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베르나르 뷔페 展 [전시]

눈에 보이는 세상과 보이지 않는 세상 이 둘을 모두 그려낸 작가, 베르나르 뷔페
글 입력 2019.07.04 0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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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좋았다..! 다른 생각을 완전히 안했다면 그건 거짓말이고, 전시회 출입구를 향해가면서 베르나르와 그의 작품에 흠뻑 빠졌다. 이런 기분은 오랜만이다. 하나하나 모두 소중하고, 보는 것이 아까웠다.

사실 전시를 직접 마주하기 전까진, 그의 작품들은 모두 암흑적이고 우울할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이는 나의 큰 착각이었다.

날카로운 선, 어두운 색감은 내가 본 그의 그림 전반에서 큰 특징으로 나타났지만, 그림의 주제라 해야 하나, 유형이라 해야 하나 쨋든 그림의 범주가 매우 다양했다. 자화상을 그리기도 하고, 그의 영원한 동반자 베르나르 애나벨의 초상화를 그리기도 하고, 이 외에도 전 세계의 건축물들, 자동차 등등 정말 많은 것들이 그려냈다.

작가가 글을 통해, 영화감독이 영화를 통해 자신의 생각을 표현한다면, 아마도 베르나르는 그림을 통해 자신의 모든 것을 표현해낸 것 같다.

베르나르 뷔페, 한 사람의 인생 여정을 따라가듯 전시는 시기별로 나눠져 있었다. 사진촬영이 불가해 카메라에 담진 못했지만, 전시 중반에 나를 포함한 관람객 분들이 잘 이해하실 수 있게끔 년도를 나눠 그의 예술 활동과 중요하다 할 수 있는 일들이 간략하게 정리돼 있었다. 이 덕분에 전시 중반에 살짝 길을 잃었었는데, 다시 잘 찾아올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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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색다른 점이 있었다. 그건 바로 중간 중간에 베르나르 뷔페의 아내이자, 작가인 '애나멜 뷔페'의 설명이 걸려 있었다. 정말 한 작가로서, 남편으로서, 친구로서 베르나르 뷔페란 한 사람과 가장 가까이에 있는 사람이기에 알 수 있는 이야기들이 들어있었다.

이는 애나벨 뷔페가 본 예술가로서 베르나르 뷔페의 모습이다.


우리는 당신이 죽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잘못 알고 있었다. 당신은 살아 있었다. 당신은 20세도 안되었지만 당신은 이미 인간의 고통을 마주하고 있었다. 당신의 그림에 이미 그것이 배어있다. 우리는 같은 나이였고 그리고 나는 어른들의 세계에 관한 무지함으로 상처받은 청년이 어떤 것인지 알고 있다. 당신은 우리 세대의 많은 젊은이들이 하는 것처럼 다른 방법으로 저항하며 아우성을 칠 수도 있었다.

당신은 화가로 태어난 것 같다. 당신은 우리에게 당신의 외로움, 믿음, 사랑, 살아있는 모든 것들과 자연에 대해 그리고 무엇보다 인간의 물질적 도덕적 참담함과 마주해 비탄을 이야기하기 위해 아주 자연스럽게 이미지를 선택했다.


전시 초반을 장식하는 뷔페의 그림들은 모두 죽은 듯한 느낌이다. 뭐라고 해야할까. 후의 작품들에 비해, 선들이 굉장히 투박하고 고르지 않다. 그리고 작품 속 인물들은 하나같이 정면을 응시하지 않고 있다. 그렇다고 초롱초롱하게 어딘갈 응시하는 건 아니다. 우리가 멍 때릴 때처럼 다들 눈빛이 '멍'하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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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utoportrait au chevalet, 이젤과 초상화, 1948


베르나르의 초기작품들은 왜 이런 분위기를 띠는지 곰곰이 생각해보면, 2차 세계 대전 직후라는 시대적 배경과 아주 밀접하게 연결돼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많은 사람들에게 엄청난 육체적 정신적 고통을 안겨준 이 거대한 전쟁을 겪은 사람들의 모습이 아닐까.

또한 전시 설명서를 읽어보니, 전쟁이 끝난 지 얼마 안 된 때라 뷔페는 그림을 그릴 수 있는 재료를 찾기가 어려웠다고 한다. 그래서 매우 적은 물감으로 벽에 박혀 있는 천에 그림을 그린 뒤 널빤지나 빗자루를 고쳐 만든 틀에 고정하여 어렵게 어렵게 액자를 만들었다고 한다. 이런 재료의 부족과 그리고 전쟁을 온 몸으로 겪고, 바라본 뷔페의 마음 속 이야기와 만나 이런 작품들이 탄생한 것 같다.

그리고 한 가지 매우 인상 깊었던 건 다름 아닌 '생선(물고기)'였다. 뷔페의 그림들엔 유독 생선들이 많이 보였다. 밑의 두 번째 그림은 '닭을 들고 있는 여인'이다. 생선은 아니지만 생선과 마찬가지로 어떤 여인에 의해 죽었다. 이렇게 생명체들은 살아있지 않고 죽어있다.

'죽음'이란 주제는 베르나르 뷔페가 생을 마감할 때까지 그와 함께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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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선장수, 1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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닭을 들고 있는 여인, 1947


죽음은 우리에게 본능적인 두려움이기 때문에 거의 거론되지 않는다. 그런데 왜 베르나르는 그의 연례 전시 주제로 죽음을 선택했을까? 도전이었을까? 그는 그가 선택한 주제에 대해 아무런 설명도 하지 않기 때문에, 내가 하는 해석은 추측일 뿐이다.

