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홍콩영화 촬영지를 가다(1) - 사랑하는 영화 [여행]

글 입력 2019.06.29 2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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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콩 영화 촬영지를 가다(1) - 사랑하는 영화(무간도)

홍콩 영화 촬영지를 가다(2) - 사랑하는 순간(첨밀밀, 중경삼림, 아비정전)


2019년 4월 4일, 홍콩을 향했다.

홍콩에서 무엇을 할 것인가. 사람들이 바글거리는 유명 관광지에서 인증샷을 남기고, 각종 SNS로 뜨거운 인기 식당에서 줄 서가며 밥을 먹는 여행은 원치 않았다. 혼자일 땐 더욱이 그랬다. 홍콩은 그 작은 면적만큼이나 여행자의 선택지가 많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낮에는 쇼핑을 하다가 간식으로 에그타르트를 먹고, 휘황찬란한 야경(Symphony of light)을 기다리는 판박이 일정만 떠올랐다. 계속된 고민 중에 누군가는 디즈니랜드로, 누군가는 초고층 호텔에서, 또 누군가는 리펄스베이에서 일광욕을 즐기는 각자의 홍콩을 들려주었다. 나 또한 나의 홍콩을 원했다.

영화 촬영지를 찾기로 했다. 홍콩 영화를 유독 좋아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인생 영화 중 하나로 항상 <무간도>를 꼽았고, <첨밀밀>을 즐겨봤다. 왕가위의 영화도 인상 깊게 보아왔다. 사랑하는 영화가 있고, 사랑하는 장면들이 있었다. 그곳을 찾는 이유는 이것으로도 충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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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시인의사회>,<인셉션> 그리고 <무간도>. 베스트 영화를 묻는 말의 대답은 언제나 똑같았다. 이 영화들 이후로도 수많은 명작을 만났지만, 답은 언제나 한결같았다. 앞으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인생 최고의 영화라기보다는 첫사랑이라는 수식어가 더 잘 어울릴 듯하다. 세월과 무관하게 '어떤 것'으로 정의 내려질 수 있는 것들.

<무간도>를 처음 본 게 언제인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확실한 건 이 영화 덕에 누와르라는 장르를 좋아하게 됐고, 양조위와 유덕화를 만났다. 누군가가 말하길 유덕화는 자신이 맡은 배역과 끝없이 경쟁하려는 사람이라면, 양조위는 자신이 맡은 배역과 사랑에 빠지는 타입이라고 했다. <무간도>의 유건명(유덕화)과 진영인(양조위)이 딱 그러했다.

*

가장 먼저 방문한 곳은 도심과 멀찍이 떨어진 남생원이라는 곳이었다. <무간도2>에서 메리(유가령)가 숨어 지내던 곳으로, 청년 유건명(진관희)의 어긋난 바람이 직접적으로 드러나고 꺾이는 곳이기도 하다. 작은 쪽배를 타고 물을 건너자 늪지를 따라 늘어선 오래된 폐가가 보였다. 잔물결 하나 없는 호수 뒤로는 갈대밭이 펼쳐졌다. 작은 새소리가 공간을 가득 메웠다. 마천루와 사람으로 빽빽한 홍콩 도심과는 너무나도 상반된 장소. 경찰과 조폭 사이 아슬한 줄타기로 위험에 처한 인물이 숨어 지내기엔 최적이었다.

청년 유건명은 원하는 바를 얻지 못한 채 남생원을 떠난다. 불안정한 마음을 대변하듯 옅게 흔들리는 카메라만이 그의 뒤를 쫓는다. 영화<아비정전>에서도 비슷한 장면이 나온다. 평생을 그리던 어머니를 끝내 마주하지 못하고 떠나는 아비(장국영)의 뒷모습 또한 이러했다. 얼굴을 내비치지 않는 어머니에게 아비 자신 또한 그러하지 않겠다며 두 손을 꽉 주먹 쥔다. 다시 돌아올 일은 없을 거라는 독백과 함께 슬픈 걸음을 옮긴다. 관객에게조차 얼굴을 숨긴 채 꿋꿋이 멀어지는 그의 등은 설움, 분노, 체념 그 어떤 말로도 설명하기 어렵다.

