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절박한 사람만이 청춘인 건 아니잖아요 [도서]

글 입력 2019.08.25 19: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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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퀴즈쇼>의 주인공은 결여돼 있다. 부모는 부재하고 평생 동거했던 할머니가 죽는다. 그나마 쥐고 있던 재산마저 압류당할 위기가 닥친다. 그는 결여된 인간이고 마침내는 고립되려 한다. 결핍에 시달리며 소멸할지도 모르는 상황에 절규하거나 발버둥 치지 않는다. 절박한 심정으로 살길을 도모하지도 않는다. 그는 그냥 인터넷 채팅창에서 퀴즈만 푼다.


충격의 여파 때문인 건 아닌 듯하다. 소설은 의외로 경쾌한 템포로 흘러가고 그는 괜찮다는 듯이 마냥 퀴즈를 푼다. 그는 낙천적이다. 혹은 어리석은 이다.


가만 보면, 그는 낙천적인 걸 넘어서 찌질하고 한심한 인물이다. 그는 평생을 안온한 일상에서 살았다. 스스로가 고백하듯이 정체성을 규명하려는 시도 같은 건 해본 적 없다. 부모의 부재를 잊을 만큼 할머니는 그에게 안전하고 따뜻한 울타리를 둘러주었다. 그는 여유로운 환경에서 자랐다. 여유는 모든 의문을 누락시킨다. 서 있는 자리가 안전하고 따뜻하면 그만이다. 여유로운 환경에서 자란 그는 의문을 품을 필요가 없다. 이전부터 해왔던 것처럼 자신의 자리에서 적응해나가면 된다.


낙천적인 그는 자멸을 자초하는 인간이 된다. 생존이 위협받는 판국에도 요행을 찾으니 말이다. 현실의 퀴즈쇼에서 우승하면 그 상금으로 빚을 갚을 수도 있을 거라 생각하는 한심한 인간이 그다. 창문 없는 고시원에 들어갈 형편인데 생존을 도모하지 않는 건 이해하기 어렵다. 고시원 월세에 보탬이라도 되는 편의점 알바를 짜증 난다고 때려 친다.


우리는 생존수단의 모색을 위해 치열하게 분투하는 중이다. 대학과 경력조차 미래를 보장해주지 못하는 형국임에도 거기에 기를 쓰며 덤벼드는 건 불안해서다. 누구나 가지고 있기에, 그래서 쟁취하려는 거다. 열 너머로 전진할 수도, 이탈할 수도 없다. 기성세대는 이 분투를 종종 도전 의식의 부재, 패기의 결여 따위의 단어들로 치환한다. 고작 공무원이나 대기업 같은 안전한 경로를 걷기 위해 그렇게 혈안이냐고 힐난한다. 적어도 그것들은 생존을 보장해준다. 도전은, 생존이 보장될 때나 의미를 곱씹어볼 수 있는 단어다. 우리는 아프다. 이 분투의 고통을 알아주는 이가 없으니 아프다고 말하는 것조차 아프다.


그리하여 당연히, 그는 지금의 청춘을 대변하는 인물이 될 수 없다. 어떻게 그가 지금의 청춘이겠는가. 그는 분투하지 않는다. 그는 생존하려 애쓰지 않는다. 그는 낙천적이고, 낙천적인 걸 넘어서 한심한 인물이다. 우리는 치열하다. 생존 때문에 치열해질 수밖에 없는 우리는 한심하지 않다. 절반 너머 책을 읽을 때까지 그가 한심한 인물이라는 생각엔 변함이 없었다. 생활조차 불가능한 지경까지 내몰렸는데 생존수단의 모색에 대한 두려움보다 데이트 비용을 한 번도 치르지 못했다는 낭패감에 훨씬 시달리는 그를 좋아하기란 불가능했다.