우리는 가장 끔찍한 시대를 살고 있다. 천재지변 집단 학살 어리석은 전쟁들 교통사고 이런 모든 폴력 행위들이 많은 사람을 죽이고 있고, 일상처럼 아무렇지 않게 신문 일면을 장식하며 연이어 보도된다. 더 최악의 일들도 벌어진다. 우리가 좋아했던 사람들 혹은 알고 지내던 사람들이 이 세상을 완전히 떠나는 것이다. 이때 우리 나약한 인간들은 죽음에 대해 충격을 받는다. 바로 이점에서 베르나르는 영감을 얻었 을 것이다.

해골을 통해 그려낸 죽음 시리즈에서 엄청난 기량과 데싱과 마티에르그 강렬한 힘으로 분출되고 있다. 아름답게 치장을 하고 다색의 새와 함께 있는 그들은 죽음으로 인한 슬픔을 모른척하려 한다.

그들은 죽기 마련인 우리가 느끼는 두려움을 비웃으며 불쌍하다는 듯이 바라보고 있다어떤 이들은 죽음의 상징인 해골은 붉은 심장을 갖고 있는 이 그림들을 도발로 볼 수 있겠다. 그러나 신의 선택인 죽음은 우리를 향해 열려있는 문들을 통과해 다른 곳으로 가는 것이라고 이야기하는 베르나르만의 방식이다.

- 애나벨 뷔페


해골 .jpg
복장 도착 해골, 1999



새로운 시작!

1950년 중반을 넘어 오면서, 뷔페의 그림은 기술적인 발전을 이뤘다고 한다. 정말 찬찬히 살펴보니 꾸덕하다란 표현이 옳은 진 모르겠지만, 물감을 겹겹이 쌓아 올린 그림들이 많았다. 점점 색감이 더욱 뚜렷해지고, 보다 구체적으로 변해갔다. 무엇보다도 도르라졌던 특징은 '각지고 날카로운 선'이었다.

개인적인 생각으론, '건축물'을 그린 작품들에서 이 각진 선들이 진가를 발휘한 것 같다. 그는 뉴욕에 있는 거대 빌딩들을 그리는 한 시리즈를 작업했었는데, 그림 속엔 뉴욕시의 거대하고 높은 건물들이 아주 정갈히 각진 선들로 그려져 있었다. 아니 사실 그림들에 사실 난 눈을 한참 동안 못 뗐다.

애나벨은 이 시리즈에 대해 "이 빌딩들은 거대라고 멋지며 심지어 장엄해 보이지만, 혼자 외롭게 서있는 수호자인 자유의 여신상이 밝혀주는 유토피아에 비인간적으로 자리 잡고 있을 뿐이다." 라고 말하는데, 마음으론 적극 공감하면서도, 눈은 계속 거대하고 멋진 이 빌딩의 '까맣고 올곧은 선'들로 향했다. 평소에 각에 집착 하는 성격도 아닌데, 잠시 홀렸다. 왜인진 모르겠지만, 좋았다. 이 밖에도 세계 곳곳의 유명한 건축물을 이렇게 각진 선들로 그려 넣었다.



자화상

뷔페 자신을 그려 넣은 작품이 또 굉장히 많았다. 전시 설명에 따르면 '뷔페는 평생에 걸쳐 자화상을 그려 넣었는데, 현대미술에선 흔치 않은 특징'이라 한다. 왜 그렇게 많은 자화상을 그렸을까. 사실 그의 자화상을 보면, 그의 아내 '애나벨 뷔페'의 초상화와는 사뭇 다르다.

또 언뜻 보면 자화상인가 싶다. 뷔페의 자화상은 자신이 그려낸 눈빛이 공허하고 멍한 그 인물들과 비슷하다. 그들과 같이 여전히 시선은 정면이 아니라, 뭔지 모를 곳을 향하고 있다. 입은 살짝 벌리고, 그 안에 이빨들이 조금은 무섭게 보인다. 위에서 보이는 '베르나르 뷔페'의 겉모습과는 전혀 닯지 않았다.

아마도 뷔페가 그린 자화상은 눈으로 보이는 그의 겉가죽이 아닌, 그의 마음을 그려낸 게 아닐까. 그의 마음(내면)이 어땠는진 나도 잘 모르겠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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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nabel en robe du soir, 이브닝 드레스를 입은 아나벨. 19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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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화상, 1964


이렇듯 그의 그림들은 참으로 한결같이, 먹구름 색깔이지만 너무나 다양하다. 전시회를 거닐면서, 그림만 보고 있을 뿐인데 작가가 시기별로 어떤 것에 흥미를 가졌었고, 또 어떤 기분이었는지 느껴지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난 그와 한 마디를 나눈 적도 없고, 심지어 그에 대한 공부를 한 적도 없고, 고작 수많은 작품중 몇 점을 본 게 다일 뿐인데 말이다.

그의 인생을 저 넘어 유리창으로 들여다 본 기분이였다. 이런 느낌을 나란 관객에게 가져다준데는, 글 속 애나벨도 한 몫 했다. 정말로 베르나르는 꾸밈없이, 있는 그대로 현재 자신이 보고, 느끼고, 생각한 모든 것들을 그림 속에 최대한 녹여해고자 한 인물인 것 같다. 진짜 그림을 사랑하나보다. 무언갈 인생이란 긴 여정 속에서 이렇게나 오랫동안 심취해, 자신의 모든 걸 바칠 수 있다니 부럽다.

뼈 속까지 화가인게 분명하다. 그는 1999년 10월 4일 파킨슨 병으로 더 이상 그림을 그리지 못하자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그에게 있어 '그림'이란 인생 전부이고, 자신의 영혼 그 자체가 아니었을까. 그림을 그리지 못하는 자신은 죽은 존재일 뿐이 였던 것이 아닐까하고 조심스레 생각해본다.


[이선희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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