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SS] 우리가 "알지 못하는 아이의 죽음"을 말하다 [도서]

글 입력 2019.08.20 1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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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익숙한 사람들의 죽음이 있다. 갑작스럽지만 ‘일상적인’ 그들의 죽음은 잠깐의 묵념 후 스러진다. 그들, 노동자의 죽음은 어떤 형태이든(사고사, 과로사, 자살 등) 오래 남을 수 없다. 그 빈자리를 누군가가 다시 채우고 공장은, 회사는 가동되어야하기 때문이다.

사고는 반복되고 사람은 죽는다. 그리고 그 속에 아이들이 있다. 공장 가동 이래로 한 번도 멈춘 적 없는, 아이들의 죽음이 있다. 겸손한 목격자를 자처하는 작가 은유는 똑같이 불완전한 한 존재로서 또 다른 약한 존재의 이야기를 보고 듣고 기록하고자 했다. 『알지 못하는 아이의 죽음』 1부는 2014년에 과잉노동과 폭행 끝에 스러진 김동준군의 이야기를, 2부는 그와 같은 곳에 있는 아이들과 그들을 둘러싼 어른들의 목소리를 전한다.

김동준이란 사람은, 마이스터고를 다니며 성실히 학교생활을 했었고 꿈이었던 프로게이머를 향한 징검다리로 2013년 11월 12일 CJ에 입사하여 1주일 교육 뒤 CJ진천공장으로 향했다. 현장실습표준협약서에 적혀진 근로기준시간 이상으로 공장사정에 따른 추가노동을 하였고, 2014년 1월 16일 공장 분임조 회식 때 겪은 폭행, 협박은 그로 하여금 20일 오전 7시 40분께, 옥상에서 몸을 던지게 했다. (오마이뉴스 : CJ 다니던 고3 동준이는 왜 목숨을 끊었을까)

몇 줄 안되는 글로는, 아픔을 어떻게 말해야 하는지 몰랐고 보복 당할까봐 두려움에 떨었던 한 사람의 얼굴이 잘 보이지 않는다. 그가 어떤 사람인지 알고 싶지만 남은 흔적이 희미하다. 학생이었고, 노동자였고, 누군가의 아들이자 친구였던 그는 도대체 누구였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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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임진실



학생, 청소년, 노동자


[크기변환]표1_마이스터고 학교 및 학생수 변화.png
 
그림2_특성화고 계열별 학생수 변화.png
(한국교육개발원, 특성화고와 마이스터고 지정현황 및 분포, 2018)


2018년 기준 특성화고는 464개, 249,430명의 학생들이 다닌다. 장인을 육성하기 위한 마이스터고는 2010년에 21개교로 시작하여 2018년 기준 46개로 늘어났고 18,105명의 학생들이 있다. 이들이 모두 취업을 희망하는 것이 아니겠지만, 대다수는 학업과 취업을 병행하고자 한다. 모두 학생이고 청소년이며, 동시에 노동자이다.

여전히 숫자로는 사람이 보이지 않는다. 다른 방식으로 생각해야 한다. 죽은 사람을 희미하게 만드는 어떤 원리를 통해 정체성을 파악해보자. 먼저 학생, 우리가 떠올리는 학생은 '대학‘을 목표로 하는 사람이다. 사회는 인문계고, 특목고 등을 통해 아이들이 좋은 대학을 가도록 공부시키고 격려한다. 이 과정에서 대학을 목표로 하지 않는 사람, 취업을 목표로 하는 사람, 공부에 뜻이 없는 사람, 성적이 높지 않은 사람, 정상적인 교육과정을 밟지 못한 사람들은 쳐내어진다. ‘좋은 대학을 갈 수 있는, 가기 위해 공부하는 사람’, 이 한 줄에 맞지 않는 사람은 시스템의 보조를 거의 받지 못하고 스스로 정보를 찾으며 자기 길을 가야 한다.