옆방 여자의 자살로 그는 변화한다. 그녀와 그가 끈끈한 유대가 있었던 건 아니다. 그는 줄곧 '옆방 여자'라 호명했고 '옆방 여자' 역시 옆방 남자 정도의 명칭으로 그를 호명했을 테다. 그런 관계일 뿐이다. 종종 마주치면 할 말이 있는 것처럼 굴며 서성였지만, 그는 할 말이 없었다. 다음번에, 따위의 말로 미루면서 대화를 차단했다. 그는 그녀를 꺼렸다.


고립이 죽음으로 이어지는 걸 봤다. 그는 스스로가 고립돼 있음을 자각한다. 고립이 불능 혹은 퇴락과 상통하다는 것 역시 자각한다. 자신과 옆방 여자는 다르다고 생각했다. 말할 사람 없어 자신에게 기웃거리던 여자는 고립이 맞지만 연애 상대가 있는 스스로는 울타리 내부에서 활보하는 수준은 된다고 여겼다. 아직 고립이 멀었다는 생각. 여전히 자신은 괜찮다는 생각. 여자의 자살로 생각은 자위였고 기만이었음을 깨닫는 셈이다. 생활은커녕 당장 다음 달 버틸 고시원비도 없다. 나는 이 정도의 인간이다. 자신은 이미 충분히 고립돼 있고 안전한 울타리는 증발한 지 오래며 무엇 하나 나를 증명해주거나 보장해주는 수단 따위 이젠 없다는 자각이 체화된다. 벌써 느꼈기에 여자와의 대화를 꺼렸는지도 모를 일이다. “난 저렇지 않아”,가 “나도 저렇게 될 수 있어”,로 변모한다. 여자와 그는 생각보다 훨씬 많이 비슷했다.


그래서 그가 택한 건 여전히 퀴즈다. 그러나 그가 택한 지금의 퀴즈는 요행을 바랐을 때 풀었던 퀴즈와 성질이 다르다. 그에게 퀴즈란 이제 절박한 생존수단이다. 과거에, 퀴즈를 요행의 도구로 규정했다면 이젠 그에게 퀴즈밖에 남아있지 않다. 듣도 보도 못한 퀴즈 집단에 무일푼으로 들어가 버티는 것도, 경쟁에 내몰리고 자신이 속한 집단에서 뒤처지지 않기 위해 열심히 퀴즈 연습을 하는 것 전부 이젠 살아남기 위해서 하는 행위들이다. 요행과 지름길 따위를 바라는 모습은 더 이상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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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퀴즈쇼>를 지은 김영하 작가 


 

그제야 그는 진짜 지금의 '청춘'이 된다. 절박해졌고, 이게 아니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발 딛고 서 있는 곳에서 어떻게든 버티고자 한다.


괜찮을 거라는 누군가의 대사를 소설의 마지막에서 본 듯싶다. 괜찮아, 괜찮을 거야. '이미' 혹은 '여전히' 따위의 수사가 괜찮다는 문장을 수식할거다. 수사가 붙었어도 그 문장엔 색깔이 없다. 색깔이 없으니 규정될 수 없고 그리하여 누구도 그 말에서 의의를 찾지 않는다. 당신과 나는 '벌써' 알고 있다. 괜찮지 않다. 거기 어떤 수식어가 붙어도 괜찮지 않음은 변하지 않는다.


괜찮지 않기 때문에 당신들은 치열하게 분투하는 중이고 괜찮지 않기 때문에 그 역시 열심히 퀴즈를 풀었다. 지금의 청춘은 괜찮지 않다. 그런데, 괜찮지 않은 것들만이 지금의 청춘이 될 수 있는 건가. 그는 한심한 처지의 인간이었다가 본인의 낙오를 자각함으로써 지금의 청춘이 됐다. 내가 그렇게 정의했다.


절박해지고 나서야 비로소 '청춘'으로 정의된 그지만 이전과 다를 게 없다. 여전히 사위엔 아무것도 없고 무일푼이다. 자신이 잘 할 수 있다고 생각한 수단으로 길을 도모했는데 소설에 나온 그의 말로는 시커먼 재거름이 잔뜩 깔려있다. 불투명하다.

