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연극과 사랑에 대한 오해 - 레라미 프로젝트 [공연]

연극과 사랑에 대한 오해에 관하여.
글 입력 2019.07.26 02: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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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애 두 번째 연극이었다. 2019년 7월 19일 두산아트센터 Space111에서 본 <레라미 프로젝트> 말이다.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연극을 보러 다닐 수 있는 곳에 살면서 두 번 밖에 경험하지 못한 이유는 첫 번째 연극으로 거슬러 간다.

처음으로 본 연극은 비호감이었다. 대학로 한 극장에서 상시로 공연하는 코미디극이었는데 어찌나 별로였는지. 2시간을 내리 앉아서 집중하느라 온 몸이 근질거리고 목, 어깨, 무릎까지 아프지 않은 곳이 없었다. 그 외에도 생각보다 더 작은 무대, 생각보다 더 가까운 무대와 관람석, 자꾸만 말을 걸어오는 배우에게 띄지 않도록 살살 눈을 피하던 나, 중간에 화장실이 가고 싶었지만 참아야 했던 것 등등. 그 후로 두 번 다시 연극을 찾지 않았다. 하지만 <레라미 프로젝트>라는 연극의 향유를 앞두고 고민에 빠졌다.


"아 매튜. 그 게이새끼요?"


나는 이 단 한 문장으로 연극 <레라미 프로젝트>의 주제를 유추했다. 동성애 혐오 사건이겠구나. 하지만 이 연극이 '동성애 혐오'를 주제로 한다는 것이 내 마음을 돌렸다기보단 그 주제를 어떻게 풀어나갈지에 관한 '방식'이 흥미로웠다. 결국 나는 문화 초대를 신청하면서 내 생애 두 번째 연극의 포문을 열었다. 첫 번째 연극 이후로 5년 만이었다. 어쩌면 이 연극이 그간 연극에 대한 나의 인상을 바꿔줄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극은 배우들이 극단원을 연기하면서 시작한다. 미국의 와이오밍 주가 낯선 관객들에게 그보다 더 낯선 도시 레라미를 설명하면서 이해를 도왔다. 평화로운 마을 레라미에서 벌어진 폭력과 고문. 그리고 밝혀진 피해자의 성 정체성. 동성애자라는 이유로 죽임을 당한 피해자 매튜를 둘러싼 논란과 혼란. 그것을 쉬쉬하는 마을 주민들의 인터뷰를 통해 성소수자에게 가해지는 시선까지 엿볼 수 있었다.

사실 주제가 신선하거나 매력적이진 않았다. 동성애 혐오를 비판하고 성 소수자들에게 쏟아지는 부당한 일들을 공론화하겠지 뭐. 뻔히 예상 가능한 전개와 결말이었다. 그게 공연을 보기 전, 나의 솔직한 마음이었다. '동성애를 혐오해선 안 되고 그럴 권리는 아무에게도 없다. 그야말로 당연한 정답을, 정상적인 개념을 가진 사람이라면 자연히 동의할 인권에 대해 더 토론할 거리가 있는지. 찬성과 반대로 편 갈라 윤리를 부정할 일말의 근거도 없다.

이미 답을 알고 있는 문제는 좀처럼 흥미가 가지 않기 마련이라 점점 공연 날짜가 다가올수록 기대를 접었다. 그런 마음으로 이번 연극에 가장 눈여겨본 것은 '어떻게 풀어가느냐'였다. 사회적으로 지향해야 하는 도덕적 가치를 어떻게 제시하는가. 그것이 바로 주요 관람 포인트였다. 누구나 알고 있는 뻔한 대답을 색다르게 이야기하는 '표현 방식'은 어떤 예술에서건 가장 어려운 것이다.

다행히 레라미 프로젝트의 진행방식은 뻔하지 않았다. 맨 처음 등장인물을 극단의 배우들로 설정하여 하나의 큰 틀을 형성하고 레라미 주민들을 인터뷰하면서 점점 몰입도를 높였다. 동성애 혐오를 당한 희생자 매튜가 등장해 사건을 재구성하는 방향으로 나아갈 줄 알았던 기존의 고정관념을 부순 것이다.

사건의 중심인 매튜의 등장 없이도 충분한 몰입감을 선사한 것은 다양한 역할을 맡은 배우들의 열연이 매튜라는 인물을 상상하게 만든 덕이었다. 캐릭터마다 가진 특성과 분위기를 제각각의 연기로 보여준 배우들이 실로 열정적이었다. 게다가 몇 개의 목제 의자와 마이크 하나로 극적인 연출과 화려한 세트장이 없이 극장을 꽉 채웠다.

