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오늘날 사회가 여학생에게 바라는 것 - 달랑 한 줄 [공연]

여학생의 역할은 성적을 잘 받은 남학생에게 키스를 해주는 것
글 입력 2019.07.27 0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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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니즘 연극이란 참 역설적이다. 문화 활동은 예술이라는 이름을 빌리지만, 그 행위에는 분명한 목적이 있다. 페미니즘 연극에서 목적은 더 많은 이들의 코르셋을 벗기고, 각자의 꿈과 이상을 찾게 하려는 데에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어떤 문화 활동을 선정할 때 그들이 강요가 아니라 그들의 의지로 자발적으로 선택한다는 것을 고려하면, 페미니즘 연극을 접하는 이들은 대부분 코르셋을 이미 던져버린 이들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페미니즘이 일반인들에게로 확장되려면, 다른 문화생활보다 조금 더 큰 비용을 투자하고서라도 연극을 통해 일으키는 파장의 효과가 클 것인가.


하지만 어떤 사람이 제목에 이끌려 책을 읽는다고 해서, 그가 그 책의 내용과 그로 인해 얻게 될 모든 감정을 미리 알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가 지금 처한 상황에 따라서, 그 날 무슨 일이 있었는지에 따라서도 쉽게 좌지우지될 수 있다. 또는 그가 흥미로운 제목을 보며 자연스레 얻을 것으로 생각했던 느낌과는 전혀 다른 무언가를 얻었을 수도 있다. 그리고 기존에 갖고 있던 무언가를 잃어버렸을 수도 있다.


그렇게 생각하면, 페미니즘 연극을 보는 이들은 그들만의 무언가를 얻고, 또 무언가를 잃을 것이다. 그리고 연극을 본 이들이 남기는 메시지로 다른 이들이 그것에 관심을 두게 할 수도 있다. 왜 책이나 영화에서는 그토록 관대하면서, 페미니즘이란 여전히 그렇게도 소수가 지향하는 문화에 속하는 것처럼 느껴지는지 알 수 없는 노릇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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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에서 페미니즘은 경멸받고, 혐오의 대상이 된다. 그것을 혐오하는 사람들은 남자든 여자든 딱히 성별에 구분은 없는 것처럼 보인다. 외모지상주의는 동물의 본능이라고 주장하는 이들은 페미니즘을 하찮게 여기며, 앞에서는 당당히 말할 수 없는 주제로 만드는 것에 일조한다. 어떤 이들은 페미니스트라고 오해받는 것을 싫어하기도 한다. 인권을 평등하게 만들기 위해 여성 인권을 중시하는 운동이 어느샌가 여성 인권만을 중요시하고, 남성을 혐오하기 시작하는 미디어가 생산되며 사회의 극단적인 대립은 점점 심해졌다.


