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썰썰썰] 나는 오늘도 무사하기를 바란다.

우리가 무사하기를 바란다.
글 입력 2019.05.25 16: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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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 가다가 맞아본 적 있는가? 때리려고 달려드는 사람을 만난 적은? 삼류 영화에서도 안 나올 것 같은 일이다. 혹은 ‘묻지마 폭행’ 사건으로 9시 뉴스에서나 볼법한 일이지. 언제나 남 얘기로 생각하던 그런 종류의 일이 내게 일어날 것이라곤 상상도 못했다.


그날은 지극히 평범한 하루였다. 오랜만에 친구들을 만났고 강남역을 갔으며 길거리를 걷고 있던 아주 평화로운 오후. 좁은 골목이나 구석진 곳도 아니었다. 유동인구가 쏟아져 나오는 강남역 N번 출구 앞 넓은 인도였다. 나와 친구들은 하하호호 웃으면서 인도를 걷고 있었다. 5명의 친구 중 3명은 뒤쪽에, 또 다른 2명은 앞에서 걸었다. 해가 내리쬐는 오후 3시쯤이었다.

  

나는 맞은편에서 걸어오는 남자를 신경 쓰지 않았다. 그저 지나가는 행인1 일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가까이 다가올수록 낌새가 이상했다. 점차 보폭이 빨라지다가 달리기 시작하는 거다. 그것도 오른손을 높이 치켜들고. 건장한 4-50대 남자가 한 손을 치켜들고 달려오는 모습은 마치 공포영화 같았다. 너무 놀라서 어떤 생각을 할 틈도 없었다. 극한의 공포를 맞닥뜨리면 너무 두려운 나머지 순간 패닉상태에 빠진다. 어떤 사고를 할 틈도 없이 굳었다. 맥락도 없이 뛰어오는 성인 남성의 위협은… 말로 표현할 수가 없다.


앞쪽에 있던 두명이 뛰어오는 그 남자를 먼저 발견했고 뒤에 있던 나와 친구들은 서로의 손을 붙들고 도망쳤다. 혼비백산이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왜 때리려 하는지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일단 맞지 않기 위해 달려야 했다. 시야에 그가 보이지 않자 그제야 달리기를 멈췄다. 다들 분노보다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는 게 먼저였다. 실제 피해 입증이 안 될 것 같아 112신고는 하지 못했다.


지금에야 그때를 회상하며 이렇게 글을 쓰지만, 당시에는 정말 충격이었다. 첫째로 길을 가다가 맞을 뻔했다는 사실 그 자체. 칼도 총도 들지 않았지만 맨손만으로도 숨이 막혔다. 게다가 나보다 한참은 더 큰 덩치가 달려오는데 충분히 위협적이다. 길을 가다가 맞을 뻔했다니. 참 맥락 없어서 가끔은 내 이야기지만 믿기지 않는다.


둘째로 그 장소가 강남 한복판이었다는 것. 음습하고 컴컴한 어느 뒷골목도 아니고 훤한 대낮의 강남 도로라는 게. 누가 그곳에서 그런 일이 있을 거라 상상하겠는가.


셋째로 ‘여자’가 목표였다는 것. 더 정확히 말하면 작고 어린 여자. 아무리 평일 대낮에 유동인구가 적다 한들 그곳은 강남 번화가였다. 평소 주변을 둘러보고 다니지 않는 탓에 우리 주변에 어떤 사람이 있었는지 정확히 알진 못한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작고 어린 여자들은 우리뿐이었다. 분명 그 사람도 그걸 알았을거다. 건장한 성인 남성이나 코밑이 시커먼 남고생 무리는 그냥 지나친 그의 눈에 들어온 건 나와 내 친구들이었다. 그 여자애들이 놀라서 허겁지겁 달려가는 걸 보는 게 일종의 놀이였을 수도 있다. 손을 치켜들고 달려갔을 뿐인데 꺅꺅거리며 도망가는 꼴이 우습고 즐거웠겠지. 이제와 돌이켜보면 당시의 상황과 끝까지 쫓아 오지 않은 점을 보아 실제로 범죄를 저지르려 한게 아니라 공포에 질린 여자의 반응을 즐기는 ‘여성 혐오’였을 것이다.






다행히 다친 곳도, 맞은 곳도 없지만 정신적인 충격이나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이 바뀌었다. 모든 것이 허무했다. ‘왜 나는 힘이 없을까?’. 아무리 힘이 센 여성도 일반 남성을 제압하기 쉽지 않은데 하물며 근력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난 어떻겠나. 억울했다. 왜 조물주는 여자를 만들 때 힘을 덜어내셨나. 비관적이고 우울한 날들이 이어졌다.


이날의 일을 입 밖으로 꺼내는 건 별로 좋은 생각이 아니었다. 직접 당해보지 않고서는 그때의 내 심경과 그 후의 변화를 이해하지 못했다. 흔히들 “재수가 없었네.”, “똥 밟았다고 생각해.”라고 말한다. 이게 그냥 재수가 없던 일인지, 범죄 미수인지. 그들과 나의 시각은 엄청난 차이가 있다. 그냥 일진이 사나웠다고 말하는 사람에게 되묻고 싶다. 그럼 평생을 일진이 사나울지도 모른 채로 살아야 하는 거냐고. 어디를 갈 때마다 닥쳐올 폭력에 노출되어 사는 일상이 그저 ‘운’, ‘일진’, ’재수’라는 말로 퉁 쳐지는 것인지.


