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즐거운 나의 집'은 정말 즐거울 수 있을까? - 뉴필로소퍼 New Philosopher, 부동산이 삶을 지배하는 사회

부동산, 소유, 재산과 우리의 일상
글 입력 2019.08.17 1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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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거운 나의 집


즐거운 곳에서는 날 오라 하여도

내 쉴 곳은 작은 집 내 집뿐이리

내 나라 내 기쁨 길이 쉴 곳도

꽃 피고 새 우는 집 내 집뿐이리
 
오 사랑 나의 집 즐거운 나의 벗 집 내 집뿐이리


대부분의 사람들이 어렸을 적 '즐거운 나의 집'이란 동요를 들어본 기억이 있을 것이다. 초등학교 음악 교과서에서 배웠거나, 동요를 배울 때 보통 듣고 노래하던 곡이다. 이 동요는 마치 따뜻하고 푸근한 가정의 모습을 그리며 아이들에게 가정의 소중함과 사랑을 일깨워준다.

이 곡은 극작가 하워드 페인이 각본을 쓰고 작곡가 헨리 비숍이 작곡한 오페라 '클라리, 밀라노의 아가씨'에 등장한 곡으로, 원제인 'Home Sweeet Home'은 사람들에게 큰 인기를 얻고 미국의 히트송이 되었다. 남북전쟁 당시 오랜 전쟁으로 인해 고향과 집에 대한 향수를 달래기 위해 병사들 사이에서 큰 인기를 끌었으며 이후 미국의 민요가 되어 우리나라까지 번역되어 지금까지 전해 내려오고 있다.

이 동요는 험난한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따뜻한 메시지를 전한다. 집은 시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즐거움과 따뜻함이 있는 곳이며, 의지하며 기댈 곳이라고 말하고 있다. 우리는 어렸을 적부터 이 동요를 부르며 집의 따뜻함을 기억해왔다.

하지만 정말 우리의 집은 언제나 벗이고 쉼터였을까?



즐거웠던 나의 집


내 유년의 기억으로, 집은 아주 달콤한 곳이었다. 너무 일상적이어서 달콤함조차 당연했던 곳이었다. 나는 대전의 한 외곽에서 유년시절을 보냈다. 30평 남짓한 아파트에서 네 명의 가족이 그 집에서 10년 정도를 지냈다. 10년이 넘게 같은 아파트에서 지내다 보니 내가 사는 집은 언제나 따뜻했고 즐거운 곳이었다.

초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자산과 집의 소유에 대한 개념이 없었던 나는 우리 집처럼 다른 가정 또한 집을 가지고 있으리라 생각했다. 내 친구들이 모두 학교가 끝나고 가는 곳은 그들의 집이었기 때문에 그들의 부모님이 소유한 집이라고 자연스럽게 생각한 것이다.

나는 이사를 자주 다니던 내 친구가 부러웠다. 몇 년 동안이나 같은 집과 같은 방에서 지내던 나와 달리, 내 친구는 주기적으로 집이 달라지고 있었다. 사는 곳이 바뀐다는 아주 설레는 이벤트인 이사를 몇 년에 한 번씩, 심지어 일 년에 두 번도 하는 일을 봤기 때문에 나는 그 친구가 부러웠다.

친구네는 옷을 바꿔 입듯이 집을 자주 이사한다고 생각했다. 그렇다고 해서 친구의 집이 전세인지 매매인지, 그리고 어떤 집이 싸거나 비싸서 친구들의 가정의 형편이 어떤지 생각해보지는 못했다. 오히려 이사비용이 얼마인지도 모르면서 이 집 저 집을 옮겨 다니는 친구의 이사가 정말 즐거우리라 생각했다. 같은 아파트 같은 단지 안에서 이사를 하는 것은 이해가 되지는 않았지만, 어쨌든 나는 우리 집이 10년 넘게 이사를 하지 않는 것 때문에 친구가 항상 부러웠다.