반면에, 유건명은 남생원을 걸어 나오다 뒤를 한 번 돌아본다. 무엇이 그를 뒤돌아보게 한 걸까. 미련 가득한 얼굴은 아쉬움으로 가득하고 발걸음은 무겁기만 하다. 상처를 품은 채 외로이 뻗은 길을 따라 멀어지는 뒷모습은 비단 이들만의 것은 아닐 것이다. 그렇기에 더욱더 안타깝게 느꼈을지도. 나의 뒷모습은 어느 쪽에 더 가까웠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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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세 편의 무간도 중 <무간도1>을 단연 최고로 뽑는데, 그 이유는 양조위가 연기한 진영인 때문이다. 나쁜 사람을 연기해야 하는 착한 사람과 착한 사람을 연기해야 하는 나쁜 사람 중 전자를 응원하는 건 당연했던걸까. 나는 언제나 진영인의 편에 서 있었다. 그가 위기에 처했을 때 서스펜스를 느꼈고, 그의 비극에 카타르시스를 느꼈다.

영화 초반부 마약 거래를 둘러싼 대립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장면 중 하나다. 부드러우면서도 숨 막히는 전개로 단숨에 영화에 집중케 함과 동시에, 조직에 숨어든 첩자와 경찰에 숨어든 첩자의 존재가치를 명확히 증명한다.

이곳에서 모스부호가 처음 사용된다. 커다란 비밀을 지고 사는 이들에게 이만큼 적합한 언어가 있을까. 모스부호는 이후로도 몇 번이나 등장하는데 <무간도3> 마지막 장면이 특히 기억에 남는다. 평생 자신을 숨기고 남을 속여온 유건명은 마침내 자신조차 속이기에 이른다. 진실과 현실을 잊은 채 허공을 응시하는 멍한 눈동자와는 달리 그의 손가락은 그럼에도 바삐 움직이고 있었다.

또 하나의 좋아하는 장면은 진영인의 정체를 아는 이들이 하나둘 세상을 떠나는 순간이다. 어두운 골목 사이에서 외로운 경례로 경찰학교 교장을 떠나보낸 그는 눈앞에서 죽은 황국장(황추생)에 모든 것이 무너진 표정을 짓는다. 일반적으로 사람은 타인으로부터 자기 자신의 존재를 확인한다고 한다. 두 사람이 기대고 있는 모습의 '사람 인(人)'이나 관계를 뜻하는 '사이 간(間)' 또한 이와 무관하지 않다. 더욱이나 진영인의 경우 진짜 신분을 아는 사람은 교장과 황국장 뿐이었다. 그는 그들의 죽음에 대한 슬픔을 넘어 자신의 정체성 상실을 느꼈던 걸지도 모른다. 머리를 쥐어뜯으며 어쩔 줄 몰라 하던 그의 표정을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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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여행에서 가장 가고 싶었던 장소는 <무간도>의 시작과 끝에 등장하는 오디오 가게이다. 두 주인공의 처음이자 마지막인 평범한 조우. 채금의 피유망적시광이 흐르는 이 공간에서 <무간도>를 몇 번이나 곱씹었다.

*

<무간도>에서 빠질 수 없는 장소인 옥상에서는 탁 트인 푸른 하늘만큼이나 거짓이 없다. 진영인 생전 그곳에서만큼은 숨김없는 경찰이었다. 공동묘지에는 진영인을 그리워하는 이들로, 혹은 비석에 적힌 글자로 영원히 경찰로 남았다.

그 밖에, 서류 봉투로 다리를 툭툭 치던 유건명을 쫓던 영화관, 한침(증지위)이 최후를 맞이하는 주차장 등 가보고 싶었으나 가지 못한 장소가 많았다. 여행을 하다 보면 시간에 쫓기거나 혹은 별별 이유로 가지 못한 곳들이 생기기 마련이다. 이것들이 다음에 이곳을 다시 찾을 이유가 되기도 한다는 점을 떠올리며 당장의 아쉬움을 털어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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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은 언제나 새로워야 한다고 생각했다. 가보지 못한 도시에서 새로운 친구와 처음 먹어보는 음식을 함께 나누는 모습을 그렸다. 지금껏 내가 걸어온 길과 가장 이질적인 길을 탐험하고자 했다. 그것이 진정한 여행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이번 여행은 조금 달랐다. 홍콩이라는 나라는 처음 가보는 곳이었지만, 너무나도 익숙했다. 조밀한 아파트, 무질서해 보이는 군중, 말끝을 길게 빼는 특유의 억양, 무겁고 습한 공기는 스크린 속에서 수십 번은 만났던 낯익은 광경이었다. 마치 오래 알고 있던 친구를 만나는 친숙한 기분이었다. 여행은 새로운 것을 찾기 위해서기도 하지만 오랜 추억을 방문하기 위한 것이기도 했다. 나는 홍콩에서 추억을, 오랜 친구를, 그리고 첫사랑을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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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영동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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