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제가 왜 참아야 하죠? [도서]

참지 않는 진돗개가 되기 위하여.
글 입력 2019.06.08 2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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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저자는 10년 전, 존경하던 회사 사장에게 성추행을 당했다. 알고 보니 그 사장은 저자 말고도 총 5명의 여직원을 성폭행한 상습성폭력범이었다. 고심 끝에 저자는 여직원들의 중심에 서서 고소를 진행한다. 이 책은 표면적으로 성범죄자를 처벌한 고소 후기이지만, 성범죄에 대응해야 할 여성을 위한 메뉴얼책이다. 더불어 왜 그런 일들이 여성에게 벌어지는지, 그 원인을 찾고 피해 여성이 비난받는 한국 사회의 여성 혐오 사상과 관습을 꼬집는다.

책은 총 3부로 나뉘는데 1부는 미투 운동을 통해 한국 사회의 성범죄와 근본적인 원인을 이야기한다. 2부는 저자의 경험을 바탕으로 성범죄에 대응하는 법적 절차를 설명하고 메뉴얼을 소개한다. 더불어 2차 가해와 '피해자다운 피해자'라는 전형이 생긴 배경을 설명한다. 3부는 일상에서 일어나는 데이트 폭력이나 몰카 범죄에 대한 대응 방법이다.



제가 왜 참아야 하죠?


내가 이 책을 보게 된 계기를 설명하자면, 한 동아리에 가입했던 스무 살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 동아리는 여자가 단 세 명 뿐인 남초였다. 나는 동아리 활동을 하던 중 이상한 일을 겪었다. 수많은 남성 회원들이 세 명의 여자 회원의 외모 순위를 매기고 그 순위를 당사자 앞에서 당당히 공개하는 아주 당황스러운 일이었다. 여성 회원의 순위를 매겼다는 자체가 우습지만, 가장 열이 받는 건 우리가 나름 친했단 사실이다. 그간 동기들끼리 술잔을 부딪치던 밤이 꽤 많았는데 뒤에 가서 저들끼리 여자애들 외모 순위를 매겼다니. 그들에게 우리 셋은 동등한 동기가 아닌 여성이었고 그들의 술안주였다. 점입가경으로 동아리 선배는 내게 변명을 한답시고 “그래도 네가 다리는 제일 예쁘대.” 하더라. 단순히 나의 분노가 내 외모 순위에 만족하지 못해서 였다고 생각했을까. 대단한 발상이다.

내가 화가 난 지점은 그게 아니었다. 상처를 받지 않았다면 거짓말이지. 그러나 그들이 매긴 외모 순위에 내가 몇등을 했는지는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그들에게 대상화된 상태로 도마 위에 올라 품평을 당했다는 사실이 환멸 났을 뿐. 친구라고 생각한 이들을 향한 실망과 비참함에 우울했을 뿐이었다. 이런 내 기분을 알지 못하고 덧붙여 성희롱 해대는 동아리 남성 회원들의 머릿속을 이해할 수 없었다. 이 이야기를 들은 또 다른 친구는 말했다. “네가 참아. 세상엔 이상한 사람이 많으니까. 똥 밟았다고 생각하고 잊어.” 그래, 참지 않으면 어쩌겠니. 친구의 외모 품평을 하는 게 불법도 아닌데 말이야. 그때는 자존심이 상하고 배신감에 이를 갈았지만 참고 넘겼다. 언제부터 그곳이 프로듀스 101 동아리였을까 아직도 의문이다.

그 후로 몇 년을 참으며 살았다. 예를 들면 이런 거였다. 한밤의 치킨집에서 뒷자리 남자가 마음대로 머리를 쓰다듬고 2차를 가자며 희롱해도 '하지 마세요.’ 하면서 참았다. 사람도 별로 없는 지하철에서 내 엉덩이 뒤로 딱딱한 무언가가 느껴졌을 때도 끔찍했지만 참았다. 여기서 참았다는 뜻은 경찰에 신고하거나 그들을 향해 “뭐 하는 짓이야!” 소리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쯤 되면 의문이 드는 거다. 나는 엄연히 성희롱, 성추행을 당한 피해자인데 내가 왜 참아야 해? 이상하지 않은가?

나는 참지 않기로 했다. 그러나 참지 않는 말티즈가 되어 앙앙대고 싶은 게 아니라 진돗개의 날카로운 송곳니로 물어 버리고 싶었다. 나를 만만하게 본 사람에게 ‘인생은 실전’이란 교훈을 뼛속 깊이 새겨 주고 정의는 살아있다 증명하고 싶었다. 하지만 문제는 정작 내가 그 ‘실전’을 모른다는 것이다. 내게 상처와 피해를 준 이를 응징하고는 싶은데 그 방법을 알려주는 사람이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책을 읽기로 했다. <제가 왜 참아야 하죠?> 제목부터 마음에 쏙 들었다.