어렸을 적 나는 모든 사람이 각자의 집 하나씩 가지고 있을 것이라 믿었다. 나에게 집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상이었다. 최소한, 즐거웠던 나의 집이라고 기억하고 있었다. 그리고 타인 또한 그러리라 생각했다.



즐거울지 모를 나의 집


집에 대한 현실적인 감각은 대학교에 와 자취를 시작하면서 생겨났다. 대학교 입학 전까진 100에 30인지 300에 30인지 1000에 50인지 하는 말들이 그저 남들의 숫자놀음에 가깝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직접 방을 찾아보고 고르며 후문가를 돌아다니다 보니 100인지 300 인지의 숫자 차이는 그저 금액의 차이가 아니었다.

어쩌면 나에겐 큰 벽으로 다가왔을지도 모른다. 너무나도 당연했던 안락하고 쾌적한 집은 매달 월세를 충분히 지불할 능력이 되어야 누릴 수 있을 권리가 되었다. 내가 안락하게 지낼 수 있었던 것은 우리 집이 가진 자산의 규모가 충분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내가 다른 지방으로 떨어져 살아야 할 때, 우리 가정은 부양해야 할 독립적인 1인 가구가 생겨버렸고 나의 생활 규모 또한 이전과 절대 같을 수 없었다.

공인중개사를 따라 학교 주변을 건너다니며 내가 살 원룸을 찾고 있었다. 샤워 부스 바로 옆에 침대가 있던 19만 원짜리 기숙 방, 형형색색의 신축 건물이었지만 침대의 크기보다 남는 방바닥의 넓이가 좁았던 월 40의 신축 원룸까지. 나는 좀 더 싸고 좋은 조건을 찾아다녔지만 조금 돈이 들어도 괜찮다는 엄마의 말에 300에 30으로 리모델링 한 구식 건물에 들어가 살았다. 부모님은 더 좋은 방을 구하지 못해 계속 아쉬움을 남기셨지만 나는 내 몸 하나 들어갈 곳이면 괜찮다며 방을 계약했다.

내가 살 원룸을 찾아가 침대에 누워 든 첫인상은 '정말 좁다'라는 것이었다. 원룸이라는 곳은 이토록 사람의 크기를 작게 만드는 것인가 생각했다. 내가 단순히 누워 지낼 곳이 아니라, 마치 옥수수밭에서 크기를 제한하기 위해 가둬두는 틀만  같았다. 그리고 나와 부모님이 지불한 보증금과 월세의 가치가 이 정도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주거 환경이 돈으로 환산되는 것을 마주한 순간이었다.

직접 방을 구해 살아보니 나의 원룸이 얼마나 큰 가치를 지니는지, 혹은 다른 원룸이 얼마나 대단한 가치를 지불해야 살 수 있는지 보이기 시작했다. 학교 주변에 즐비했던 원룸들은 학교에 멀어질수록 더 싸졌지만, 통학 시간도 함께 늘어났다. 학교 뒤에 있던 원룸촌에는 많은 학생들이 살았지만, 원룸촌의 끝인 줄로만 알았던 굴다리 아래를 건너 경인고속도로를 넘어가면 허름한 빌라들이 즐비했다. 그곳에서도 나와 같은 학생들이 수업을 듣기 위해 가방을 들고 달려가고 있었다.

얼마 후에는 학교 정문에 거대한 오피스텔이 생겼다. 학교 이름을 넣어 세운 건물은 우리 학교의 상징적인 건물로만 보였다. 그곳에는 술집, 편의점, 음식점 등 여러 부대시설이 있었고, 방은 분양이 시작되자마자 공실이 전부 사라져 높은 인기를 보여줬다.