다음으로 청소년, 대한민국의 청소년 기본법이 정의하는 바에 따르면 그들은 9세 이상 24세 이하이며 가정, 사회, 국가, 지방자치단체의 책임 하에 놓인 존재이다. 또한 사회구성원으로서 정당한 대우와 권익을 보장받을 수 있고 스스로 생각하고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으며 유해한 환경으로부터 보호받을 수 있다. 단, 그가 초-중-고등학교를 다니고 있는 경우에만. 검정고시, 홈스쿨링, 기술전수, 생계형 아르바이트, 가출 등의 이유로 학교라는 교육기관에 속하지 못한 사람은 불량, 양아치, 실패한, 무서운 등의 수식어가 붙는다. 나중에 대학을 가고 싶어도 이시제도나 설명회는 정상적으로 학교과정을 밟은 학생들 위주로 짜여있기 때문에 이들은 제도에서 소외된다.

노동자는 사용자에게 노동력을 제공하고 그 대가로 임금을 지급받는 사람이다. 역사적으로 사용자는 최대 효율로 노동력을 짜내고 싶어 했고 노동자는 인간의 최소 권리를 인정받고 싶어 했다. 사회는 사용자에 호응하여 구성원들이 근면성실과 인내라는 미덕을 갖추고 사회와 공장에 도움이 되는 인간이 되기를 요구했고, 그렇지 못한 자는 구빈원 등에 몰아넣었다.

표준적 인간에서 벗어난 사람에게 가해지는 압력, 교묘하게 작동하는 배제의 원리는 분명히 존재하는 사람들을 희미하게 만들고 죽은 사람을 보이지 않게 한다.



우리와 다른가?



청소년 노동에 대해 ‘안쓰럽다’ 혹은 ‘보호해야 한다’고 막연히 생각하던 나 같은 어른의 입장이 왜 문제인지를 알았다. 그건 청소년을 동료시민으로 보지 않는 ‘친절한 차별주의자’의 태도에 다름 아니다. 청소년이 당당한 노동의 주체라는 것을 인정하면 현장실습생 문제가 그들만의 문제가 아님이 드러난다. - p.27

그렇다. 청소년 노동이 보호받지 못하는 노동환경과 문화에서는 누구의 노동도 안전하지 못하다. 장윤호 교사는 “우리 사회의 가장 낮은 지점을 채워줘야만 다른 사람들이 같이 좋아진다”고 말했다. - p.30


학생, 청소년, 노동자. 각각의 정상 궤도에서 벗어난 사람들은 튕겨진다. 그런데 이 세 가지 정체성이 모두 합쳐진 사람이라면? 학생은 공부를 해야 하지만, 그들은 노동을 하고 노동자로서 권리를 주장할 수 있지만, 청소년이기에 제약된다. 각각의 역할은 서로를 배제하려 들고 여러 정체성으로 모호한 그 사람은 애매한 것을 싫어하는 이 사회에 의해 우리 사회의 가장 낮은 지점으로 몰린다. 어느 한 곳의 관할에 속하기에도 애매하고 누구의 책임을 묻기에도 애매한 그들은 우리 사이에 유령처럼 서있다.
 
그러나 이것이 ‘그들’만의 일일까? 우리와 그들은 정말 다른가? 한국에서 청소년 시절을 보내고 대학을 목표로 공부를 해서 취업 준비 끝에 기업에 입사한 정상적인 ‘우리들’은 그들을 이해할 수 없을까? 배제의 원리에 노출될까봐 이 악물고 지나왔던 그 시간들이, 법보다 가까운 폭력과 불합리에 밑에서 숨죽였던 시간들이 김동준들과 얼마나 다른가. 정상적인 궤도에 있는 이들 역시 계속 배제당하지 않을까 불안에 떤다.

보이는 모습은 달라도 양상은 같다. 제대로 교육받지 못했던 특성화고 현장실습생들처럼 대학생의 현장실습, 대외활동, 인턴 역시 싸게 쓸 수 있고 기관으로부터 지원금을 받을 수 있어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 이 과정에서 제대로 된 교육을 하는 회사는 소수이며 대다수는 의미없는 잡일을 하거나 과도한 노동에 시달린다. 그들과 다른 점은 적어도 우리는, 죽을 일은 없다는 것이다.

