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자존감에 집착했던 시절 [사람]

글 입력 2019.08.10 0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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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때, ‘자존감’이라는 단어는 내 머릿속을 끊임없이 맴돌던 단어였다. 사춘기를 맞이한 자연스러운 변화였을까. 아니면 실패 경험이 남긴 두려움 때문이었을까. 나는 무엇을 하든 망설이는 시간이 길어져만 갔고, 그렇게 어렵게 내린 선택은 그 안에 의욕과 자신감을 잃은 공허한 것이었다.

 

중학교 무렵이었던 것 같다. 주체로서의 ‘나’를 인식하기 시작했던 시점이 말이다. 그보다 더 까마득한 어린 시절을 떠올려보면 나는 ‘너’와 ‘나’에 대한 개념이 잡혀 있지 않았다. 내가 어떤 행동을 하건 어떤 생각을 하건 그것의 원인과 결과에 대해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이유에 대해 고민하지 않으니 같은 실수를 반복할 때가 많았다. 결과를 고려하지 않으니 후회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같은 실수’라는 생각은 한참 뒤에 생겨난 성숙한 발상이며, 후회는 어린 내가 안고 가기엔 고급스럽고 사치스러운 감정이었다. 단순하고 조금은 바보 같은, 어린 아이다운 태평한 시절이었다.

 

머리가 커질수록 논리적인 사고 능력도 함께 커져 간다. 중학생이 된 나는 내가 겪는 일련의 사건들을 비슷한 유형끼리 묶어낼 수 있었다. 비슷한 것끼리 뭉뚱그려진 묶음들은 저마다의 정체성을 띄었다. 그 중에서 유난히 뒤죽박죽 섞인, 방대한 양의, 계속해서 무게를 더해가는 묶음이 있었다.

 

절망, 소외, 질투, 두려움, 걱정, 온갖 부정적인 감정으로 합쳐진 정체불명의 덩어리는 접착제라도 묻힌 마냥 똘똘 뭉쳐 떨어질 줄 몰랐다. 해를 거듭하여도 없어지지 못한 이 존재는 공부만 생각해도 바쁠 시기인 나의 고등학생 시절까지도 물들였다. 고등학교 1학년, 새로운 환경을 마주한 나는 이것들에 완전히 잠식된 것이나 같았다.

 

괴로움에 끊임 없이 시달리던 어느 날, 나는 마침내 그것에 이름을 붙이게 되었다.

 

“자존감”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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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들이 다 하는 걸 왜 나는 못할까

특출나게 잘 하는 게 없어

착하지도 않고 용기도 없는 애매한 사람

왜 자꾸 눈치가 보이지?



여기저기로 발산하는 통제 불능의 생각들이 '자존감'이라는 하나의 카테고리로 묶이자 나의 근원적인 문제점이 보이는 듯하였다.


고등학생의 내가 몇 가지 주로 하는 고민이 있었다. 가장 큰 것은 대인관계에서의 어려움이었다. 중학교에서 고등학교로 올라오니 아는 얼굴보다 모르는 얼굴이 많았고 나는 그 낯섦 속에서 굉장히 당황하고 어색해하였다. 물론, 학기 초에는 누구나 어색해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나에게는 그 ‘어색함’이 큰 걱정이었고, 남들은 거의 어색함을 떨쳐내는 시기에 나는 그것을 극복하지 못하였다.

 

두 번째는 남들 앞에서 소리 내어 말하는 것에 대한 고민이었다. 흔히 ‘무대 공포증’이라고 하는 것이다. 나는 일정 중에 발표가 있으면 한 주 전부터 걱정하기 시작하고 발표를 할 땐 항상 벌벌 떨었다. 벌벌 떨며 발표하는 내 모습이 바보처럼 보였을까봐 그 발표한 날에는 잠을 못 이루기도 하였다. 갈수록 사회는 프레젠테이션 능력을 요구한다는데 나는 그 기준에 한참 못 미치는 도태된 인간인 것 같았다.

 

처음부터 이 증상들을 자존감의 문제로 바라본 것은 아니다. 처음에는 ‘대인기피증’, ‘무대공포증’ 등의 병명으로 나를 바라보려 했다. 틀린 진단은 아니었다. 내가 나타내는 많은 증상이 사회불안의 징후를 닮아있었으니까.

 

그러나 ‘병’을 치료하는 방법은 대개 단조롭다. “병원을 가고 약물 치료를 받아라”. “상담을 받아라”. 치료의 과정은 꾸준히 시간과 돈을 투자해야 하는 법이다. 당시 수험생의 신분이었던 나는 그 정도의 시간과 돈을 쏟아 부을 만큼 내 상태가 심각한 것인지 확신도 안 섰고, 끝내는 병원 대신 한의원을 방문해 보았으나 잘 맞지 않아 금방 그만 두었다.

 

자존감의 문제로 정의내리고 나니 내 상태가 보다 잘 설명되었다. 병명으로 부르지 않으니 마음이 한 결 편해지기도 하였다. 많은 책과 글귀에서 자존감을 쉽게는 ‘자아존중감’이라고 한다. 내가 여러 곳에서 접한 자존감의 정의를 종합해보면 ‘나 자신을 있는 그대로 사랑하는 것’ 정도가 된다.

 

확실히, 자존감의 시각으로 비추어볼 때 나는 내 부족한 점을 사랑하고 있지 못한 것 같았다. 내가 발표하며 긴장하는 모습, 낯을 가려서 어색해하는 모습, 그것이 내 있는 그대로의 모습일진데 나는 그것을 받아들이지 못하였고 남들 앞에 숨기기 급급했다. 그러나 본성이 숨긴다고 숨겨지는 것도 아니고 결국 나는 두려워해야할 대상만 늘리게 된 것이다. 예를 들어 과거의 내가 ‘발표 상황’만을 두려워했다면, 고등학생 때의 나는 ‘발표 상황을 두려워하는 나’가 남들에게 들키는 것 까지도 두려워해야 했다.