사회적 인식을 기반으로 한 범죄나 사건을 개인의 일로 치부하고 피해자의 불운, 가해자의 개인적인 성향 탓으로 보는 것은 일반적이다. 여성 혐오 범죄에 있어서 더욱 그렇다. 그 일이 있은 지 일년 후, 명절에 만난 친척 어른과 의견이 맞지 않아 다툼아닌 다툼을 했다. 그는 몇년 전 한국을 뒤흔든 강남역 살인사건을 싸이코가 저지른 ‘묻지마 범죄’라고 했다. 발끈한 나는 화장실을 나오는 그 많은 남자를 보고도 참았다가 여자를 발견하고 죽였는데 그게 어떻게 ‘묻지마’ 범행이 되는 거냐고 되물었다. 이것은 분명 계획된 범행이고 혐오에서 비롯된 살인이라고. 하지만 그는 끝까지 제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결국 화가 나서 내 경험을 이야기했다.



“강남역 한복판에서 때리려고 뛰어오는 사람을 마주한 적 있어요? 그게 21세기 한국 여성에게 일어나는 일상이에요. 그렇다면 그것도 제 불운 때문인가요? 함께 길을 걸어간 주변의 남자들은 운이 좋았던 거고요. 저를 때리려 뛰어온 그 사람은 그게 누구든 ‘묻지마’ 폭행을 저지를 생각이었는데 하필이면 여자인 내가 '재수없게’ 걸렸군요.”



그는 끝까지 인정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와의 대화를 포기했다. 이야기하면 할수록 자괴감이 몰려와서 대화하기 싫었다. 오히려 그 옆에서 가만히 듣고 있던 아빠가 나를 위로했다. 그런 일이 있었는지 몰랐다며. 말을 해도 어떻게 해줄 수 있는 일이 아니란 걸 아는지 아빠는 침묵했다. 두 딸을 가진 아버지로서 많은 생각이 오고 갔는지.


친척의 말처럼 재수 없게 걸린 범죄의 희생양이 될 뻔한 나는 아직도 그 일이 운 나쁘게 벌어진 ‘묻지마 폭행’(미수)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분명 그 행동 안에는 여성에 대한 혐오가 깔려 있었다. 그렇기에 평범한 길거리가 나는 여성이기 때문에 불안하다. 언제 어디서 그 아저씨를 만날까 가끔은 두렵기도 하다. 강남역 부근에서 약속이 잡히면 항상 그날이 떠오른다. 다음번에는 맨손이 아니라 칼을 들고 있을지도 모르지.


그러니까 우리 함께 여성시위를 나가자는 말이 아니다. 누군가를 교화하고 훈계하려는 목적도 아니다. 단지 여성 혐오를 부정하지 말기를 바란다. 내가 겪지 못했다고 해서 세상에 깔린 혐오는 사라지지 않는다. 혐오의 피해자가 된 사람에게 불운을 운운하는 건 두번 상처란 사실을 꼭 알아주었으면.


평범한 일상에 안도하는 게 얼마나 비참한 일인지 생각해보았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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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5월 17일은 ‘강남역 살인’ 3주기였다. 2016년 5월 17일 서울시 강남역 10번 출구 부근 공용 화장실에서 여성이 살해당한 사건이다. 여성을 노린 계획적인 행동이었고 여성 혐오가 기반에 깔려 있었다. 이 사건이 전파를 타고 많은 여성이 함께 분노했다. 폭력의 대상을 여성으로 한정한 게 어떻게 ‘묻지마 범죄’라는 말인가. 이 사건을 계기로 페미니즘이 주목받고 여성 운동이 활발해졌다. 여성들은 본인에게도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하기에 더욱 분노했다. 혹은 실제로 비슷한 여성 혐오적 범행을 당했거나 당할 뻔한 경험이 있는 사람들도 있었다.


생각보다 여성 혐오는 만연하다. 그리고 지금도 개선이 되지 않았다. 도처에 죽음과 폭력에 노출된 여성들에게 이 세상은 항상 불안하다. 너는 여자니까 밤늦게 돌아다니지 말래서 그랬다. 짧은 치마를 입지 말래서 긴 치마를 입었다. 만취 상태까지 술을 마시지 말라기에 그랬다. 그 결과 나는 이제 대낮의 길거리도 두려워해야 한다. 그렇다면 어디를 가면 안전한가? 나는 안전하기를 바란다. 짧은 치마를 입고 밤늦게까지 술을 마셔도 아무런 일이 일어나지 않는 세상을 원한다. 사실 그런 얘기도 이제는 진절머리가 나서 듣기 싫다. 내가 왜 조심해야 해? 언제까지 조심해야 하냔 말이다. 어디까지 단속해야 할까. 나는 일상이 무사히 지나가기를 바란다. 그리고 자기 전, 도처에 도사린 폭력에서 오늘도 잘 살아남았다고 스스로를 위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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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재이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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