사회가 추켜세우는 혹은 강요하는 대학을 간 이후 졸업장을 따고 기업맞춤형 인재가 되기 위해 자격증부터 스펙까지 갈고 닦아 입사한다. 전공과 일치하지 않는 곳으로 가기도 하고, 가더라도 게임, 광고회사 등에 들어가 업계 특유의 과노동에 시달리기도 하고, 정신적 스트레스에 시달리다가 병을 얻고 퇴사하기도 한다. 회사 내의 불합리 때문에 이직하고자 할 때도 말 한마디 잘못하면 업계에서 매장될까봐 침묵하고 나가기도 한다. (중앙일보 : 업무에 전념했을 뿐인데…직장인 10명 중 2명은 ‘화병')



나는-우리는 공감한다



누가 그런 일을 겪었다고 해서 깊이 생각하고 세상을 바꾸긴 힘들어요. 그런 사람이 주변에 있어서 문제점을 얘기하고 바르게 살자, 나 혼자만의 일이 아니라고 얘기하면 듣기 싫은 거죠. 자기는 자유롭게 살고 싶고 아직까지 아무 일 없으니까. - p.74



정상적인 ‘우리’속의 한 사람으로서, 학생이자 노동자이고 한국에서 청소년 시절을 보낸 한 청년으로서, 나는 ‘그들’에게 공감한다. 내가 보는 세상은 정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나는 페미니스트이고 페미니즘의 렌즈로 세상을 본다. 정상 속의 배제가, 평화 속의 침묵이, 웃음 속의 두려움이 보인다. 내가-우리가 일하게 되는 기업이 김동준이 일했던 공장과 크게 다르지 않고, 나를-우리를 누르는 위계가 그를 짓눌렀던 폭력과 다르지 않다.

설사 좋은 사람, 좋은 기업을 만나도 그것은 나에게 해당되는 운이다. 강남역 살인사건 때 수많은 여성들이 운좋게 살아남았듯이 내가 좋은 기업에서 편안하게 일할 수 있는 것은 나의 노력과 함께 다른 이들에게는 주어지지 못했던 운이다. 신체적, 정신적, 언어적 폭력을 당하지 않았다면 정말 귀한 운이다. 사회가 용인한 폭력과 사회를 돌아가게 하는 배제의 원리는 개인의 인격이나 노력과는 별개이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여성의 삶을 살아오면서 지나갔던 사건들과 만났던 사람들을 통틀어 나는 김동준을 비롯한 수많은 아이들의 죽음에 공감한다. 그들의 죽음과 그들이 당했던 폭력은 그들만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모두가 각각의 입장에서 처한 문제와 정확히 같기 때문이다. 다만 나는, 우리는 가장 낮은 지점에 있지 않아 일터에서 죽음을 마주하지 않을 뿐이다.

그렇다면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뭘까? 화가 나는 것에 모두가 사회운동가가 될 수는 없는 일이다. 각자의 생업과 꿈을 간직한 채로 침묵하지 않고 같이 동조해서 목소리를 내는 방법, 나는 첫 번째 수단으로 글쓰기를 선택했다. 지금 이 글을 쓰는 것과 같이 나의 삶으로 이해한 김동준의 죽음과 그와 같은 아이들, 그와 같은 우리들의 삶을 말한다. 이 글을 읽은 사람이 또다시 그의 삶으로 나의 글과 다른 이들의 삶과 죽음을 이해할 때, 변화가 일어날 수 있다고 믿는다.

우리가 타인을 ‘알지 못하는’ 이유는 관심이 없는 것보다도 그들과 나를 구분하기 때문이다. 그들의 삶이 나의 삶과 관련이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폭력은 한번 용인되면 그것이 나를 비껴가지만은 않을 것이다. 이조차 운좋게 살면서 마주치지 않을 수 있어도, 과연 내 주위의 소중한 사람들에게까지 오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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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지원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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