자존감은 내 사고를 확장시켜준 일종의 패러다임이었다. 내가 직면한 문제 상황에 대해 “나는 왜 이럴까?” 라고 자책했던 것이 “자존감을 향상하려면 어떻게 해야 될까?”라는 질문으로 바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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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새로운 사고의 틀은 언제부턴가 나를 가두는 장치가 되었다.

‘자존감’이라는 단어를 통해 나에 대한 이해가 좀 더 풍부해진 것은 사실이었다. 그러나 이해를 하는 것과 문제를 해소하는 것은 별개의 것이다. 개를 무서워하는 사람이 “옳지, 내가 어렸을 때 개에게 물린 것이 트라우마가 되어 지금도 무섭구나.”하고 깨닫는다고 바로 개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하는 게 아니듯이 말이다.

 

자존감과 관련한 책을 많이 찾아보았다. 「미움 받을 용기」, 「고슴도치의 소원」, 「자존감 수업」 등 자존감과 함께 언급되는 도서가 참 많았다. 책에 적힌 인생 조언들을 읽어 내려갈 때면 모든 것이 고쳐지고 극복될 것만 같았다. 그러나 글씨에서 눈을 때고 고개를 들면 내 세상은 변함 없이 흘러가고 있었다.

 

한 때 자존감은 새로운 패러다임으로써 내게 구원처럼 찾아왔으나 어느 새 그 단어는 내 생각사고 과정을 속박하고 있었다. 모든 부정적인 상황과 기분이 자꾸만 자존감의 문제로 귀결되었다. 그냥 한 번 아프고 말 것을 “아, 내가 나 이런 점이 남에게 보이기 싫어서... 내가 옛날보다 자존감이 낮구나...”하고 버릇처럼 규정했다. 나는 나 자신을 이해한답시고 두 번 세 번 아픈 기억을 복습하고 있었다.


패러다임은 새로운 이해 방법이 되어주기도 하지만 결국은 하나의 ‘틀’에 지나지 않는다. 나는 그저 ‘대인기피증’이라는 거북한 이름을 피해 ‘자존감’이라는 이름으로 갈아탄 것일지도 모른다. 나는 대인기피증인 것도 맞고 무대공포증인 것도 맞고 자존감이 낮은 것도 맞다. 결국, 내 아픈 상황을 정의내릴 방법만 다양해진 것이 아닐까 하는 회의감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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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은 어떠냐고 묻는다면, 거짓 없이 전보다 많이 나아졌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어떻게 해결했냐고 묻는다면 대답할 수 없다. 나는 아직 해결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여전히 발표하기 전에는 떨리기도 하고, 처음 보는 사람들 앞에서 경직되어 있기도 한다. 그러나 대학교를 진학하고 보니 발표나 새로운 사람과의 만남을 싫다고 피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나는 내가 두려워하는 상황에 부딪치도록 그대로 두었다. 여러 번 부딪치다보니 무던해진 것 같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깨달았다. 자존감이라는 용어에 얽매어 나의 행동 하나하나를 진단했던 그 시절보다 그냥 흘러가는 대로 내버려두는 지금이 훨씬 편안하다는 것을. 몇 년이 흘러 나는 나의 천성에 익숙해지고, 무뎌졌다는 것을.


절대 책 내용이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은 아니다. 내가 편안해지고 나아진 방법이 이렇다는 것이지, 책의 내용이 누군가에게는 꼭 필요한 구절들일 수 있다. 그저 내가 말하고 싶은 건, 때로는 해결하려는 노력이 반대로 문제에 대한 의식을 극대화할 수 있다는 것이다.


*

책과 글들은 어쩔 수 없는 단어와 문장들의 나열이다. 글들은 추상적인 것이어서 오래토록 머릿속에 머무른다. 나에게 도움이 되는 글들이 가끔은 나를 붙잡고 놓아주지 않아 옥죄어올 수 있다.

성격 문제와 같이 현실과 직접적으로 닿아 있는 문제를 독서로만 해결할 수는 없는 것이다. 책으로 배운 새로운 개념은 내가 사용할 수 있는 사고의 틀 중 하나로만 넣어두고, 적절하게 현실에서 이용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대개는 현실에 적용하지 못해 또다시 절망에 빠지고 또 책을 찾는 악순환을 겪곤 한다.

악순환에 빠졌다는 걸 인식한 순간 책을 놓아야 한다. 책뿐만 아니라 책을 지배하고 있는 개념으로부터 벗어나야 한다. 내게는 자존감이 그랬다.

누구에게나 나아지는 순간이 제각각 찾아올 것이다. 인생의 암흑기를 지나왔다고 믿는 나는 자존감에 집착했던 시절도 과도기였던 것으로 여기고 있다. 그러나 꼭 겪어야하는 과도기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피할 수 있다면 피할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니 어떤 고민이 좀처럼 해결되지 않고, 극복하기 어려운 것이라면 매달리지 말고 적절한 시기를 기다리는 것을 권하고 싶다. 그 시기가 언제 올지 몰라 불안하다면 무언가 새롭게 시도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 그러나 잊지 말아야할 것은 노력에 상응하는 휴식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나와 같은 고민으로 괴로움을 겪는다면, 최고의 휴식은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주저 없이 행동하던 어린 시절처럼 무지한 상태로 잠시, 회귀하는 것이다.

잠시,
나를 떠나보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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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소영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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