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진지한 즐거움_하이메 아욘_전시힐링 : 숨겨진 일곱 가지 사연 [시각예술]

사람들을 웃게 만들 뿐만 아니라, 새로운 경험을 발견하도록 이끌어야 좋은 디자인
글 입력 2019.05.29 2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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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길을 확 사로잡았던 전시. 반짝반짝 빛나는 오브젝트 천지였다. 잊고 있던 동심을 보여주는 굉장히 독특한 크리에이터 하이메 아욘의 전시다. 아욘은 작가라기보단 디자이너, 크리에이터에 더 가까운 느낌이다.

 

타임지는 2007년 그를 디자인/스타일 분야 선지자 25인에 선정했다. 독특한 점은, 작업물이 디자인인지 예술인 설치물인지 규정하지 않는 게 그의 특징이라는 점이다. 그래서 깊은 서사나 상징 같은 걸 바란다면 기대와 조금 다를 수 있겠다고 생각한다. 극이나 영화 같은 딥 스토리보단, 작품 하나하나가 인격과 사연을 가진 만화 캐릭터에 적절한 것 같다. 실제로 본 전시도 텍스트보단 작품 위주였다. 텍스트는 별로 없었으며 작품을 더 돋보이게 배치한 전시였다.



Green Chick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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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 나는 그린 치킨이야. 세상에 사연 없는 사람은 없는 것처럼, 우리도 만들어진 이유와 사정이 있지. 내 친구들의 이야기 한 번 들어볼래?



그린 치킨. 전시 관람 중에 가장 처음으로 맞이하는 작품이다. 작가 하이메 아욘과 작업 철학을 잘 보여주는 대표작이다. 겉보기에는 흔들거리는 닭 모양 구조물이다. 초록색 닭을 타고 자라는 아이들이 만든 미래는 어떨지 상상하며 만든 작품이다. 하이메 아욘의 아이덴티티다. 그런 의미에서 첫 작품으로 배치한 듯싶다. 자연스럽게 전시로 이어가게 해준다.




Crystal Passion, 보석들이 열대지방으로 간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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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 9개의 장식용 화병 세트. <Crystal Candy Set>


붉은 계열의 존은 양쪽에 4쌍의 오브젝트를 나열하며 중앙에 큰 오브젝트를 배치했다. 정면에서 볼 때 안정감이 느껴진다. 안정감 있는 구도와 강렬한 레드의 조합은 눈을 사로잡으면서도 거부감 없이 다가갈 수 있게 만들어준다. 영상 촬영 불가라서 찍지 못했지만 중앙의 큰 오브젝트는 천천히 회전했다. 넋 놓고 볼 정도로 매혹적인 크리처였는데 영상으로 담았으면 좋았을 듯. 아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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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뜻 아욘의 작품 세계를 알 수 있다. 크리스털과 세라믹. 열대지방과 보석. 그렇게 만든 게 장식용 화병이다. 어떤 꽃을 꽂아도 화병에 더 눈길 갈 것 같은 작품이다. 화병과 작품, 디자인을 구별하지 않는다. 화병이지만 꽃을 꽂지 않아도 작품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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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메 아욘의 작품 특성과 철학이 드러난다. 디자인, 예술, 설치물을 구별하지 않는 아욘이다. 화병이라 명명한 작품은 꽃이 없어도 작품인 것처럼 말이다. 본래 꽃병은 꽃의 부가물 따위였다. 꽃병이 아름다워도 꽃이 담긴 병은 그 자체로 '꽃'이라 지칭되는데, 아욘은 꽃병의 존재 의미인 꽃이 없어도 그 자체로 심미적 대상으로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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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는 존 구석이나 중간에 존을 대표하는 마스코트 격 캐릭터를 심어 넣는다. 주요 관람 포인트다. 레드존에는 오른쪽 구석에 마스코트와 함께 '그린 치킨'이 그랬듯 대사가 삽입됐다. 일종의 포인트를 주는 것 같아서 재치 있었다. 마스코트와 대사는 존의 아이덴티티며 설명과 작품 세계관 등을 함의한다고 생각한다. 공간 활용을 잘 한다고도 볼 수 있다. 구석에 조명으로 표현했는데 공간을 크게 차지하지 않으면서도 관람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지나가는 길목에 배치했다. 아이디어가 기발하다. 물론 구석의 바닥에 위치했기 때문에 지나칠 위험도 있다.

