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안 봐도 사는 데 지장은 없어요, 하지만 본다면… - 안봐도사는데 지장없는전시

일상이 아름다워지는 방법은 생각보다 훨씬 간단하다
글 입력 2019.05.10 17: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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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의 이름을 보자마자 어디선가 이건 꼭 봐야 한다는 외침이 들렸다. 당신의 인생에 꼭 필요한 것이라고 광고하는 것들 사이에서 한 발짝 물러선 채 안 봐도 사는 데 지장 없다고 말하는 그 태도가 내 마음을 사로잡았다. 1초의 망설임도 없이 전시를 관람하기로 선택했고 그렇게 전시를 관람하게 된 날, 나의 선택이 옳았음을 확신했다.

 

이 전시를 보기 전날까지 나는 아주 무기력한 상태였다. 분명 시험이 끝나서 신나야 할 텐데 시험 기간보다 더 지치고 우울했다. 2019년을 맞아 새롭게 벌여 놓은 일들은 설레는 마음으로 시작했지만, 시간이 지나자 설렘 대신 익숙함만 남아 무의미하게 반복되는 일상이 되었다. 바쁜 일상이 일주일 주기로 똑같이 되풀이되자 오늘은 무슨 일이 일어날지 궁금하지도, 내일이 기다려지지도 않았다. 사는 낙이라곤 오로지 먹는 것뿐이었다.

 

그렇게 무기력하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사는 사이, 어느새 이 전시를 보기로 한 날이 되었다. 그날 나는 동네 도서관에 가서 책을 반납하고 또 다른 책을 빌렸다. 그다음 내가 깜빡해서 중요한 물건을 놓고 온 친구네 집에 가서 물건을 찾았다. 그리고 편의점에서 간단히 끼니를 해결한 뒤 전시회를 찾았다. 대부분이 이동 시간이었던 아주 지루한 일과였다. 그런데 평소와 느낌이 좀 달랐다. 평소처럼 버스나 지하철에서 스마트폰이나 책을 보는 대신에 창밖을 바라보며 여유롭게 사색하게 되었고 지루하기만 한 이동 시간이 지루하지 않았다. 긴 사색 끝에 서울미술관에 도착하고 나서야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하루 일과에 전시회가 있는 것만으로 나의 일상이 다르게 느껴졌던 것이다.


 

대표 포스터 이미지.jpg
 

 

아침, 낮, 저녁, 새벽 총 네 가지 파트로 구성된 <안봐도사는데 지장없는전시>는 그 시간을 살아가는 우리의 일상에 대해 다양한 예술작품들을 선보인다.

 

내가 서울미술관에 도착했을 때의 시간은 오후 2시쯤이었다. 그런데 전시장에 발을 들여놓은 순간, 나의 시간은 순식간에 이른 아침으로 변했다. 조금 어두운 조명, 전시장을 가득 채운 음악, 한 예술가의 사진. 갑자기 밖과는 전혀 다른 세상에 진입한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바깥세상에서 내가 가지고 있던 많은 고민이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황선태_빛이 드는 공간, 2015, 강화유리에 샌딩, 유리전사, LED116x73x4cm.jpg
 

 

그렇게 조금 붕 뜬 마음으로 발걸음을 옮기다가 선으로만 표현된 세계에 화사한 빛 몇 줄기를 내린 그림을 보았다. 하고 싶은 일 대신 해야 하는 일로 가득한 우리의 일상은 무채색에 가깝다. 그러나 그 무채색의 일상도 생각보다 훨씬 쉽게 아름다워질 수 있다. 아침에 눈을 떴을 때 창문을 통해 내려오는 빛에만 집중해도 우리의 일상은 예술이 될 수 있다. 그 사실이 나의 마음을 일렁이게 만들었다.