피해자다운 피해자


저자는 존경해 마지않던 선배이자 밥줄을 쥔 회사 수장에게 당한 성추행을 어떻게 받아드려야 하는지 고민했다. 그야말로 멘붕이다. 성폭력을 당했을 때 대부분의 여성은 이것이 성범죄인지 인지하지 못한다. 자신이 지금 성희롱을 들은 게 맞는지, 성추행을 당한 것인지 믿고 싶지 않아서 애써 부정한다. 설마 실수겠거니 하고.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분노는 뚜렷해지고 수치가 몰려오며 더없이 비참해진다.

나도 그랬다. 지하철에서 엉덩이 뒤로 느껴지는 이물감에 에이 설마, 실수겠지. 처음엔 현실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한다. 말로만 듣던 지하철 성추행을 당한 건가?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난 걸 믿고 싶지 않았다. 계속해서 느껴지는 적나라한 터치와 차갑게 식는 피를 느끼다 덜컥 겁이 났다. 여기서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 건지 아무도 알려준 적이 없기 때문이다. 냅다 소리를 질렀다가 “아닌데?” 하면 나만 이상한 사람 되는 거 아닌가. 사실 소리를 지를 용기조차 없다. 게다가 권력을 쥔 상사에게 그런 일을 당하면 안 하는 게 아니라 못 하는 거다.

한창 안희정 사건이 화두였을 때, 지인 남성분이 이런 말을 했다. 왜 김지은 비서는 완강히 거부하지 않았느냐, 라고. 그분은 평소 페미니즘에 관심이 많고 공부를 많이 한 분이었는데도 피해 여성의 심경은 이해하지 못했다. 아무리 배우고 깨어있는 남성이라도 약자가 아니면 알 수 없는 힘과 권력이 있다. 바로 젠더 권력이다. 이미 그 권력을 쥔 남성들은 백번을 말해줘도 피해 여성의 기분을 알 수 없다. 이것이 바로 남성들도 이 책을 읽어야 하는 이유이다.

왜 따지지 않았느냐. 왜 그 자리를 피하지 않았냐. 왜 곧바로 신고하지 않았느냐. 이런 초기 대응을 할 수 없는 이유는 사람의 본능 때문이다. 순간 너무 큰 충격을 받으면 온몸은 익숙한 일을 하게 된다. 성폭력을 겪은 피해자도 머릿속과는 달리 몸이 익숙한 일을 찾아서 저절로 움직인다. 그러나 훗날 그 모습이 증언이 되어 '그런 일을 당하고도 멀쩡했잖아?', '그런 일을 겪고도 웃었잖아?' 하며 피해자답지 못한 피해자가 된다. 성범죄를 겪은 여자는 이래야 돼. 피해자는 멀쩡해선 안 돼. 혹시 돈을 뜯으려는 꽃뱀 아냐? 피해자다운 피해자를 구분 짓고 판단하는 것. 2차 가해가 시작되는 지점이다.


그러니까, 피해 여성이 어떻게 반응하든 남자들이 말하는 ‘피해자다운 피해 여성’ 따위는 될 수 없습니다. 사건 후 피해 여성이 어떻게 대처하든, 남성연대는 무조건 피해 여성에게서 꼬투리를 잡아 남성 가해자를 무죄로 만들어주니까 말입니다. 제대로 저항을 못하면 화간이 되고, 저항을 하면 꽃뱀이 됩니다. 저는 이 사회가 여성을 남성과 동등한 인간으로 보고 있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왜 참아야 하죠? | 박신영 저


저자도 재판까지 가는 과정에서 꽃뱀이라는 말을 수두룩하게 들었다. 그러나 현실은 다르다. 법은 언제나 피해자 편이 아니다. 가해자에게 벌을 주는 것은 법이 아니라 법전을 쥔 판사였으니. 우여곡절 끝에 재판이 열리고 상습성폭력범인 사장이 징역 6개월을 받았지만, 대한민국의 판사께서는 ‘성폭력의 강도가 낮고 본인이 깊이 반성하는 초범’이라는 판단하에 징역 기간을 줄이고 집행유예를 때렸다. 그러나 판사의 판결문과는 달리 가해자는 반성은커녕 출소 후 저자를 무고죄로 고소하는 코미디를 선보인다.