존 전체를 몇 마디 대사로 표현하면서 감상을 도와준다. 만화의 가치. 동심과 순수, 부담 없이 볼 수 있는 즐거움, 감동을 지키면서 작품 가치를 표현하는 게 쉽지 않은데 그걸 해낸다. 작품들에 생명을 불어넣는 것 같다.




Modern Circus & Tribes, 아프리칸도 가족의 사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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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세함이 돋보인다. 레드 이후 강렬한 원색. 노란색을 배치함으로써 이전의 존재감을 이어간다. 처음에 봤던 그린 치킨의 배경색을 따오면서 원색이라 조금 튀지만 익숙하고 편안하게 받아들일 수 있다. 전 존과 비슷하게 화병의 콘셉트를 이어간다. 테마, 색, 소재, 모양이 바뀌었지만 위화감 없이 관람할 수 있었던 건 이런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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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병인데도 전혀 다른 느낌을 주고 있다. 아프리카 부족의 정체성과 하이메 아욘의 정체성을 잘 결합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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옐로 존에서는 도전과 경험을 다루고 있다. 공감 갔던 존이다. 사람들은 자신이 이미 해봤던 것에 더욱 관심을 가지게 된다. 자신이 해봤으니까 더 잘 아는 것이며 아는 것이니 더 관심이 간다. 그런 관심은 다른 행동을 불러일으킨다. 별것 아닌 도전 경험 하나로 식견이 넓어지고 아는 세상이 좀 더 커진다.

그런 의미에서 하이메 아욘이 아프리카에 갔기 때문에 이런 작품이 탄생했다. 어떤 영감도 경험과 관찰 없이 떠오르지 않는다. 따지고 보면 이미 세상에 널리 퍼진 교훈인데, 부담 없이 다가온다. 으레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고리타분한 교훈이 아니라 캐릭터가 말함으로써 모험심을 강조하며 수용자로 하여금 스며들게 만든다. 캐릭터 입장에서는 자신의 탄생 일화를 설명해주니 조금 더 흥미롭게 수용해줄 수 있다. 잘 만들어진 캐릭터는 전시를 조금 더 유용하고 유연하게 수용하게 만드는 가치를 지닌다.

텍스트를 읽으면서 하이메 아욘이 정말 대단한 사람이라는 걸 알게 됐다. 베네치아 유리 공예 전문 브랜드 나손 모레티와 콜라보 했다는 사실이다. 진짜 새로운 걸 시도하며 도전하면서도 그의 도전은 젊은 치기와 만용이 아니라는 걸 알려주는 대목이다. 레드존에서도 그렇고 옐로 존에서도 그렇고 아욘은 기발한 영감을 받지만, 각자 분야의 전문 브랜드와 협업하면서 전문성을 더한다. 노련한 열정이 돋보인다.




Checkmate, 트라팔가르의 체스 경기



솔직히 다음 존 테마색이 파란색이었으면 조금 식상할 뻔했다. 다행히 아니었다. 존 자체가 작품이다. 벽면은 거울로 체스가 계속 줄지어서 끝없이 나열되는 것처럼 보인다. 환상 세계에 들어온듯한 느낌이었다. 거울이 계속 이어져 공간 자체가 답답해 보이지 않고 넓어 보이는 효과는 덤이었다. 다만 텍스트가 거울 위에 쓰여있어 읽기 불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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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조닝에 압도당했다. 솔직히 방금의 존이 전시회 한계를 벗어나지 못했다면 트리팔가 존은 하이메 아욘의 동심, 작품, 사고 세계를 그대로 형상화한 것 같다. 존 전체는 트리팔가 해전을 주제로 한 대형 체스판이다. 마치 전술회의실의 전술 테이블 따위를 연상시킨다. 여기서 하이메 아욘의 그릇을 볼 수 있었는데, 자국의 패배를 주제로 체스를 형상화한다는 게 범인으로선 쉽지 않을 것이다.

