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예전과는 조금 다른 선택 [사람]

여전히 헤매고 있지만, 천천히 나아가는 중입니다.
글 입력 2019.08.09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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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내가 눈 떠서 제일 먼저 뭘 봤는지 알아?” / “뭔데?”/ “벌레”


바빠서 얼굴도 잘 못 보는 친구와 오랜만에 통화를 했다. 그는 그대로, 나는 나대로 각자의 자리에서 살아가느라 서로 깊이 들여다볼 여유도 없었다.


인턴 생활을 하고 있는 친구는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보인 커다랗고 징그러운 벌레가, 왠지 그간의 엉망진창이었던 생활을 요약해주는 일종의 상징 같았다고 한다.


둘이 한참을 웃고 두런두런 이야기하다가 전화를 끊었는데 자려고 누우니 괜히 마음 한구석이 싱숭생숭했다.


요즘 내 생활도 그랬던 거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어딘가 크게 잘못된 건 아닌데 조금씩 어긋나있다는 느낌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던 날들이었다.


10년 가까이 무탈하게 지냈던 친구가 갑자기 예상치 못한 이야기를 꺼내 어색한 사이가 되어버렸고, 오랜 기간 몸담았던 대외활동은 돌아보니 무급 인턴과 다를 바가 없었다. 기자의 꿈은 퇴색되어가고 사회에 오래 몸담은 어른들의 언어와 사고방식은 좀처럼 익숙해지지 않았다. 한 자 한 자 조심스럽게 적은 이력서는 합격 여부조차 알려주지 않은 채 없던 일이 됐다.


이래저래 속이 많이 상했던 것 같다. 나는 마치 징크스처럼 마음에 파장을 일으키는 일들을 겪고 나면 몸이 아프다. 앓으면서 얼마나 힘들었는지를 알게 된다.


이런 나의 아픔을 타인이 이해해주길 바란다는 것 자체가 욕심이라는 것을 안다. 엄마 말이 맞다. 아프면 나만 손해다. 약속된 일을 마무리하지 못해서 “제가 아파서…죄송해요”라고 말하는 게 아무 의미 없다는 걸 알기에 그냥 입을 꾹 다물게 된다. 아프고 힘들어도 그건 맡은 일 앞에서 보잘것없는 핑계가 되어버리니 말이다.


아플 때마다 스스로가 나약한 것 같아 속이 시끄럽다. 마음을 다치고 나면 몸이 아픈 게 수순이 되니 내가 좀 더 강단 있고 무던한 사람이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주문처럼 외우게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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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 그런 사람이 되어보려고 낯선 환경과 하고 싶지 않은 일들에 나를 내던져왔다. 도움이 된 부분도 분명 있다. 여러모로 깨지고 힘들어하면서도 성장한 부분이 있었으니까. 하고 싶은 일들보다 하기 싫고 나와 어울리지 않아 보이지만 ‘해야 할 것 같은 일’에 매달렸다. 나중에 취업에 도움이 되겠지, 이런 활동은 직무와 관련이 있는 것 같아, 이런 현실적인 생각을 하면서.


부단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애석하지만 사람의 알맹이는 크게 바뀌지 않는가 보다. 며칠 전에 자기소개서를 쓰다가 깊고 강렬한 ‘현타’를 맞이했다. 내가 대체 이걸 왜 하려고 하나, 싶었다. 취업, 물론 중요하다. 때가 되면 내 돈벌이를 스스로 해야 하는 건 당연하니까.


그렇지만 내가 이 일을 배우거나 계속하고 싶다는 생각도 없이, 취업에 도움이 된다는 이유로 시작한 일을 다시 감당할 수 있을까,라는 의문이 들었다. 그리고 또다시 '해야할 것 같은 일' 뒤로 '하고싶은 일'을 배치하는 내가 문득 이상하게 여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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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를 공부하고 싶었는데 안정적이지 못할 것 같다는 생각에 얼추 비슷하다고 여겨지는 신문방송학과에 진학했다. 대학에 와서는 글을 쓰고 싶었는데 전업 작가가 되기에는 생활이 곤란할 거 같아 기자가 되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내 꿈은 늘 무언가를 새롭게 창작하고 배워가는 일이었지만, 결과적으로 선택한 일들은 상대적으로 ‘안정감’ 있고 ‘직업’으로 삼을 만한 것들이었다.


어느 정도 틀이 있고 예상 궤도에 머무를 수 있는 일만이 내 목표가 되어왔다. 스스로 현실적이라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대안으로 선택한 일들이라고 해서 뜻대로 잘 이루어질 일은 없었고 (당연한 일이다), 자괴감만 커졌다. 의무적인 일들을 잘 해내는 사람들도 물론 있지만 스물네 해를 살아오면서 나는 그런 인간이 아니라는 걸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나는 마음이 생겨야 움직이고, 해야 하는 일들은 미루고 미루다가 늘 평균 정도 선에서 마무리 짓는 사람이었다.


나를 정면으로 마주할 자신이 없었다. 어쩌면 ‘현실’이라는 단어가 주는 중압감이 거대해서 도망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내게 오래도록 현실은 실체 없는 공포였다. 주어진 길 외에 조금이라도 어긋나면 나락으로 떨어지고 말 거라는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었다. 지금이 아니더라도 나중에 꿈을 이룰 최적의 시간이 찾아올 거라고, 내가 자리를 잡고 여유가 생기면 하고 싶던 공부든 예술이든 취미로도 얼마든지 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하며 스스로를 달래왔다.






하지만 나중에,라는 시간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우선 닥쳐온 일을 잘 끝내는 것도 중요하고, 해야 할 것 같은 일들을 처리하는 것도 좋지만, 어찌 됐든 가장 중요한 건 ‘지금의 나 자신’이다. 나는 대부분 가장 흥미 있고 즐거워하는 일들을 미루어놓고 의무감으로 시작한 일들을 먼저 처리해왔다. 결국 능률은 능률대로 엉망이고, 완성하지 못하고 비슷한 언저리만 머물다가 끝나는 일들이 반복되고 나니 무언가 단단히 잘못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딘가 오래도록 곪은 구석이 있었던 거다.


스무 살 이후, 하고 싶은 일이나 꿈 같은 단어는 허황되고 부풀려진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팔자 좋고 축복받은 사람들이나 하는 이야기라고, 인생에 큰 의미를 갖는 것 자체가 우스운 일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또 한 번 아프고, 또 다시 같은 자리에 놓인 나를 보며 이제는 같은 실수를 반복하고 싶지 않아졌다.


한동안 하고 싶은 일을 하겠다는 말을 한량처럼 놀고먹겠다는 말로 오해했다. 사실 원하는 일을 하겠다는 말은, 목표로 하는 일의 나머지 부분을 철저히 배제하겠다는 뜻이었다. 어영부영 이것도 필요할 것 같으니까 하고, 저것도 괜찮아 보이니 시도하는 게 아니라 정말 필요한 일을 한다는 의미였다.


휴학하면서 적어놓았던 할 일 리스트에서 의무감에 써놓은 일들을 지웠더니 목록이 훨씬 가벼워졌다. 이전과는 다른 형태의 모험을 시도할 시간이다. 우선순위를 재정비하고 전과는 다른 방식으로 삶을 꾸려나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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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싶은 일이라고 해서 편안하고 푹신한 길만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래도 이제는- 조금 더 행복한 방향으로, 미래에 대한 막연한 기대보다 현실에 대한 만족감으로 살아갈 수 있는 길을 선택해본다. 너무 늦지 않았기를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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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선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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