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SS] 스릴러, 그 이상의 묵직함 _ 뮤지컬 '더 픽션'
-
처음에는 단순히 스릴러 뮤지컬인 줄 알았다. ‘소설 속 살인마가 현실에 나타났다.’는 설정부터 포스터의 분위기까지, 많은 요소들이 스릴러를 말하고 있었다. 뮤지컬과 스릴러라는 두 요소의 조합이 흥미로웠기에 이 작품에 유독 눈길이 갔다. 하지만 몇몇 리뷰들을 보고 난 후, 알게 되었다. 이 작품은 아무래도 스릴러의 외피를 입은 드라마 뮤지컬인 듯하다.
1932년 뉴욕. 작가 ‘그레이 헌트’에게 기자 '와이트 히스만'이 찾아간다. 그레이의 소설 <그림자 없는 남자>의 신문 연재를 제안한 것. 그레이와 와이트는 인기를 위해 작품을 보다 자극적으로 고치게 되고. 극악범들만을 골라 처리하는 소설 속 살인마 ‘블랙’은 독자들에게 폭발적인 인기를 얻는다.하지만 블랙을 따라한 모방범죄가 현실에서 등장하고, 극악범들은 하나 둘 현실의 블랙에 의해 살해된다. 모두가 혼란에 빠진 와중, 그레이마저 소설의 결말대로 죽음을 맞이하는데.사건에 의문을 가진 경관 ‘휴 데커’는 와이트를 조사하기 시작하고, 사건의 비밀이 하나씩 밝혀지며 이야기는 시작된다.
뮤지컬 <더 픽션>은 2016년 창작지원프로젝트 ‘데뷔를 대비하라’를 통해 첫 선을 보인 후 2017 DIMF 창작지원작, 2018 KT&G 상상마당 창작극 지원사업 선정작으로 연속 선정되었다. 매년 지원을 받아 대중에게 선보이는 과정을 반복하며 극은 자연스레 더욱 높은 완성도를 갖게 되었고 마침내 2019년, 새로운 캐스팅과 함께 돌아왔다.
작가 ‘그레이 헌트’ 역에는 <아랑가>, <1446>의 박유덕이 지난 시즌에 이어 함께하고 <파기니니>, <최후진술>의 박규원과 <왕복서간>, <달과 6펜스>의 주민진이 새롭게 합류했다.
기자 ‘와이트 허스만’ 역에는 옛 시즌부터 <더 픽션>과 연을 맺었던 <달과 6펜스>, <파기니니>의 유승현과 <어린왕자>, <풍월주>의 박정원, <루드윅>, <6시 퇴근>의 강찬이 함께한다. 더불어 <존 도우>, <파기니니>, <1446>의 황민수가 새로이 합류했다.
마지막으로 형사 ‘휴 대커’ 역에는 <루시드 드림>과 <무인도 탈출기>의 박건, <사랑은 비를 타고>의 김준영, <전설의 리틀 농구단>과 <무한동력>의 안지환이 캐스팅되었다.
이 작품이 흥미로웠던 가장 큰 요인은, 범죄사건의 진상을 파헤치는 장르적 재미에 더해 생각할 거리를 던져준다는 점 때문이었다.
뮤지컬 <더 픽션>이 제안하는 여러 키워드 중 하나는 바로 '자경단'이다. 법의 망을 빠져나간 악인을 능력 있는 개인이 처치한다는 자경단 키워드는 지금껏 여러 콘텐츠에서 다뤄졌다. 가장 대표적인 작품이 바로 ‘베트맨’ 시리즈이다. 경찰과 검찰이 잡지 못하는 어마 무시한 악인을 최첨단 무기로 중무장한 베트맨이 처리한다는 서사는 공권력의 구멍을 현저히 느끼고 있던 작품 속 시민, 그리고 보는 이에게 통쾌함을 선사한다.
하지만 동시에 이러한 어둠의 기사, 즉 Dark Knight 활동은 어디까지나 ‘사적’ 복수이기에 악인을 처단하는 데 개인의 감정과 가치관이 반영된다는 치명적인 약점을 지닌다. 영화 ‘다크나이트’ 속, 연회장 시퀀스를 떠올려보자. 희대의 악인 조커는 브루스 웨인이 사랑하는 여인, 레이첼을 창 밖으로 던져버린다. 그러자 베트맨은?! 그렇다. 단 1초의 망설임도 없이, 레이첼을 구하러 창 밖으로 몸을 던진다. 조커와 함께 남겨진 수많은 사람들을 뒤로 하고 말이다!
베트맨이 제 아무리 대단한 히어로일지라도, 그 안에 들어 있는 것은 결국 브루스 웨인이라는 개인이다. 때문에 베트맨 식의 정의 추구는, 사회적 합의가 이뤄지지 않았기에 그 과정에서 공정성이 필히 결여되어 있을 수밖에 없다. 베트맨 역시 이를 알고 있었다. 때문에 시리즈 내내 괴로워하다가 (스포주의) 3편에서 악인과 함께 죽음을 택한 것이다!
웹툰 ‘비질란테’와 ‘국민사형투표’ 역시 이와 유사한 자경단 키워드를 지닌다. 법망을 빠져나간 극악무도한 범죄인을 처단하는 개인, 혹은 국민 모두가 행사할 수 있는 사형 투표권이 소재로 등장하고. 이 이야기에서도 역시 ‘사회적 합의가 이뤄지지 않은 개인적 차원에서의 처단이 과연 바람직한가’라는 의문이 스토리의 주된 갈등을 만들어낸다.
이처럼 다양한 작품에서 등장한 키워드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자경단이라는 소재가 매력적으로 와 닿는 이유는 공권력에 대한 불신이 실로 만연하기 때문이다. 동시에 누구나 한 번쯤은 상상으로 누군가를 죽여(!)봤을 정도로 복수에 대한 욕망이 인간 본연의 것이기 때문이다.
밀한 욕구를 꺼내 감각화 함으로써 보는 이에게 대리만족을 선사하는 콘텐츠의 기본적인 역할은 자경단이라는, 감정으로 점철된 소재를 취했을 때 보다 성공적으로 달성된다. 때문에 자경단 소재는 메시지와 대리만족을 모두 충족시키며 작품성과 대중성,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을 수 있는 것이다.
더불어 뮤지컬 <더 픽션>은 그레이와 와이트, 그리고 블랙, 세 캐릭터 간의 관계성을 이야기하며 여운을 주는 드라마 장르의 성향 역시 갖고 있다. 세 인물의 캐릭터성은 이름에서부터 드러난다. '와이트(White)'가 이성의 영역을 뜻하는 기자라면 '블랙(Black)'은 본능의 영역을 뜻하는 살인마이다.
White와 Black, 그 사이의 '그레이(Gray)'는 논픽션에 존재한 채 픽션을 만들어내는 작가이다. 서로 다르면서도 모두 모였을 때 온전한 세 캐릭터에 대한 치밀한 묘사는 역시 우리에게 생각할 점을 던져 줄 것이다. 마치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이 베트맨과 조커, 그리고 하비 덴트의 삼박자를 통해 선과 악의 모호함을 이야기했던 것처럼 말이다.
2019년 4월 13일부터 6월 30일까지, 대학로 TOM씨어터에서 공연되는 뮤지컬 <더 픽션>. 장르적 재미, 그 이상을 넘어선 묵직함을 지닌 이야기일 것이라 예상되기에 더욱 기대가 된다.
[박민재 에디터]<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위로
-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