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손님들, 내면의 진실을 밝히는 불편한 손님들

글 입력 2019.06.21 2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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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난히 남기고 가는 것들이 많은 작품들이 있다. 이를테면, 마지막 장을 넘겨도 계속 문장이 입안에서 맴도는 소설, 엔딩 크레딧이 다 올라간 뒤에도 쉽게 자리에서 일어날 수 없는 영화, 전시장을 빠져나가도 어른거리는 그림, 공연장을 빠져나와 집으로 가는 길에 어쩐지 자꾸 뒤돌아보게 되는 연극.


지금 국립극단 소극장 판에서 하고 있는 <손님들>역시 내게는 이런 작품이다. 작품이 끝나고 난 뒤, 소극장 판을 나온 후에도, 서울역 지하철에 오를 때까지 등장인물들의 목소리와 모습이 쉽게 잊히지 않았다.

연극은 식탁에 앉은 소년이 '다녀왔습니다'라고 소리치며 시작된다. 식탁 너머 의자에 가만히 앉아 있던 소년의 어머니와 아버지는 소년의 목소리에 반응한 듯 움직이기 시작한다. 그런데 이들의 외형이 심상치 않다. 머리는 잔뜩 헝클어져 있고, 눈에서는 피가 흘러나오고 있으며, 피부는 창백한 빛을 띄고 있다. 이들이 살아있는 상태가 아니라는 것을 금방 알아챌 수 있다. 이상한 점은 이뿐만이 아니다. 보통 부모가 지시하고, 아이가 따르는 형태로 권력관계가 구성되어 있는 평범한 가족과 달리, 이 가족은 소년의 지시에 따라 어머니와 아버지가 움직이는 것처럼 보인다.


소년은 이 기묘한 가정에 손님들을 초대한다. 어미가 버려 3단지에서 홀로 살아가던 고양이 '3단지', 초등학교 화단에 앉아 학생들의 괴롭힘을 묵묵하게 참아내고 있는 조각상 '오뎅', 집 뒷산 무너저버린 무덤에서 살고 있는 '동수 아저씨'까지. 부모는 물론이고 손님들까지 살아있는 존재라기보다는 유령에 더 가까운 관념적인 존재들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쯤 되면 그들이 서 있는 집도 현실로 존재하는 공간이라기보다는 가상 세계가 아닐까 의심하게 된다. 이 기묘한 환상 속에서 소년이 원하는 것은 단 한 가지다. 부모와 함께 손님들을 잘 대접하는 것, 하지만 결국 초대는 실패로 끝나고 손님들은 집을 떠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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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 이 손님들은 어떤 존재이며, 왜 소년은 죽어버린 부모와 함께 손님들을 맞이하고 싶어 했던 걸까?


손님의 사전적 의미는 외부에서 온 사람을 가리키는 높임말이다. 때문에 '3단지;,'어묵','동수 아저씨' 모두 집 밖에서 온 외부인의 모습을 하고 있다. 하지만 소년이 부모의 학대를 견디다가 그들을 살해했다는 사실이 연극의 말미에 밝혀진 이후엔 그들이 과연 외부인일까. 하는 의문이 든다. 손님들의  사연을 잘 곱씹어 보면, 손님들은 부모의 학대에 대한 소년의 방어기제를 형상화한 존재처럼 보인다.


소년은 부모의 학대(유기라고도 느껴질 수 있는)에 대해서 그 누구도 미워하지 않는 태도를 보이기도 했다가(3단지), 왜 부모가 자신을 학대하는지 곰곰이 생각하기도 했다가 (오뎅), 이 세상이 아닌 곳으로 떠나고도 싶었을 것이다(동서 아저씨). 따라서 소년이 본인과 동일시할 수 있는 이 존재들을 집으로 초대해, 그들의 이야기를 모두에게 들려주고자 하는 것, 그리고 그들을 잘 대접하고자 하는 것은 인정받고, 대우받고 싶던 소년 본인의 욕망이 투영된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즉 소년은 가정폭력에 시달렸던 현실, 끝내 부모를 살해한 현실에서 벗어나 자신이 권력을 쥔 가상세계를 만들어 손님들을 초대해 자신의 입장을 설명하고, 이를 통해 부모의 인정과 사랑을 받고자 한다. 그러나 위에서 언급했듯이 이 시도는 실패로 끝난다. 그것은 아마도 그들이 진정한 의미의 '손님'이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소년은 자신 가정의 문제점을 목격하고 고쳐줄 수 있는 타자를 원했으나, 그들은 결국 소년의 내면을 형상화한 내부인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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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시에 이야기가 진행되는 곳과 그 속에 속한 구성원들이 가상의 공간과 존재라는 점도 눈여겨봐야 한다. 이들은 현실에 영향을 끼칠 수 없다. 이미 죽어버린 부모는 소년의 기억 속에 남아 있는 모습에서 변하지 못한다. 계속해서 서로를 헐뜯고 미워한다. 소년이 구성한 가상세계 속에서 소년의 계획에 따라 움직이고 즐거워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소년이 시선을 떼는 순간, 바뀌지 않는 차가운 현실이 되어 무표정으로 멍하니 소년을 바라보고 있다.