또한, 학교 옆에는 하늘의 경치를 자랑한다는 이름의 고층의 아파트가 있었다. 꽤 흥미로운 사실은, 그곳에 전세를 내어 살고 학교에 다니는 학생들이 있었다는 것이다. 3억의 전세를 주어 홀로 사는 학생이 있단 사실은 그저 '그럴 수도 있지'라는 막연한 이해와 상상에 맡겨버렸다. 나와 너무 멀리 떨어진 세계의 일이었다.



즐거울지 모를 타인의 집


내 동아리 동기 L은 무더운 여름을 이기지 못해 매일 밤 동아리방에 와서 잠을 청했다. 매일 새벽에 학교에 와서 비좁은 의자들 위에 누워 잠을 청하는 이유를 물어봤더니 그의 방은 에어컨이 없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는 보증금 없는 월 20만 원의 기숙 방에서 생활하고 있었다. 무더위가 계속되는 날 그는 하룻 저녁에 샤워를 세 번씩이나 해도 나아지지 않는 더위 때문에 동아리방에 와서 생활했고, 그는 자신의 살림을 점점 옮겨두면서 지내기 시작했다. 내가 왜 다른 방으로 이사 가지 않느냐 묻자 그는 너무 일상적인 생활이어서 다른 곳으로 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고 했다. 그저 이번 여름만 버티면 그 집은 조금은 더 살만한 집이 되기 때문에 참고 있었다고 말을 했다.

나에게 레슨을 해주던 선생님 H는 최근 정부지원주택사업에 선정되어 이사를 하게 되었다는 소식을 전해주었다. 그는 1억 정도의 전세 원룸을 구했다고 하며 아주 좋은 기회를 찾았지만 방을 이사하는 과정에서 감수해야 할 여러 불편함이 생겼다고 말해주었다.

1억의 전세 원룸이라는 말이 도통 감이 오지 않자, 시간이 꽤 지나고 나서 엄마와 집에 관한 대화를 하던 도중 선생님의 이야기가 생각나 물어보았다. 엄마는 내가 유년시절을 보냈던 대전의 아파트가 입주 당시인 90년대 후반, 1억 원 상당의 금액을 지불하고 구매했다고 알려주었다. 시간이 흐르고 지역이 다르다는 조건에서도 30평 남짓의 아파트를 살 수 있었던 1억이 20년이 흐른 지금 서울 원룸의 전세로 변했다는 사실은 꽤 충격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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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ox에서 제작한 '홍콩의 새장 속'이란 영상에서는 세계에서 가장 비싼 집값을 가진 홍콩에서 사는 사람들을 취재한다. 홍콩 사람들은 새장 집, 관집이라 불리는 곳에서 생활하며 미국의 주차 면적보다 작은 집에서 살아간다. 겨우 한 사람만이 들어갈 수 있는 집의 수는 점점 늘어나고 있고, 더 많은 사람들이 들어가고 있다. 그리고 심지어 그 집의 가격은 상승 중이다.

수백만 명의 홍콩 사람들은 이러한 비좁은 주거 환경에서 살아간다. 그리고 돈으로 집을 구매할 기회가 있다고 해도, 이들의 노력으로 집을 구매하려면 그들이 20년 동안 번 돈을 모두 저축해야 98만 달러 상당의 집을 구매할 수 있다. 사실상 홍콩에서 집을 구매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 되어버렸다.

나의 집만큼 타인의 집 또한 일상이지만 생존을 위한 고통을 삶 전체에서 감내하고 있었다. 결코 동요와 아름다운 유년의 기억만큼 미화될 수 없는 현실이 존재했다.



생존에 가려진 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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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은 생존을 위해 없어서는 안 될 곳이다. 우리의 존재는 존재할 장소와 시간이 있어야 한다. 살 곳과 먹을 음식들, 그리고 입을 옷까지. 이 셋 중 하나라도 불안한 상태에 놓인다면 우리의 존재성은 위협받는다. 생명체로 서서 우리가 살아가는 목표는 이 세 가지 조건들을 충족하기 위한 활동이 된다. 그러므로 우리의 삶은 먹고 자고 입는 조건들에 의해 영향을 받는다. 우리의 일상은 의식주라는 조건에 의해 통제당하고, 그 통제는 우리의 삶으로 자연스럽게 편입된다.