 

<퀴즈쇼>를 성장소설로 해석할 수 있을 거다. 요행을 바라는 한심한 인물이던 그는 타인의 죽음으로 자신의 절박함을 인식한다. 인식의 전환이 그가 당도한 성장이라면 결말의 난관에서도 벌써 자각한 절박함을 동력 삼아 다시 한번 분투하리란 예상이 가능하다. 분투가 성공으로 귀결될 거란 예상도 할 수 있다. <퀴즈쇼>는 성장소설이고, 그가 깨달은 게 그것이 아니던가. 그의 절박함이란 아무것도 없음을 있음으로 바꾸는 생존수단에의 쟁취다. 그는 분명 변했다.


그러나, 성장은 변화의 다른 표현이 아니다. 그래서 <퀴즈쇼>는 성장소설이 아니다. 다시 말하지만, 그가 깨달은 건 이렇게 살면 고립을 넘어 퇴락할 거라는 자각일 뿐이다. 그의 자각엔 좀 더 나아지고 싶다는 의식, 자신의 부족함을 인식할 줄 아는 예민함이 없다. 그의 자각엔 이대로는 죽음뿐이라는 막연하고 두려운 예감밖에 없다.


그럼 당신과 나도 똑같지 않나. 당신과 나 또한 두려워서 발버둥 치는 중이다. 도태되면 생존의 기회마저 박탈당할 거라 느끼고 있다. '청춘'은 박탈감을 느끼는 세대, 정도로 규정됐다. 'N포세대' 담론이 등장했고 우리 세대를 정의하는 주류 담론이 그것이다. 그는 그런 '청춘'이 됐고 그건 나도 마찬가지다.

 

'청춘'은 더 이상 어린아이가 아니다. 치기나 유치한 감정으로 삶을 재단해선 안 된다는 것을 알 만큼의 나이는 됐다. 그러나 성장하진 않았다. 알지만 실천하지 않아서 그렇다. 그럼에도, 청춘은 성장 중인 세대를 일컫는 단어일 거다. 유치하고 치졸한 감정이 종종 튀어나올지도 모른다. 타인의 눈자위에 서려 있는 걸 가늠하지 못하고 자기연민에 빠질지도 모른다. 청춘은 비겁하고 유치하다. 그걸 쪽팔려 함으로써 스스로 성찰의 기회를 부여하는 세대가 청춘이라고 생각했다.


반드시 치열해져야 하는 세대인 '청춘'이 유치하고 비겁하지만 성장 중인 '청춘' 보다 자주 인용된다. 전자의 '청춘'이 사람들에게도 더 많이 의식화돼 있다. 언제부터 그렇게 됐는지 모르겠다. 까닭을 헤아려볼 순 있다. 젊어도, '청춘'이어도 살기 어려워서일 거다. 청춘을 둘러싼 맥락을 읽을 때 성장, 젊음 따위의 단어보다 취업과 경쟁 따위의 단어로 해석하는 게 훨씬 쉽다.


시대는 '청춘'의 의미를 희석했다. 청춘이라고 호명할 때, 거기서 우리는 생존을 연결하고 치열함을 연상하며 그렇지 못한 청춘은 청춘이 아닌 이방인, 한량 정도로 규정한다. 나는 <퀴즈쇼>의 그를 한심한 이라 여겼다가 생존하기 위해 애쓰는 모습을 보고 나서야 '청춘'이 됐다고 말했다.


한심하고 찌질하고 유치해도 성장 중이라면 청춘이다. 두려운 예감으로 버둥거리기 시작한 그에게 성찰이 동반됐다면 그는 성장하는 중이다. 단지 생존해야겠다는 자각이 든 거라면 그는 청춘도 아니고 무엇도 아니다. <퀴즈쇼>는 그가 의식의 성장을 이뤄냈는지 보여주지 않는다. 그래서 이건 성장소설도 청춘 소설도 아니다. '청춘'이 어떻게 인용되는지를 보여주는 기록이다.


 

[박성빈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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