체스 말에는 그림이 그려져 있는데, 런던을 대표하는 역사적 건축물 등을 담고 있다. 어떻게 이런 생각을 할 수 있을지 신기할 정도다. 게다가 작품은 실제 런던 트리팔가르 광장에 설치됐는데, 체스 말 하단부에 바퀴를 달아 관객들이 직접 참여할 수 있게 만들었다. 여기서 하이메 아욘의 발언이 생각난다. 자신의 디자인을 "진지한 즐거움(serious fun)"이라고  표현했다. 사람들을 웃게 만들 뿐만 아니라, 새로운 경험을 발견하도록 이끌어야 좋은 디자인이라고 주장했다. 그의 디자인 철학이 체크메이트 존에서 아주 잘 반영됐다.




Cabinet of Wonders, 수상한 캐비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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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상한 캐비닛, Cabinet of Wonders



전시회 통틀어서 제일 마음에 들었던 존이다. 존 구성과 작품 배치, 작품 퀄리티, 색상 모두 마음에 쏙 들었다. 비행기 비상문을 연상시키는 긴 타원형의 캐비닛에 비행기 창문을 연상하는 유리를 설치했다. 유리 하나하나마다 작품을 배치했다. 작품 손상이 없을 거고 작품 구분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져 관람이 편했다. 벽 하나에 많은 작품을 배치하는 등 공간 활용도 탁월했다. 무엇보다 작품 퀄리티가 너무너무 사랑스러웠다. 내가 좋아하는 색감과 패턴, 제스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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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존에 들어오자마자 김언수의 「수상한 캐비닛」이 생각났다. 낡은 캐비닛에 현실에선 존재하지 않을 법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담겨 있었다는 소설이다. 굉장히 이질적으로 느껴질 정도로 이상한 사람들의 이야기였는데, 학창시절 읽고 충격받았을 정도로 여운이 길었던 책이다. 그 사람들도 결국 주인공에 의해 읽어졌기 때문에 세상에 깨어나게 된다. 캐비닛 너머의 작품들도 사람들이 자신들을 들여다보았으면 바람에 펭귄 캐릭터가 대표로 호소하는 것 같다. 어떻게 보면 들여봐달라는 요구가 상당히 노골적이다. 어떤 창작물이든 감상하는 사람이 있어야 존재가치가 부여되는 건 당연한 얘기다. 이들은 필사적일지 모른다.

수상한 캐비닛 작품들은 일본풍의 영향을 받은 작품도 있고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를 연상시키는 작품들도 있었다. 대부분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영향이 지배적이다. 어떤 것이든 뭔가 환상을 첨가한 듯한 기묘한 분위기였기 때문이다. 그런 기묘함과 함께, 깔끔하게 떨어지는 테두리, 굉장히 선명한 색감, 단순한 색감은. 아욘이 만들었던 동심과 꽤 어울렸다. 하여금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서 나오는 모든 인물과 물건들이라는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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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진짜 감탄했던 작품이다. 하이메 아욘을 연상시키는 인물과 의자에 앉아 있는 여성이 굉장히 가깝게 위치한다. 서로 눈을 마주치지 않고 떨어져 있는 모습이, 가까운 위치임에도 불구하고 기묘한 분위기를 연출한다. 남성은 붉은 심장을 여인에게 주고 있으며 여인은 언뜻 심장을 흘겨보는 것 같기도 하고 보지 않는 것 같기도 하다. 신경도 쓰지 않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남성은 한쪽 다리를 굽히고 상체를 젖힌 채 여인에게 다가가고 여인도 손으로 의자를 잡으면서 상체를 접히는 모습인데 목을 한껏 뺀 체 연지도 모르는 입술과 흘겨보는 눈은 고집과 날이 선 성격을 나타낸 듯하다. 여인의 모습에 따듯한 색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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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가지 추측하는 건, 남성이 입은 의상이 하이메 아욘이 작품에서 입었던 의복과 같았다. 하이메 아욘이라고 가정해볼 때, 여성에게 전달해주려는 심장은 생명 따위로 생각해볼 수 있다. 창작자가 크리처에게 심장을 부여함으로써 완성시키는 것이다.