사람은 적응의 동물이기 때문에 불편함 또한 쉽게 적응할 수 있는 능력을 갖췄다. 그래서 일상에 나타나는 불편함 들은 일상은 우리의 불평과 불만들을 잠식시킨다. 불편함의 정도와 관계없이, 일상으로 만들어 버리는 순간 사람은 존재하기 위해 일상에 적응하고 목소리를 내는 것보다 삶을 살아내는 데 집중한다.

그래서 통제받는 일상에 대해 깊게 고민할 기회는 좀 더 통제를 벗어나기 위한 노력의 몸부림으로 변해버린다. 생각할 시간은 줄어들고 일해야 하는 시간은 늘어난다. 즉, 철학은 생존에 가려진다.

<뉴필로소퍼>는 이러한 주택에 대한 생각들을 몇 편의 글로 담아내고 있다. 과연 우리가 사는 것이란 무엇일까?



나의 집이 즐겁지 않게 된 이유


세상은 많이 변했지만, 몇몇 사람들에게 집은 아직도 가장 중요한 조건이다. '아직도'라는 표현을 사용한 이유는, 집의 가치가 떨어져서가 아니라 이제 소유하기 너무 힘들어졌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집을 사기 위해서 재산을 모아야 했지만 이제 평생을 걸쳐서도 집 한 채 살 수 없는 시대가 왔다. 그래서 사람들은 은행을 통해 자신의 미래를 담보하며 집을 빌린다. 자신의 시간마저 자유롭지 못한 때가 온 것이다.

인류 역사상 이러한 주거 조건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우리가 지금 은행에 삶을 담보하고 살아가는 것처럼, 중세시대의 농노들도 자신의 안전을 담보하여 자신의 노동 시간을 타인을 위해 지불했다. 그리고 우리는 농노들과 마찬가지로 하루 반나절 이상의 시간을 영주가 아닌 은행을 위해 노동하고 있다.

우리의 집은 소유하며 일상이 되는 존재였다. 하지만 그 소유라는 단어는 어느새 일부 사람들에게 박탈된 자격이 되었다. 소유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저당 잡혀 있는 존재. 그것이 우리의 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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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우징 게임>에 따르면 오스트레일리아 뉴 사우스 웨일스주 거주자의 51퍼센트와 빅토리아주의 52퍼센트는 내 집 마련의 '꿈'을 접었다고 한다. 결국 소유할 수 없음을 깨달은 사람들은 오스트레일리아를 떠나고 있었고, 일상의 거대한 부분을 포기하고 살아야 했다. 자유시장 경제와 능력주의, 무한한 기회와 평등으로 포장된 현대 사회의 이면에는 부의 불평등이 여전히 자리 잡고 있다.

<현대인의 삶을 지배하는 부동산>에서는 영국 귀족들이 영국 국토의 3분의 1을 차지하고 있으며 국토의 70퍼센트를 전체 인구의 1퍼센트도 되지 않는 사람들이 토지를 소유한다. 국제 빈민 구호단체 OXFAM에 따르면, 전 세계 인구 중 가장 부유한 1퍼센트가 나머지 99퍼센트보다 부동산을 더 많이 소유하게 될 것으로 예측했다. 계층을 넘어선 평등은 특권을 숨기기 위한 착시가 되어버렸다. 이러한 숨겨진 이면에서 부유한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더 많은 소유를 만들고 있었다.

우리는 소유하기 위해 타인의 것이 되어버린 것을 빌리거나 임대하는 식으로 소유한다. 우리는 소유하기 위해 더 많은 것을 잃는다. 집을 담보로 시간을 잃어버리고, 또다시 은행에 시간을 제공받는 대가로 이자만큼의 돈을 잃어버린다. 소유할 수 없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면, 더 많은 것을 잃어버린다. 소유가 더 많은 소유를 만들듯, 부족함은 더 많은 부족함을 낳는다.

