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view] 나를 막아서는 달랑 한마디 - 달랑 한 줄

당신을 상처입힌 달랑 한 줄은 무엇인가요
글 입력 2019.07.09 1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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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때는 분홍색이 그렇게 싫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아주 어릴 때는 아니었다. 유치원을 다닐 때만 해도 분홍색을 사랑했다. 가장 좋아하는 텔레토비 캐릭터는 분홍색 계열이라고 할 수 있는 빨간색 뽀였고 아무리 추운 겨울이라도 분홍색 치마를 입지 않으면 유치원에 가지 않겠노라고 그렇게 우겨댔다.


말리다 포기한 어머니는 한 번 고생해야 다시는 추운 겨울에 치마를 입지 않겠지 하는 심정으로 내가 콧물을 질질 흘리면서 치마를 입고 유치원에 가도록 놔두셨다고 한다. 그러나 분홍색에 대한 사랑은 사라지지 않았다. 옷이나 물건을 사기만 하면 분홍색이었고 가장 좋아하는 캐릭터도 거의 일관되게 분홍색의 외형을 가지고 있었다.


언제부터였을까. 잘 기억은 나지 않지만,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자 나는 분홍색을 질색하는 아이가 되었다. 사실 패션에 그리 큰 흥미가 없어서 집에 있는 걸 대충 주워 입고 나갔으나, 우연히 상·하의  모두 분홍색이 되어 친구가 “너 오늘 분홍색 옷 입고 왔네” 하고 말하면 크게 화를 내곤 했다. 나는 분홍색을 싫어한다고. 그리곤 다신 분홍색 옷을 입지 않으려고 옷장을 잘 살폈던 기억이 난다.


언제부터 분홍색을 싫어했는지 기억나지 않지만 왜 싫어하게 됐는지는 분명하게 기억난다. 누군가 분홍색과 치마를 좋아하면 공주병에 걸린 것이라고 놀려댔기 때문이다. 당시에 공주병에 대한 인식은 지금보다 더 나쁘지 않았을까 싶다. 티비에 나오는 공주병에 걸린 캐릭터는 분홍색 옷에 치마를 입고 사소한 것에서 소리를 지르며 “예민”하게 굴었다. 조금 거칠게 말하면 꼴값을 떨었다. 나는 꼴값을 떠는 아이로 인식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어느 순간부터 분홍색을 싫어하는, 공주병에 걸리지도 않았고 받들어지고 싶지도 않은 아이가 되었다. 분홍색 비슷한 “공주병”을 대표하는 색상이면 다 싫어했다. 분홍색, 빨간색, 노란색까지.


분홍색을 꺼리는 현상은 고등학생이 된 뒤에도 계속되었다. 물론 이전보다 심하진 않았지만 배경이 분홍색이 되는 필통, 옷, 가방 등은 구매하지 않았다. 이젠 누구도 분홍색의 옷을 입거나 물건은 산다고 해서, 치마를 입고 거리를 거닌다고 해서 공주병 걸렸다고 말하지 않는데도. 내가 분홍색을 싫어한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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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때와 반대로, 엄마는 내게 분홍색 옷이나 치마를 입히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나는 분홍색이 잘 어울리고, 더운 여름에 치마를 입으면 시원하고 편하다는 거였다. 굳이 싫다는 옷을 입히기 위해 나와 싸우기까지 하는 엄마가 잘 이해되지 않았다.


그렇게 몇 년. 나는 대학생이 되었다. 교복을 벗었으나 여전히 패션에 관심이 없어 조금씩 엄마가 사주는 분홍색 옷을 입기 시작했다. 어느 날 문득, 나는 분홍색이 그렇게 싫지 않아졌다. 분홍색 옷을 입고 거울을 봤는데, 어머니의 말대로 얼굴색과 제법 잘 맞았기 때문이다. 진한 분홍색은 여전히 취향이 아니었지만, 파스텔 분홍색의 포근한 느낌은 괜 보기만 해도 봄이 온 듯 간질거렸다.


그때 깨달았다. 내가 싫어하는 건 분홍색이 아니라, 분홍색 옷을 입거나 물건을 가지고 다닌다고 달라지는 시선이었다. 분홍색은 공주병 걸린 애들이나 좋아한다는 편견 가득한 한 마디가 분홍색은 무조건 덮고 싫어하도록 편견을 만들어버린 것이다.


잘 생각해보면 유치원에 다닐 때 집착하듯 분홍색을 좋아했던 것도 역시 편견 가득한 한 마디 때문이었다. 여자애는 분홍색을 좋아한다는 말. 나와 분홍색의 오랜 인연은 늘 타인의 한 마디, 달랑 한 줄의 편견에서 비롯되었다.


그 이후로 나는 내가 좋아하는 것이 진짜 좋아하는 것인지, 싫어하는 것을 정말 싫어하는지 확인해보게 되었다. 누군가에게 들었거나 내가 생각한 편견 때문에 좋아하거나 싫어한다고 생각한 것이 제법 되었다. 레이스, 노란색, 치마, 스케이트보드 등은 내가 정말로 좋아하지만 어떤 한 마디 때문에 싫어하게 된 것이었고, 프릴, 빨간색, 꽃무늬, 자수 등은 정말 취향에 맞지 않아 싫어했다. 달랑 한 마디, 달랑 한 줄 때문에 나는 내가 좋아하는 것을 정말 좋아하는지 모르고 10여 년을 살았다는 사실이 놀랍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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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나이도, 직업도, 가치관도 다른 네 명의 여자가 있다. 하지만 그들 모두 나와 같다. 고작해야 단 한 줄이 그들을 불편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연실은 남편과 싸우고 집을 나온 뒤, 두 딸과 함께 친구인 명희의 집에서 지낸다. 명희의 번역 일을 도와주면서 함께 살고는 있지만, 까다로운 명희와 사는 게 쉽지 않다. 하지만 연실에게 제일 어려운 것은 사고뭉치인 막내딸 현주를 통제하는 것이다. 연실이 ‘여자가 알아서 조심해야 한다.’며 현주를 다그치는데, 이를 말리던 맏딸 은주가 울컥 화를 낸다. 평소 착한 딸이었던 은주의 행동에 연실은 당황스럽기만 하다.