가장 걱정스러운 것은 그 대립으로 인해 결국 페미니즘 연극이 봐야 할 사람들은 보지 않고, 보던 사람들만 본다는 것이다. 여학생들이 교복 셔츠 안에 색깔이 튀는 브래지어를 입는 것이 문제라는 것을 아는 사람들만 다시 한 번 문제점을 인식하고 사회에 나가서 외치면, 그것은 또 다른 혐오를 낳는다. 여학생의 역할은 점수를 잘 받은 남학생에게 키스를 해주는 것뿐이다, 라는 소설 속의 달랑 한 줄에 아무런 이의 제기를 못 하며, 작품이라고 부를 수도 없는 혐오물을 재생산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한 줄에 불만을 느끼고, 불편해하는 이들은 생업을 잃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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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은 ‘달랑 한 줄’에서 시작한다. 등장인물은 네 명이다. 처음 등장하는 ‘엄마’는 가부장적인 가장에 일방적으로 희생당하는 인물이다. 사회가 씌운 여성이라면 응당 그래야 한다는 코르셋을 벗어던지지 못한 드라마를 보면서, 무엇이 잘못되었는지조차 인식하지 못하고 흥미롭게 본다. 남편의 불공정한 말에도 이혼하자는 한마디 하지 못하고, 아이들의 장래에 결함이 될 것을 걱정한다. ‘엄마’는 우리 세대의 어머니다. 사회에 무슨 사건이 터지든 여자가 알아서 조심해야 하고, 학교에서 시키는 것을 그대로 따르라고 강요하는 어머니다. 왜냐하면, 무슨 일이 있든 결국 가장 피해를 보는 것은 여자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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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에게는 두 명의 딸이 있다. 한 명은 엄마의 말을 잘 듣고 자라 사회생활을 하는 딸이고, 한 명은 학교에서 시키는 것을 곧이곧대로 듣지 않고 매번 반항하는 딸이다. 엄마 말을 듣고 얌전하게 처신한 딸은 회사에서 설치된 몰래카메라를 회사 남성들이 돌려보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았지만, 어른들의 앞에서 자기는 괜찮다고, 진짜 괜찮다고 말한다. 무언가 바꾸려고 애쓰는 동생에게, 사회는 절대 바뀌지 않는다고 이야기한다. 봐도 못 본 척, 들어도 못 들은 척하자고. 자기가 아무리 조심하려고 해도 범죄자를 대체 어떻게 막을 수가 있느냐고 여린 목소리로 내뱉는 분노는 체념에 가깝다.


둘째 딸은 언니와는 다르게 잘못된 학교의 지시에 반항한다. 교복 대신 학교의 일방적 지침에 반항하는 글자가 새겨진 티셔츠를 입고 다니며, 시위 준비를 한다. 그러나 같이 봤던 내 동생은 학생이 해야 할 일도 있는데 학교 일이든 뭐든 다 때려치우고 시위에 참여하는 모습이 과했다고 했다. 대학생이나 성인의 눈으로 불편하게 바라보는 일들을 고등학생에게 씌워서 극 자체가 너무 꾸며진 느낌 같다고.


그러나 달랑 한 줄에 분노하는 편집자 친구와 학교의 지시에 분노하는 딸 옆에서 변화하는 엄마와 언니의 모습을 보는 것은 분명 큰 감동이었다. 마지막에 엄마가 딸들에게 무조건 참고 살라고 했던 것을 눈물 흘리며 사과하는 장면에서는 극장 모두가 눈물 콧물을 흘려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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꼭 페미니즘과 관련된 이슈에서 당연하게 나오는 주장은 군대 이야기다. 사실 나는 남성이 군대를 다녀야 한다면 여성도 당연히 군대를 나와야 한다고 생각한다. 똑같이 분단된 국가의 국민인데 왜 병역의 문제를 남성에게만 부과되는 것인가? 또한, 국가에서 국민을 고용한다면 당연히 노동에 맞게 보장된 최저 시급을 보장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계급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현재 2019년도는 30만 원에서 40만 원 사이다. 주3일 4시간가량 일했을 때 최저 시급을 받는다고 가정하면 군대 내 최상위 계급과 월급이 같다. 왜 그들의 삶을 온전히 빼앗아 가족으로부터 격리해 낯선 이들과의 공동체를 억지로 만들어두면서 그에 맞는 대우를 전혀 해주지 않는지 의문이다.


그리고 그에 맞서는 주장은 여성의 생리와 임신, 출산에 관한 이야기다. 사실 성별이 정해진 순간부터 짊어질 수밖에 없는 문제와 대한민국 국민이라는 법 아래에 정해진 문제를 서로 비교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두 가지의 경우 모두 해야 하는 것, 할 수밖에 없는 것이지만 엄연히 다른 문제고, 그래서 논쟁의 결론은 늘 논리적이지 못하게 ‘여자가 되라’거나 ‘남자가 되라’가 된다.