결국 손님들은 외부에서 오는 희망, 빛을 차단하며 집을 떠난다. 소년이 유일하게 접촉하는 외부인이자 실재하는 존재인 '소녀'도 결정적인 도움을 주진 못한다. 소년이 사랑하는 소녀는 소년에게 희망을 주는 존재다. 하지만 이 둘의 만남은 현실도피처럼 보인다. 둘이 즐겁게 마을을 뛰노는 순간에도, '동수 아저씨'가 따라붙지만 소년은 소녀에게 솔직해질 수 없다. 결국 소녀는 끝까지 '손님'의 자격을 확보하지 못하고 극을 떠난다.


이제 소년의 실패가 여과 없이 폭로된다. 이미 과거에 소년은 부모에게 인정과 사랑을 받기에 실패했으며, 가상세계 속에서의 처절한 구애도 외면당한다. 관객들은 이 실패가 절대적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아무리 시간을 반복해도 소년과 부모의 관계는 회복되지 않는다. 그러나 소년은 포기하지 않는다. '다녀오겠습니다'하는 인사와 함께 실패로 끝난 가상세계를 떠나고, 다시 '다녀왔습니다'하는 인사와 함께 새로운 가상세계를 연다. 시간이 반복된다.

<손님들>은 출연 배우들의 뛰어난 연기력, 그로테스크한 그래픽 노블을 연상시키는 효과적인 연출, 안정적인 무대와 분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때문에 먼저 그쪽에 먼저 집중하게 된다. 더불어 연극은 정교한 은유를 활용해 서사 속 의미를 관객이 유추하게 하기 때문에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은 건지 직관적으로 파악하기 힘들다. 소년이 왜 손님들을 초대하게 되었는지, 손님들이 풀어내는 이야기의 의미는 무엇인지 공연을 보면서 바로 파악되기보다는 시간이 지나면서 천천히 알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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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왜 직관적인 방법을 택하지 않고 은유라는 방법을 활용했을까.

때로는 명확한 단어가 의미 전달을 방해할 수 있다. 내 '슬픔'과 너의 '슬픔'은 다를 수 있기 때문에 내가 '슬프다'라고 말해도 그 감정이 온전히 전달되지 않는 것이다. 이와 같은 언어의 한계성이 있기 때문에 때로는 '설명하기'보다는 '보여주기'가 더욱 의미 전달에 효율적일 수 있다. 특히 인간의 마음과 같은 추상적인 대상, 혹은 이 연극의 기반이 되는 존속살해와 같은 예민한 주체처럼 전달하고자 하는 것들이 도덕관념 등에 의해서 훼손될 수 있는 경우가 더욱 그렇다.

이처럼 연극 <손님들>은 관객이 이야기 너머에 있는 의미를 탐구하도록 유도한다. '보인'것이 과연 어떤 것을'설명'하고자 했는지 계속 생각하게 한다. 정확한 답은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우리의 감상은 더욱 깊어질 수 있다. 존속살해자라는 끔찍한 이름에 막혀 보지 못할 수 있는 가정폭력 피해자로서의 소년의 마음을 잠시나마 이해할 수 있고, 주관적인 경험과 지식에 따라 의미의 겹이 끊임없이 두터워질 수 있다.

이 연극의 여운이 깊었던 것은 우연이 아닐지도 모르겠다. 끊임없이 반복되는 시간 속에 스스로를 가둔 소년이 언젠가는 본인을 놓아줄 수 있기를 바란다.



[권묘정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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