연극이 끝난 뒤, 깨달았다. 주제 자체가 '흥미롭다', '아니다'라고 평가할 수 있는 건 내가 제 삼자라 그렇다는 것을. 나는 혐오 대상의 범주에 들지 않기 때문에 감히 흥미로 치부할 수 있는 문제였다. 내가 동성애 혐오를 주제로 흥미를 논할 때, 아직도 어디선가 동성애자라는 이유로 차별받고 혐오 받고 방관당하고 있을지도 모르는데 말이다. 결국은 나도 남의 일이기에 주제 자체가 주는 감흥보다 표현 방식과 흥미를 따졌다. 부끄러움이 들어 속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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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이 시작되기 2분 전에 친구가 이 연극의 시대 배경이 몇 년도냐 물었다. 그 순간 나도 모르게 '70년대일걸?'하고 대답했는데 얼마 안 가 머쓱해졌다. 극의 시작과 동시에 극단 <실한>의 배우들이 레라미 프로젝트의 주요 사건은 1998년에 일어난 이야기라고 말했기 때문이다. 친구는 70년대라고 말한 나를 째려봤고 나는 민망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왜 그렇게 생각했을까. 그 생각에 차서 연극이 시작되고도 몇 분간 집중하지 못했다. 분명 보도자료를 조사하고 갔음에도 나는 이 동성애 혐오 사건이 1970-80년대의 일이라 단정했다. 아무렴 미국인데 22년 전까지 동성애 혐오가 만연했다고? 한국이야 뻑하면 동성애 반대 집회가 일어나고 주변 사람이 동성애자라고 뒤에 가서 수군대는 일들이 비일비재하지만, 미국은 다를 거라 생각했다. 미국이라면 근 30년 전까지도 성 소수자를 인정하고 존중하는 문화가 지배적이었을 거라고 무의식적으로 예상했다. 그러나 예상은 완전히 빗나갔고 동성애자라는 이유로 울타리에 묶여 죽어야 했던 혐오 사건은 22년 전 미국 땅에서 벌어진 게 맞았다.

미국에서 매튜 사건이 사회적으로 이슈가 되고 그것에 문제의식을 느낀 사람들이 들고일어나 법을 개정하는 단계까지 이루어진 것은 실로 대단하다. 만약 한국에서 동성애 혐오 살인사건이 일어난다면 어떻게 전개되었을까? 혐오 사건이 아닌 단순히 무분별한 묻지마 사건으로 명명되거나, 사회면을 바짝 달궜다가 소리소문없이 사라지는 반짝 이슈에 그치지 않았을까.

내심 <레라미 프로젝트>라는 연극으로까지 사건이 전개된 것이 미국의 인권 의식의 단면을 비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오늘날 종로 한가운데서 이 연극이 울려 퍼지고 누군가의 가슴을 울리는 것이 새삼스럽다. 우리도 조금씩 변해가고 있는 걸까. 그랬으면 좋겠다.

이번 연극을 통해 내가 가진 연극의 인상을 단번에 바꾸었다면 사실 거짓말이다. 첫인상이란 건 쉽게 바뀌지 않는 법이니. 5년 전의 첫 연극과 비교해서 무대도 훨씬 넓었고 관객의 참여를 유도하지 않아서 부담 없이 관람할 수 있었지만, 역시 2시간을 가만히 앉아 있는 건 고역이었다.

다만 여태껏 그랬던 것처럼 연극을 기피할 명확한 이유가 없었다. 일종의 선입견이었다. 한 번의 경험으로 모든 걸 판단해 기피한 속단이었다. 그런 내게 레라미 프로젝트는 색안경을 벗어보라고 권유해준 격이다. 이건 또한 레라미 프로젝트가 말하고자 하는 주제와도 비슷한 선상에 있는 것 같다. 무엇인가를 오해해 쌓은 부정적인 감정과 회피.

내가 연극에 대해 오해한 것을 풀어냈듯 우리 사회도 사랑에 대한 오해를 풀어나갔으면 한다. 남자가 여자만 사랑해야 한다는 오해. 여자는 남자를 사랑한다는 오해. 그것은 너무 오래 쌓여서 걷어내기가 쉽지 않지만 우리는 서서히 깨달아가고 있다. 누군가를 사랑하는데 치러야 할 것이 부당한 죽음이기엔 어떤 것도 정당하지 않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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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재이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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