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이제니의 ‘단어’들 [도서]

글 입력 2019.07.31 23: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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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의 세계는 한마디로 ‘역설적’이다. 쉽고도 난해하며, 무의미하고도 유의미하기 때문이다. 중, 고등학교 시절 항상 정답을 찾으며 시를 이쪽, 저쪽으로 꼼꼼히 뜯어보는데 익숙했던 우리에게, 그래서 시는 더 어렵다.


사실은 그냥 읽는 사람의 마음 가는 대로 보면 되는 건데, 우리는 자꾸만 대단한 의미가 시 속 어딘가 숨어있지 않을까 의심하게 된다. 하지만 그 순간 시는 아주 좁고 단단한 의미의 울타리 안에 갇혀버린다. 그러므로 시를 잘 읽고 싶다면, 그냥 시가 흘러가는 대로 그것을 읽으면 된다. 그리고 시를 읽으면서 느껴지는 자신의 마음도 함께 흘러가도록 두면 된다.


세상에는 수많은 시가 있고 수많은 시인이 있지만, 그 중에서도 유독 이제니 시인의 작품은 이토록 역설적인 시의 매력을 한껏 끌어올리는 힘이 있다. 어려운 시어도 없고 어려운 문장 구성을 가진 것도 아니지만, ‘어렵다’고 느끼기 시작하면 한없이 어려워진다. 아마 시인 특유의 은유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지금부터 소개할 그녀의 시가 가지는 몇 가지 특징을 알고 나서 그저 눈이 가는 대로, 마음이 가는 대로 다시 한번 감상해보자. 아마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도 이제니 시인의 작품에 금방 매료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럼 지금부터 시인의 대표 작품집 중 하나인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를 모르고』를 통해 본 이제니 시의 세 가지 특징을 소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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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거품처럼 불어나는 의미들의 힘



그녀의 작품들, 그 중에서도 특히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를 모르고』에 수록된 작품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가장 큰 특징은 특유의 ‘언어 유희’다. 이제니 시의 대부분은 동일한 문장 구조가 계속 반복되는 한편, 등장하는 낱말(시어)의 수도 다양하지 않고 한정적이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끊임없이 새로운 의미가 탄생된다.



검은 개는 검은 개

검은 개는 검은 개


검은 개가 있다. 검은 개가 검게 있다. 검은 개는 검은 얼굴로. 검은 개는 검은 입김을 내뿜는다. 검은 개는 검은 구멍. 검은 개는 검은 얼룩. 검은 개가 달릴 때 검은 개는 흔들리고. 검은 개가 건너뛸 때 검은 개는 사라진다. 검은 구멍 너머로 얼굴 하나가 보이고. 건너뛴 자리에는 지나간 것들이 있다.


- 이제니, ‘검은 개’ 중에서



위 시에서 알 수 있듯이, 문장 구조만 떼어놓고 본다면 몇 가지의 문장 구조가 계속 연속되기 때문에 자칫 단조롭게 느껴질 수 있다. 단어 또한 마찬가지다. ‘검은’, ‘개’, ‘구멍’, ‘얼룩’… 이 몇 가지의 극히 한정된 단어들이 이 시의 전부를 이룬다.


하지만 이 시를 읽으며 어떤 의미를 찾으려 하지 말고, 그저 천천히 눈이 가는 대로 자연스럽게 다시 한 번 읽어보자. 마치 비누를 문지르면 계속해서 피어나는 비누 거품 같지 않은가? 시인이 고른 몇 가지의 낱말들이 반복되는 문장 구조와 만나 리듬을 만들고, 그 리듬을 통해 시 속 주체의 행동들이 자연스럽게 만들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즉 거품처럼 끊임없이, 끊임없이 새로운 동작과 의미들이 생겨나는 것이다. 이처럼 단 하나의 형태소도 허투루 쓰지 않으며 단조로운 문장에서도 새로운 의미가 계속 일어나는 것이 가장 큰 이제니 시인의 작품적 특징이다.