왜 가해자들은 피해 여성을 무고죄로 고소하는 것일까? 본인이 징역까지 살고 왔다면 수많은 증거가 있고 무고죄가 입증되지 않는다는 것을 파악하고도 남을 텐데. 단순히 객기인 줄만 알았던 이런 기행은 피해 여성을 괴롭히기 위한 수단이다. 무고죄로 고소당한 피해 여성이 자신의 알리바이와 피해 입증을 위해 다시 경찰서를 들락거리며 시간과 비용, 정신적 스트레스를 감당하는 걸 노린 악질 행위이다. 저자가 들려주는 이런 경험을 통해 가해자의 심리와 가해자 주변인의 영악한 수법을 알 수 있다.



성범죄 대응 매뉴얼


한국 여성 중 대부분이 성폭력을 경험한다. 경중의 차이만 있을 뿐 아픔을 품고 누구에게도 말 못 할 상처를 안고 산다. 여성들은 우습게도 성범죄 피해자가 되지 않기 위한 예방법만 배웠지 대응법은 배우지 못했다. 정작 성범죄, 특히 강간 가해자 비율은 남성이 98.7% (2017, 경찰청 범죄통계)를 차지하고 있는데도 성범죄에 대응하는 책 하나가 공식적으로 나오지 않았다. 아래는 저자의 성범죄 대응 매뉴얼 중 인상 깊은 것들이다.

경계하라. - 가해자는 온갖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여 피해 여성을 회유하고 꽃뱀으로 몰고 간다. 이때 무심코 뱉은 모든 말은 재판시 불리한 증거가 될 것이다.

모아라. - 모든 증거를 모아라. 가해자에게 범죄를 인정하는 각서나 공증문서를 받아내고 그 모든 과정을 영상이나 녹취로 남겨야 한다.

연기하라. - 피해자다운 피해자. 이보다 우스운 말은 없지만, 그것이 현실이다. 남자들이 생각하는 진정한 피해자는 죽은 사람이다. 하지만 피해 여성이 죽을 이유는 없지 않은가. 진짜 잘못을 한 사람은 멀쩡히 숨 쉬는데. 그러니 가해자를 처벌하기 위해 가련한 척, 심신이 여린 듯 연기하자. 실제 성격이 그렇지 않더라도 법전을 쥔 사람에게 장단을 맞춰주자는 거다. 무조건 재판에서 이겨야 가해자를 처벌하니까.

참지 마라. - 피해를 보고도 참지 마라. 피해자의 잘못이 아니다. 일상 속 작은 성희롱이라도 절대 참고 넘어가지 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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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폭력을 당하고도 대처할 방법을 몰라 피해를 떠안고 사는 한국의 많은 여성들. 이 책의 모든 구절은 그들에게 조언이 되는 책이다. 그러나 이 책은 결코 사이다 같지만은 않다. 오히려 피해 여성에게 쏟아지는 비난과 2차 가해를 보며 가슴이 답답한 고구마 같은 부분도 많다. 그마저도 한국 여성의 현실이라서 더욱 답답하다. 이 긴 싸움 끝에 결국 이뤄낸 저자의 승리는 모든 여성에게 용기가 되고 정의 구현이 되었다. 부디 저자가 알려준 방법들을 써먹을 일이 생기지 않길 바라며, 한국 사회를 사는 모든 여성이 이 책을 읽었으면 좋겠다.

끝으로 저자의 말을 빌리며, 우리 모두 참지 않기를.


책을 준비하면서 참고할 만한 관련 서적을 검색해보았습니다. 온라인 서점에 ‘성희롱 성추행 성폭력’으로 검색해보니 주로 여성을 대상으로 성폭력을 예방하는 방법을 알려주는 책이 대부분이었습니다. 하지만 피해자가 조심한다고 안 당하는 것은 아니잖아요? 원인은 가해자니까요. 운 나쁘게도 당했을 경우에 고소하고 재판하는 방법에 관한 정보를 주는 책도 필요한데 말입니다. 그래서 ‘성폭력 사건 대응 방법’ 등으로 검색해보았습니다. 깜짝 놀랐습니다. 피해자인 고소인을 위한 팁이 아니라 가해자나 가해자로 몰린 사람들에게 팁을 제공하는 책들만 나와 있었습니다. (여성단체에서 만들어 배포한 무가 서적은 꽤 있습니다. 여기서는 시중 서점에서 판매하는 책을 말합니다.) 포털 사이트로 가서 다시 검색해봤습니다. 피해자의 증거 부족을 공략하여 불기소처분을 받거나 형량을 줄일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주는, 역시 성폭력 가해자를 위한 카페가 많이 보였습니다. 이 놀라운 현실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남성들은 범죄를 저지르고 나서도 재판에서 실용적인 정보를 접하기에 여성들보다 유리한 입장에 있다는 현실을 말해주는 것은 아닐까요?

제가 왜 참아야 하죠? | 박신영 저




[장재이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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