우리의 일상 속에 가려져 있던 집에 대한 당연한 인식들, 그리고 그 불편한 변화들을 당연하게 받아들이게 하는 시스템. 우리의 집이 즐겁지 않게 된 이유는 사실 우리가 알고 있었지만, 알아도 바뀌지 않는 사실들 뿐이라고 느껴질 수도 있다.



누가 이러한 환경을 만들었는가


그렇다면 애초에 그 집은 누가 가지고 있었을까? 자연 상태에서 사람들이 하나둘 자신의 소유라고 천명하는 과정이었다면 지금의 상황에 이르기까지 어떤 일들이 일어난 것일까?

<배설물과 재산권>이란 글에서는 자연 상태에 있던 물질이 어떻게 재산이 되는지 설명하고 있다. 이 글은 사유재산을 두고 자연 상태에 있던 배설물을 노동력을 들여 공유물에서 무언가를 빼내면 자신의 재산이 된다고 설명한다.

이러한 과정에서 사유재산은 도덕적으로 옳거나, 적어도 수 세기 동안 합법적으로 소유되고 교환된 결과로써 정당성을 가지지만 그저 남을 착취한 대가로 차지하고, 정복하고, 빼앗은 것에서 출발한다고 말한다. 사유재산을 두고 착취와 합법적 소유라는 양면의 진실을 담고 있는 상황에서 세상은 변하고 있다고 설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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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 자본>의 저자인 토마스 피케티는 부의 불평등이 심화되고 지속되는 상황에서 재산관계를 정치 시스템, 조세제도, 공공재산 등을 통해 개선해야 한다고 말한다. 사유재산을 비판하는 것은 마르크스의 시대부터 이어져 왔지만 그것에 대한 적절한 대안을 찾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재산권이 영속되어서는 안 되며 일정 수준 이상의 재산을 임시적 권리로 만들어야 한다고 한다. 그는 자산에 관해 깊이 생각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전한다. 제도와 법의 틀 안에서 재산권을 개선할 수 있는 조용한 혁명을 진행해야 한다고 말이다.

앞서 말한 Vox의 취재 영상에서, 홍콩 집값의 급등 원인으로는 제한된 토지 면적과 주거 공간 대비 너무 높은 인구밀도라고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그 배경에는 홍콩 정부의 토지 사용 정책이 시민들의 주거가 아닌 토지 임대료와 투자의 이익을 추구하는 방향으로 이루어진다고 지적했다.

홍콩 사람들은 국토의 3.7퍼센트 만을 주거 공간으로 이용하고 있다. 홍콩의 토지 중 75.6퍼센트는 개발되지 않은 녹지였고, 홍콩 정부는 나머지 토지들을 개발하지 않고 그대로 두고 있었다. 교회를 제외한 토지의 모든 소유권을 가진 홍콩 정부는 토지 관리 정책을 이용해 임대 사업을 하면서 큰 수익을 올리고 있었고, 그 수익은 무려 공공재정 수입의 30퍼센트를 차지한다.

홍콩 정부는 자유 경제체제와 낮은 세율로 다양한 사업자들의 입찰을 끌어들이며 토지의 임대 가격이 치솟도록 만든다. 한 주택용지는 부동산 개발업자에게 22만 달러라는 거액에 입찰 되었다. 이는 자유 시장 경제 체제의 시스템 속에서 만들어진 가격이며 홍콩 사람들의 비극으로 이어진다.

홍콩인들의 비극은 살 곳마저 잃어버린 참담한 생활을 만들었으며 더 잃을 것이 없는 그들은 자유마저 제한받자 길거리로 나와 싸우고 있다. 같은 자유라는 이름을 달고 행해진 일들이었지만 홍콩 정부는 자유라는 이름으로 시민들의 자유를 빼앗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들은 분명 피케티가 말한 재산 체계의 조용한 혁명이 필요한 상황이라고 생각한다.