2. 철저히 ‘내면’으로 향해 있는 시적 세계



필자는 개인적으로, 세상의 모든 시인들이 두 부류로 구분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나는 시의 언어를 통해 내가 아닌 남(독자)에게 말을 건네는 작가이다. 그리고 또 하나는 시의 언어로 남이 아닌 스스로에게 끊임없이 말을 거는 작가이다. 그리고, 이제니 시인은 분명 후자에 속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상당수 작품의 곳곳에 스스로와, 스스로를 둘러싼 세계에 대한 깊은 고민이 자연스럽게 표출되고 있기 때문이다.



흙으로 돌아가듯 잿빛에 기대어 섰을 때 사물은 제 목소리를 내듯 흑백을 뒤집어썼다. 내가 죽으면 사물도 죽는다. 내가 끝나면 사물도 끝난다. 다시 멀어지는 것은 꽃인가 나인가. 다시 다가오는 것은 나인가 바람인가. 사람을 믿지 못한다는 것은 자신을 믿지 못한다는 것이다. 거짓말하는 사람은 꽃을 숨기고 있는 사람이다. 이제 우리는 영영 아프게 되었다. 이제 우리는 영영 슬프게 되었다.


- 이제니,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를 모르고’ 중에서



흑과 백, 잿빛, 죽음… 특히 위의 작품과 같이 이 시집에서는 유독 삶과 죽음에 대한 이제니 시인의 오랜 사유가 상당수 보이는 것이 특징이다. 하지만 시인은 시를 통해 독자에게 직접 교훈을 주려고 애쓰지 않는다.


그저 담담하게 자신이 해왔던 생각들을 읊조리듯 시로 썼을 뿐이다. 그리고 그렇게 쓰여진 시는 한 편, 두 편이 모여 마침내 시인이 짜낸 생각의 직물이 된다. 이처럼 자신이 가진 고민, 결핍, 상처들을 무거우면 무거운 대로 시로 이야기하는 것이 이제니 시인의 두번째 작품 특징이다.




3. 시선 속에 녹아 있는 계절, 그리고 풍경



한편, 이제니 시인이 고르고 또 고른 시어들 속에는 유독 계절, 풍경, 자연과 연관된 단어들이 많다는 것도 그녀의 시가 가지는 또 다른 특징이다. 특히 이 시어들을 자신이 사물이나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과 연관짓거나, 혹은 동일시하는 시적 표현이 탁월하다.



우리는 숲길을 걸어간다. 청색과 홍색, 혹은 흑색과 자색 실이 드리워진 나무들을 스쳐 지나가면서. 흩날리며 흔들리는 것은 슬프군요. 세계의 끝이 넘실거리고 있군요. 나뭇가지 사이로 젖은 책들이 널려 있었다. 반짝이는 햇빛 아래 무수한 책들이 부풀어 오르고 있었다. 한 권 한 권 차례차례로. 그것들은 거대하고도 단단한 집으로 변하고 있었다.


- 이제니, ‘나선의 감각- 역양’ 중에서



시를 쓰는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무의식적으로 자주 사용하게 되는 시어들이 있다. 그리고 그것은 곧 시인이 자주 생각하고, 꿈꾸고, 좋아하는 세계를 상징하는 낱말들이기도 하다. 실제로 이제니 시인은 거제도 바닷가 근처에서 조용하고 평화로운 전원 생활 중이라고 한다. 이와 같은 창작 배경을 통해 우리는 시인이 이미 계절, 자연, 풍경과 늘 함께하는 세계 속에 있으며 이를 이상적으로 생각한다는 것을 짐작해볼 수 있는 것이다.


이제니 시인의 작품 속에서, 이러한 자연의 시어들은 앞서 언급한 특유의 리듬과 합쳐진다. 그리고 독자로 하여금 시를 읽는 내내 꿈과 현실, 그 중간 어딘가에 있는 듯한 특유의 느낌을 받게 한다. 그러므로 시인의 시를 조금 더 직관적으로 이해하고 싶다면, 자신이 어떤 자연 혹은 풍경의 안에 들어와 있다고 한번 상상하며 시를 읽어보자. 아마 당신도 모르는 사이에 시인이 생각한 세계를 더 잘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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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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