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실한 농부, 그가 참혹하게 죽은 이유는?

남자, 칼을 들다.
글 입력 2019.06.19 10: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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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욕심을 버리지 않으면 쥐새끼한테 눈알을 파먹힌다는 영화가 있다. 바로 <1922>. 넷플릭스에서 만들어진 작품으로, 스티븐 킹의 동명 소설이 원작이다. 내용은 이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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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2년 한 남자가 살았다. 그는 농부 일이 천성이라고 생각하며 온 몸이 빠개져라 일한다. 이런 말을 읊조리면서.


땅과 아들은 남자의 자존심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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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어느 날 시련이 닥쳤으니, 아내가 도시로 나가자고 한 것이었다. 그녀는 더 이상 촌년으로 살 수 없다며, 자신은 원래 세련되고 당당한 도시여성이었다고 주장한다. 주인공은 무슨 개소리냐고 무시하지만 아내는 더욱 완고해져서 이런 말까지 하기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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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 땅의 절반은 내 거지? 내가 시집올 때 가져온 거잖아. 그러니 내놔. 난 도시로 가야겠어.



주인공은 점점 열불이 나기 시작하고 달래 보며, 위로도 하고, 겁박까지 하지만 사태는 점점 악화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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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살해를 결심하는 주인공. 아들까지 꼬셔서 함께 아내를 죽인 후 시체를 우물가로 가져간다. 그리고 물이 말라 텅 비어버린 터에 골인, 들쥐가 그녀를 파먹는 모습을 쳐다본다. 곧 온 몸이 떨리며 두려움으로 숨이 막히......기는 개뿔, 두 주먹을 꽉 쥐고 환호성을 지른다.


오예! 드디어 죽었어! 내 땅을 뺏으려는 간악한 년을 드디어 헤치웠다고!



하지만 영화는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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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이 죽어버린 것. 임신한 여자 친구와 함께 도망쳤던 아들은 온갖 고생이란 고생은 다 하고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 또한 아내의 환영, 그녀를 파먹었던 들쥐들의 모습에 힘겨워하던 주인공도 참혹한 최후를 맞이한다. 그 쥐새끼들한테 손까지 뜯어 먹힌 후 아내, 아들, 아들 여자 친구의 귀신에게 죽임을 당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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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장면에서 원래 아내와 거래하려던 업자가 나오는 부분은 그래서 인상적이다. 애초에 아내는 땅의 절반, 그러니까 자신이 소유한 것을 업자에게 팔려고 했으나 주인공에게 죽임을 당하는 바람에 무효가 되었었다. 하지만 결국 주인공까지 죽고 나자 애초의 그 업자에게 돌아갔던 것. 한마디로 별짓거리를 다 하며 자기 것을 지키려했지만 아무것도 안 하느니만 못한 결과가 초래된 것이었다. 이 영화를 본 후 나의 입맛은 썼다. 작금의 현실을 반영하고 있었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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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 동안 한 우물만 내리 팠다. 남들보다 늦게 대학에 입학하긴 했지만 열심히 달렸고, 그 과정에서 칭찬 아닌 칭찬도 많이 들었다. 넌 재능이 있다고, 그것은 더욱 반짝반짝 빛나서 널 승자들의 세계로 데려다 줄 거라고.

하지만 인생은 뜻대로 되지 않는 것인지 병으로 5년을 누워있었다. 원래 늦었던 인생은 더 늦어졌고, 정신을 차렸을 땐 남은 것이 하나도 없었다. 다급한 마음에 손에 잡히는 대로 도전했지만 하는 것마다 망했다. 밝게 빛나던 청춘은 음습한 구석만 찾아들어가는 쥐새끼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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억울했다. 속에서 뜨겁고 검은 물이 울컥울컥 올라오는 듯 했다. 난 이런 사람이 아닌데, 난 성공해야 마땅한 사람인데. 신경은 더욱 날카로워졌고 모든 것이 짜증스러웠다. 그 과정에서 본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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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부는 내게 이런 말을 해주는 것 같았다.


정말? 정말 그것이 네 것이었을까? 네가 갖고 있다고 생각한 재능, 열심히 노력했다며 자부한 시간, 남들보다 우월하다며 지었던 미소까지 원래부터 네 것이 맞았을까?



난 우두망찰해졌다. 당연하지! 그것들은 처음부터 내 것이었어. 내 성취들을 봐. 아프기 전까지만 해도 많은 사람들에게 증명 받았던 상패들을 보라고. 하지만 마음의 소리는 또 이런 반문을 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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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의 주인공도 그랬어. 땅이 자기 것이라고 생각했지. 아내와 공동 소유였는데 말야. 만약 주어진 것에 감사했다면 어땠을까. 아내 것도 본인 것이라고 생각하지 말고 지금껏 아내 땅으로도 농사를 지었던 것에 감사, 그녀가 원하는 대로 반을 떼어주었다면 비참한 최후를 맞았을까?



하지만...... 나는 재반박하고 싶었으나 고개를 저었다. 틀린 말 같지 않았으므로. 내가 20대 시절 받았던 그 모든 관심은 그저 운이 좋아서, 혹은 감사하게도 주어진 것들이 맞았다. 어쩌면 과거는 추억이라는 이름으로 미화되기에 실제보다 더욱 과장해서 기억하는 것인지도 몰랐고, 칭찬은 빈말일 수도 있었다. 그러므로 그 모든 것이 애초부터 내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인정하는 순간부터 새롭게 시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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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우의 <검은 고양이>가 생각났다. 공포 소설의 효시로써, 19세기에 지어진 것이지만 지금까지도 회자되는 수작. 짧게 내용을 설명하자면 이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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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고양이를 싫어한다. 자꾸만 ‘나’를 쫓아다니며 내 행동을 방해하기 때문에. 마침 술도 먹었겠다, 짜증도 많이 났겠다, 나는 그 고양이를 죽인다. 하지만 계속 고양이 환영을 보는 등 죄책감에 시달리고, 사죄의 의미로 그 고양이와 비슷한 고양이를 데려온다. 이번에야 말로 사랑으로 키우며 예뻐하기 위해서. 하지만 지 버릇 개 못 준다고 또 죽인다. 그 과정에서 아내까지 죽이고 결국 ‘나’는 아내와 고양이의 환영 때문에 스스로 파멸한다. 아내를 죽였다는 점이나 그 죄책감을 고양이의 환영으로 본다는 점 등이 앞에 소개한 <1922>와 비슷하지만 나는 여기서 욕심에 주목했다.

<검은 고양이>의 주인공은 그것을 참을 수 없는 혐오감, 고양이를 죽이고 싶은 파괴욕구로 표현했지만 가장 원초적인 감정은 욕심이었던 듯 싶다. 나를 나로써 존재할 수 없게 하는 것, 내 행동에 제동을 거는 방해물. 오롯이 나만 존재하야 할 세계에 갑자기 끼어들어서 삶을 갉아먹는 괴물을 단죄하고 싶은 마음.

욕심은 영혼을 잠식한다. 더 나아가 내 주위까지 침식해 들어간다. ‘내 것’을 주장하다가 ‘나’를 잃고 ‘나 의외의 것’까지 파멸시키는 무서운 존재. 그 무소불위의 힘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내 것’이었던 그것들이 정말 ‘내 것’이 맞았는지, 어떤 절차로 내게 흘러 왔는지를 더듬어보아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우린 때때로 감사하고, 주어진 것에 고개 숙이며 살아갈 수 있지 않을까. 욕심을 대항하는 마지막 보루인 겸손에 대해서 생각해봐야 할 것 같다.
 

[이진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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