이 수익을 창출하더라도 상관 없으며 나의 성향에 아무런 문제도 없다고 토닥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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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 스스로에게 당신이 되고 싶어하는 모든 것이 되도록 허락한다면 당신의 인생은 어떤 모습이 될 것인가? 당신의 풍부한 열정을 이끌어낸다면 어떤 것을 창조하고 어떤 문제를 풀 수 있을까? 나는 우리가 진심으로 답을 얻을 수 있기를 바란다.


에밀리 와프닉, 「모든 것이 되는 법」 p231



지금 이 자리에서 용기를 내어 (특히 부모님께) 고백하는데, 나는 내가 좋아하는 수많은 일을 모두 포기하지 않고 어떤 식으로든 계속해나가고 싶은 욕심이 있다. 미래의 내가 한 직업에 정착할 수도, 변덕에 못 이겨 여기 저기에 손을 뻗칠 수도 있지만 뭐가 됐든 도전을 두려워하지 않는 내 장점을 잃어버리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며 살아갈 것이다.


지나치게 황급하고 흐지부지한 자기계발서 같은 결론이라 조금 부끄럽지만, 태어나서 처음으로 마음에 드는 자기계발서를 읽었으니 오늘 한 번만 눈 딱 감고 열정맨이 되어 본다.



[이현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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