한편, 명희는 ‘책에 나오는 표현들이 불편하다’는 이유로 번역을 중단한다. 출판사에 수정을 요청했지만, 오히려 계약을 파기 당하고 만다. 이것을 알게 된 현주는 ‘문장을 바꾸자!’며 의지를 불태우고, 명희도 이에 동조한다. 반면 연실과 은주는 망설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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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습 사진



제2회 페미니즘 연극제 중 연극 ‘달랑 한 줄’의 줄거리다. 이들은 나처럼 달랑 한 줄 때문에 불편함을 느끼거나 정말 자신이 원하는 것, 좋아하는 것을 알지 못한 채 살아갔을 것이다. 그러다 어느 날, 문득 나에게 문제가 되는 것은 나 자신이 아니라 나를 막는 달랑 한 줄, 그 한 줄의 말이라는 걸 깨닫는다.


어느 때에 말은 그 어떤 벽보다 두껍게 나를 막아선다. 그러나 말은 결국 사람이 하는 것이라, 마음을 먹으면 얼마든지 바꿀 수 있다. 그래서 이 네 명의 여성은, 달랑 한 줄을 바꾸기 위해 분투한다. 그들이 들었던 한 줄은 대체 무슨 문장일까. 지금 당신에게 생각나는 한 줄이 있다면, 당신 역시 직업도, 나이도, 가치관도 다른 네 명의 등장인물에 큰 공감을 할 테다.


당신에게도 분명 당신을 막아서는 말이 있을 것이다. 남자가 울면 안 되지, 여자가 덜렁거리기나 하고, 남자가 그런 거로 쪼잔하게, 여자가 얌전하지 못하게. 비단 성별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더라도 인종, 종교, 나이 등의 이유로 수많은 한 마디가 당신을 괴롭히고 당신 자신으로 살지 못하게 한다. 그러나 고작해야 달랑 한 줄이다. 당신이 깨닫기 전에는 철골보다 무겁게 당신을 짓누르겠지만, 달랑 한 줄에 불과하다는 걸 깨닫기만 한다면, 언제든 바꾸거나 무시할 수 있다. 글을 쓰는 지금 이 순간, 자유롭게 분홍색 옷을 입고 있는 나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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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조건이라는 것은 생각보다 유동적이다. 우리가 서 있는 자리는 단단해 보이지만 사실은 무엇보다도 깨지기 쉽다. 발 딛고 서있는 바닥이 꺼지는 경험은 모두에게 발생하는 것은 아니지만 누구에게라도 발생할 수 있다. 누군가를 포함하고 누군가를 배제하는 선 긋기를 끊임없이 하고 있는 것이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사회라면, 어떤 순간 선 밖으로 밀려나는 경험을 하게 되기도 한다. 그런 일은 미리 예상할 수가 없다. 사회의 지배적 서클에 포함되어 있을 때 그 밖에 있는 사람들의 삶에 대해 상상하기란 쉬운 일은 아니다. 하지만 누군가가 ‘밖에’ 있을 수밖에 없는 구조를 만든다면, 그 ‘밖에’ 있는 것이 내가 아니라는 장담은 불가능하다.


- 장지영, 페미니즘 연극제 드라마터그



그리고 또 하나. 페미니즘 연극제 드라마터그 장지영 씨의 말을 읽으며 나 자신에게 다짐한다. 어떤 문장에 내게 해당하지 않을 때, 나는 그 말이 남을 얼마나 상처 주는지 알지 못한다. 하지만 누군가 어디서 편견에 가득한 한마디를 듣게 된다면, 어느 순간 그 청자가 내가 될 수도 있다. 그러니, 달랑 한 줄에 불과하더라도 다른 사람에게 최대한 말을 조심히 하자고. 내 입에서 나올 달랑 한 줄을 조심한다면 후에 나를 옥죄는 한마디를 듣는 일도 분명 줄어들 것이다.






달랑 한 줄
- 연대를 상상하라! 제2회 페미니즘 연극제 -


일자 : 2019.07.18 ~ 07.21

시간
목, 금 20시
토 15시, 19시
일 15시

장소 : 홍익대 대학로 아트센터 소극장

티켓가격
전석 30,000원

주최
페미씨어터

주관
플레이포라이프

제작
극단문

관람연령
만 13세이상

공연시간
70분





페미씨어터


페미씨어터는 '페미니즘 연극제 운영'과 '페미니즘 연극 제작'을 목적으로 설립됐다. 페미니즘 이슈가 사회를 휩쓸면서 페미니즘이 '여성우월주의'라거나 '남혐'이라는 등 페미니즘에 대한 오해도 늘고 있다. 그러나 페미씨어터가 바라보는 페미니즘의 목표는 궁극적인 성평등이다. 젠더 위계의 하위에 여성이 위치하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했던 사회분위기를 바꾸고, 존재조차 지워졌던 성소수자와 함께하는 것이다. 페미씨어터는 그동안 획일화 되어있던 여성캐릭터를 다양하게 표현하고, 더 많은 성소수자 캐릭터를 연극에 등장시키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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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원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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