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아무것도 안바껴도, 내가 바뀌잖아 - 연극 '달랑 한 줄' [공연]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일은 다른 사람의 손을 잡는 일이다
글 입력 2019.07.28 1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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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다니던 중학교는 색깔 머리끈으로 머리를 묶는 것이 교칙 위반이었다. 또한 목덜미가 보인다는 이유로 여학생들은 똥머리도 할 수 없었다. 무슨 이유인지 모르겠지만 그다음 해, 두발에 대한 엄격한 교칙이 사라졌다. 하지만 여전히 교복 블라우스 안에 색깔 티를 입는 것은 허용되지 않았고, 치마 위에 담요를 덮는 것도 안됐다.


한 친구가 불같이 화를 내며 학생주임 선생님을 찾아갔다가 ‘단정해 보이지 않는다’ 라는 답변을 가지고 돌아왔을 때, 모두 할 말을 잃었다. 담요를 덮을 수 없으니 혹여 치마 속이 보일라 우리는 더운 한 여름에도 속바지를 꼭꼭 챙겨 입고, 다리를 한껏 모으고 앉아있는 수밖에 없었다.


몇 주 전, 강아지와 집 근처 공원을 산책하다가 내가 졸업한 중학교의 교복을 입고 있는 여학생을 만났다. 후배라는 사실을 단번에 알아채지는 못했는데, 그도 그럴 것이 교복 블라우스는 10년 전과 같은 모양새였지만 그 여학생은 치마가 아닌 반바지를 입고 있었다. 이미 인터넷 기사로 요즘의 교복들이 후드티, 반바지 등의 생활복으로 많이 교체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나름 보수적이었던 모교까지 바뀌었다는 사실은 나에게 나름의 충격이었다.

 

 

 

그 때는 맞고 지금은 틀리다



연극 <달랑 한 줄> 의 프리뷰에서 대중문화의 강력한 파급효과와 확산력을 언급하며 “우리는 조금 더 신중해야 한다” 는 내용의 글을 썼다. ‘소녀는 가냘프고, 나약해야 한다’ 는 미디어의 가치관을 학습한 우리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소녀처럼 달려보라는 주문에 소극적이고 무성의하게 뛰어 보이는 것을 당연시하게 된다. 우리는 달랑 한 줄의 카피나 달랑 1초의 장면에도 신중해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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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도망쳤다.

여자였던 자신은 할 수 있는 게 없기에…


신사적인 제롬은

여성을 꽃처럼 다뤄야 한다고 생각…


쉽게 수락하지 않으면서도

여지를 남기는 게 섹시한 여자…



명희가 불편함을 느낀 문장들이다. 번역을 중단하고 출판사에 수정을 요청하지만, 오히려 계약을 파기당한다.

 


달랑 한 줄_연습사진_c김민솔13.jpg



여학생이 교복 블라우스 안에

입은 속옷이 비치면 안 된다.


여학생이 교복 블라우스 안에

색깔 티를 입으면 음란하다.


여학생이 똥머리를 해서는 안 된다.



현주가 학교에서 불만을 가진 학교의 교칙들이다. 현주는 교칙에 불복하다가 담임선생님께 연락을 받은 연실에게 크게 혼난다.

 

위에 나열된 문장들은 문제없는 문장일 수도 있다. 어쩌면 저 문장을 읽고 불편함을 느낀 사람이 너무 예민하게 반응하는 것 일 수도 있다. 물론 10년 전에는 말이다. 그때는 불편함을 느껴도 의견을 피력하기 힘들었다. 여자가 목소리를 내면 자칫 ‘드센 기집애’ 로 낙인찍히기 십상이었고, 그 낙인은 여자가 결혼을 안 하면 마치 큰일 나는 것 같은 분위기인 한국에서는 결코 무시할 수 없는 것이었다.

 

 


아무것도 안 바뀌어도, 내가 바뀌잖아



출판사에게 계약 파기를 당한 명희는 친구 연실 그리고 연실의 두 딸과 출판사 앞에서 항의 시위를 한다. 현주는 ‘왜 안되는지 1도 모르겠다’는 문구가 써진 티셔츠를 제작하여 블라우스 안에 입고 다닌다.


두 딸을 위해 남편과 이혼하지도 못한 채, 명희의 집으로 도망 와 있던 연실은 남편과 이혼을 다짐한다. 직장 여자 화장실에 몰래카메라가 설치된 사건을 모른척하고 화내지 못하던 연주는 명희의 시위에 참여한다.

 

‘이렇게 한다고 뭐가 바뀌냐’ 는 말은 크게 한 발을 내디디려는 이들에게 제동을 건다. 그리고 도약을 주저하는 이들을 유혹한다. 괜히 나서서 다치지 말고, 너부터 챙기라고. 하지만 연극은 말한다.



아무것도 바뀌지 않을지라도,

‘나’는 변한다.


내가 바뀌면,

‘너희’도 바뀐다.



여자였던 자신은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게 없기에 도망치던 시대는 이미 초저녁에 지났다. 지금 여기에 같이 있는 우리는 한 줄을 바꿀 수 있고, 한 줄은 세상을 바꿀 수 있다. 안락한 우물 속에서 그들이 허락하는 것들로 안주하는 이 세상의 모든 여자들이, 우물 밖으로 나와 서로 손잡는 날을 고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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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정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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