즐거운 나의 집이 되기 위해선


자유는 물질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은 우리가 모두 알고 있다. 하지만 현실을 언제나 쉽게 이겨내는 일은 일어나지 않듯이 우리는 계속 고통받을 수밖에 없다. 우리를 통제하고 속박하는 무언가로부터 자유롭기 위한 몸부림. 그것이 우리가 현실을 마주하고 계속 고민하며 성찰해야 하는 이유다.

'어떻게든 먹고살겠지'라는 말은 희망적이면서 절망적이다. 우리는 삶을 그대로 받아들이며 삶의 아름다움을 느끼며 살아가겠지만, 삶의 고통 또한 그대로 감내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어떻게든 먹고살기 위해 우리 자신을 잃지 않아야 하며, 어떻게든 먹고살지 않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우리는 <렛 시티>에 나온 쥐들처럼 정상적인 생활을 누리지 못할 수도 있으며 극도의 스트레스로 삶이 아닌 삶을 살아갈 수도 있다. 또는 지금 그렇게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건강한 삶을 누리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으며 산책할 길, 뛸 강변, 함께 모이고 떠들 공간까지 제한되는 상황에서 건물을 높이 올리다 못해 결국 가상의 세계로 건너가고 만다.

사람의 토지에 대한 욕망은 톨스토이의 <사람에겐 얼마만큼의 땅이 필요한가?>에서 단적으로 드러난다. 톨스토이는 우리가 필요한 땅은 단지 1.8m의 몸이 뉠 넓이의 땅이라고 말한다. 우리는 더 많은 것을 바라고 더 많은 것을 소유하고 더 많은 사람들보다 강해지려 한다. 우리가 추구하는 욕망은 타인의 불행을 야기하며 자신의 불행마저 초래한다. 톨스토이의 이야기가 해답을 정확히 던져주진 않지만, 일상을 철학 하는 과정에서 이야기를 통해 조금은 더 지혜로울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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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거운 나의 집'을 쓴 하워드 페인은 튀니스 주재 미국 영사관에서 10년 동안 지내면서 고향이 아닌 타지에서 숨을 거두었다. 그리고 31년이 지난 후에야 그의 유해는 고향을 밟을 수 있었다. 미국의 전함이 그의 유해를 실어 뉴욕에 도착했고, 수많은 인파와 대통령, 국무위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군악대의 연주와 예포가 울려 퍼졌다. 그 가운데 그가 쓴 노래인 'Home Sweet Home'이 흘러나왔다.

그가 죽기 1년 전, 그는 자기 친구에게 "세계의 모든 사람에게 가정의 기쁨을 자랑스럽게 노래한 나 자신은 아직껏 내 집이라는 맛을 모르고 지냈으며 앞으로도 맛보지 못하고 말 것이오."라는 편지를 보낸다. 그리고 그는 타국의 길거리에서 생을 마감한다.

“내게 돌아갈 가정은 없지만 고향 공동묘지에라도 묻히게 해 주오”라는 유언에 따라 도착한 그의 유해는 미국의 공동묘지에 온전한 자신의 보금자리를 찾는다. 그리고 그의 묘에는 한 글귀가 씌어 있다. ‘아름다운 노래로 미국을 건강한 나라로 만들어주신 존 하워드 페인. 편안히 잠드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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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필로소퍼 7호
- 일상을 철학하다 -


엮음 : 뉴필로소퍼 편집부

출간 : 바다출판사

분야
인문/철학
문예지

규격
180*245mm

쪽 수 : 164쪽

발행일
2019년 07월 05일

정가 : 15,000원

ISBN
977-2586-4760-05-93

*
《뉴필로소퍼》는
1월, 4월, 7월, 10월
연 4회 발행되는 계간지이며
광고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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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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