어떤 주장을 하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늘어지는 다른 문제가 일어난다. 여성할당제라던가 육아 휴직제 등을 생각하다 보면 사회란 게 참, 한 인간이 소화할 수 있는 삶의 영역과 하루에 주어진 24시간에는 한계가 있는데, 공적인 일의 영역과 매우 사적인 결혼과 육아, 임신과 출산까지 너무 많은 것을 부과하며 통제하려고 한다. 그러나 한 개인의 삶을 2년 가까이 오롯이 빼앗아 훈련하고 밥을 주고, 잠을 재우고 관리하는 국가인데, 국가란 개개인을 과연 어디까지 규제를 해야 하고, 어디서부터는 자유를 주어야 할 지 아무리 생각해도 명확한 결론을 내리기가 힘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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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남역 포스트잇



그러나 페미니즘 논쟁에서 대립하는 상황은 그들이 이 국가에 태어남으로 인해 가지는 의무가 남성들이 일으키는 성범죄를 상쇄하리라고 암묵적으로 생각함에 있다. 이쪽은 범죄에 관해 이야기하는데, 그쪽은 성별이라는 공통점 하나로 똘똘 뭉쳐 다 같이 들고 일어난다.


당장 우리 학교만 해도 학교 휴게실에서 공부하는 여학생의 발가락을 물고 달아난 ‘족제비남’ 사건이 있었다. 요약한 사건만 들으면 매우 간단한 상황이다. ‘족제비남은 발가락 페티쉬를 가졌구나~', '들키면 학교 못 다니겠다' 하면서 넘어갈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사건을 겪는 여학생으로서는 커다란 인간이 갑자기 발가락으로 돌진해서 물었다는 것이, 앞으로 어떤 심한 일을 더 겪을지 모를 엄청난 두려움을 안겨주었을 것이다.


모든 남성이 ‘족제비남’처럼 본능과 욕구에 따라 행동하지는 않을 것이지만, 많은 사례가 쌓여 남성을 범죄자로 일반화하게 되고, 그 혐오는 다시 혐오하는 대상에게로 돌아온다. 애초에 시작한 혐오는 공포와 불안인데도 말이다. 하지만 공포와 불안으로 인한 혐오와 단순한 불호에 의한 혐오는 다른 것인가? 목적이 다르다면 그것은 다른 행위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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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즈인더트랩 순끼



2010년부터 2017년까지 네이버 웹툰으로 연재되었던 ‘로맨스릴러’ ‘치즈 인 더 트랩’을 본 사람이면 누구보다 섬뜩했던 유정 선배를 기억할 것이다. 완벽한 아들을 기르고 싶었던 유정의 아버지는 그의 친구로부터 그를 감시하게 했고, 유정은 자라서 친구들을 이용해 홍설을 감시한다. 누군가는 댓글로 목적이 다른 감시라며 유정을 옹호했지만, 자기 아들이라고 할지라도 누군가를 꾸짖기 위한 감시이든, 소중한 누군가가 진심으로 걱정돼서 감시한 것이든 당한 사람이 알게 되면 둘 다 정말 끔찍한 상황 아닌가? 그래서 나는 끝까지 유정의 행동을 옹호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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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페미니스트가 아니다. 누군가는 내가 남성에게 피해 의식을 갖고 있다고 나를 페미니스트라고 함부로 판단했었는데, 나는 개념 없는 여성도 싫어하고 마찬가지로 개념 없는 남성도 싫어한다. 누구나 성범죄자를 혐오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 아닌가? 반면 일부 페미니스트의 주장에 따른 여성만이 사는 국가? 정말로 끔찍하다. 남자라서 범죄를 저지르는 것도 아니며, 여자라고 무조건 피해자인 것은 아니다. 어리다는 것, 여성이라는 이유, 또는 피해자라는 이유로 많은 면죄부를 주지만, 얼마나 많은 여성이 습관적으로 ‘평가’를 해대고 있는지 당신들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혐오는 또 다른 혐오를 낳고, 결국 극단적인 대립의 상태가 된다. 그래서 잘못된 것을 말해도, 섣불리 말한 이는 다시 혐오의 대상이 된다. 그리고 그것은 또 혐오를 낳는다. 이 상태는 꽤 오래되어 잘못된 것이 잘못되었다고 말할 수 없는 곳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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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지수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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