 

더욱 감탄했던 점은, 어느 방향에서 보듯 스토리가 조금씩 달라지는 것 같다는 점이다. 정면에서 찍은 사진에서는 여인이 몸을 앞으로 빼면서, 심장을 애타게 원하는 듯한 표정 같다. 오른쪽에서 찍은 사진에서는 여인이 눈길도 주지 않은 채, 심장이든 뭐든 상관없다는 권태로운 표정을 짓고 있는 것만 같다. 다른 건 몰라도 이 작품은 다방향에서 보는 걸 추천한다. 아까 펭귄이 뱉었던 대사와 함께 생각해본다면, 우리가 작품을 들여다봐야지만 작품들의 가치가 생기며 어떤 시점에서 보느냐에 따라 작품의 가치가 달라진다는 걸 함의하고 있는 듯하다.




마무리


7개 공간이 별도 스토리를 가졌다. 오브젝트가 확확 바뀌기 때문에 더 두드러지게 구별된다. 코너화가 잘 되어있다. 컨셉 별로 공간 구별 잘 되고 색도 바뀌어서 눈에 확 들어왔다. 강렬하지만 부담스러울 수 있는 원색을 편안하게 잘 쓴 느낌이다. 워낙 장소가 협소해서 그런 지 동선이 조금 아쉬웠다. 좁은 포토존은 정체 생성 구간이었으며 줄 서기도 여의치 않았다.  물론 공간 한계가 있어서 그런 듯하다. 애초에 공간이 작고 4층 건물이라서 편하게 관람하기 조금 힘들 수 있다. 그럼에도 대림미술관은 공간 활용을 잘하는 게, 벽이나 계단 같은 작은 공간이라도 활용을 잘했다. 많은 텍스트 대신 핵심 텍스트만 배치하는 것도 좋은 결과를 낳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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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 활용



협소하고 경사가 높은 계단을 잘 활용했다. 이전 전시에는 창문을 활용한 점이 인상 깊었는데, 이번에 계단 벽을 잘 활용했다. 올라가는 계단 벽마다 해당 층의 코너 캐릭터와 이름을 그려 넣었다. 층 올라왔을 때 엘리베이터 옆이나  벽에 포토존이나 장치들을 넣은 것도 공간 활용이 아주 효율적이었다고 생각한다. 아쉬운 건, 계단에 올라왔을 때 바로 텍스트나 오브젝트를 끼워 넣는다면 그곳에서부터 정체가 생길 우려가 있다는 점이다. 게다가 경우에 따라 그런 장치들이 관람자들에게 별로 주목받지 못하고 지나칠 수 있다고 생각한다. 4층 같은 경우는 더 이상 올라가는 계단이 없어서, 다시역주행해야 하는 구조다. 그래서 계단 앞에 바로 주제를 삽입한 건 기발한 아이디어였다.

전시 자체가 작가의 동심과 판타지를 보여주는 전시였다. 톡톡 튀는 아이디어를 가진 작가라서 그런 지, 작품을 바로 보면 쉽게 이해하기 어려울 수도 있다. 그러나 눈으로 훑어도 관람자들을 홀리는 충분히 만족스러운 전시다. 아니 오히려 텍스트를 과도하게 집어넣지 않아서 다행이라 생각한다. 굳이 관람객들에게 설명하는 것보다 자연스럽게 관람하면서 좋아할 수 있도록, 기획 의도에 맞게 즐거움과 동심을 심어주는 듯해서 잘 기획했다고 생각한다. 지나친 설명이 들어간 순간 그건 그냥 작품을 설명하는 스토리 같은 게 아니라, 스토리를 설명하는 작품으로 주객전도된다. 필자도 그래서 종종 따분함을 느낄 때가 있었다. 각설하고 작품이 주가 되는 전시회는 일단 눈으로 작품을 바라봐야 된다고 생각한다. 과유불급이라는 말이 잘 어울렸던 전시다.

다만 아쉬운 점이 간혹 영어가 나왔다. 작품 제목 같은 경우 종종 한글/영어 병기하지 않고 영어로 표기했다. 작품 설명 없이 눈으로만 보라는 걸까? 다른 것보다, 강조하는 동심과 순수가 영어로 쓰여있다면 제일 와닿아야 할 아이들에게 무슨 소용이겠는가?

궁극적으로 이런저런 작가만의 철학이 다채로웠다. 경험의 중요성, 작품 그대로 심미적 대상, 존재가치, 진지한 즐거움, 관용 등을 저마다 잘 표현했다. 거부감 없이 잘 스며들 수 있도록 캐릭터도 잘 활용했다. 이런저런 작가의 신념을 찾아보는 것도 전시 관람 포인트였다.



[오세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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