 

전시의 도입부에서부터 그런 생각이 들기 시작하자 다음 작품들도 다르게 보였다. 나도 사소한 것들이 일상을 빛내준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무 익숙해서 외면해버린 것들이 많았다. 이 전시에서는 내가 그렇게 외면해왔던 아무렇게나 던져 놓은 수건도, 길을 걸을 때마다 쉴 새 없이 마주치는 문도 예술이었다.


 

드롤_2012, Portations, Inkjet print, 59.4x42cm.jpg
 

 

<안봐도사는데 지장없는전시>가 다루는 예술작품들은 특정 장르에 국한되지 않는다. 사진, 그림, 폰트, 조각까지 모든 분야의 작품이 일상의 아름다움을 말했다. 그중에서도 가장 인상 깊은 건 바로 안나푸르나 인터렉티브에서 제작한 게임 플로렌스였다.

 


 


그녀의 인생에 사랑이 찾아오는 과정이 게임이라는 매개체를 통해 펼쳐졌다. 게임이 아니라 한 편의 애니메이션을 보는 것 같았다는 누군가의 감상처럼 게임을 하고 나니 플로렌스라는 한 사람의 삶을 옆에서 같이 살아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게임의 분위기는 귀여운 그림체를 만나 시종일관 밝은 톤을 유지했다. 내가 본 것은 전시장에 놓인 태블릿PC 화면이었지만 내가 느낀 것은 소박하면서도 행복한, 때론 슬플 때도 있는 한 인간의 인생이었다. 게임을 마치자 전시회에서의 하루는 저녁을 향해 저물어가고 있었다.


 

정다운_감각의 전환, 2018, Fabrics, fame, mesh, variable installation.jpg

 


그 저녁에서 나는 조금 독특한 창문을 만났다. 나는 평소 창문 보는 것을 좋아한다. 누군가를 그냥 보는 것과 창문 너머 보는 것은 느낌이 다르다. 제한된 크기만 볼 수 있는 창문 너머의 세상, 그 세상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은 어떤 시간을 보낼까. 서울의 화려한 야경 속 아주 자그마한 창문을 보며 그런 생각을 해오곤 했었다. 나는 이 독특한 창문을 보며 오늘도 지친 하루를 보냈을 익명의 누군가를 상상했다. 그리고 어느새 익명의 누군가도, 전시를 보는 나도 하루를 마무리하고 새벽을 맞이해야 할 시간이 되었다.

 

누구나 하루쯤 밤을 새 본 적이 있을 것이다. 새벽 특유의 고요함과 그 고요함 속에서 어둠이 물러가고 빛이 찾아오는 것을 본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새벽이 예술과 얼마나 잘 어울리는 시간인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새벽1.jpg
 

 

우리의 일상은 잠이 든 이후에도 꿈이라는 형태로 계속된다. 나는 그렇게 여러 작품을 통해 다른 이의 꿈 속 세계를 마음껏 유랑했다. 그 몽환적인 기분에 취해 있는 사이 전시장에서의 하루는 끝이 났다. 이제 다시 현실의 하루로 돌아가야 했다.


전시장을 나온 뒤 향한 석파정에는 조금 전까지 내가 구경했던 새벽의 세계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맑은 하늘 아래 화창한 낮의 세계만이 있었다. 그리고 그 낮의 세계에서 사람들이 지인들과 행복한 표정으로 사지을 찍고 있었다. 완전히 현실로 돌아온 것이다.



KakaoTalk_20190510_124510059.jpg



이전에 내게 현실로 돌아온다는 말은 부정적인 의미로 쓰였다. 현실 복귀란 곧 잠시나마 행복했던 도피를 끝내고 수많은 의무와 걱정으로 돌아간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그날은 달랐다. 그 현실이 얼마나 간단하게 아름다워질 수 있는지 전시를 통해 배웠기 때문이다.


전시를 보고 일주일이 지났다. 내 삶은 거의 달라지지 않았다. 여전히 정신없고 또 불안하다. 하지만 전시가 그랬던 것처럼 사소한 것을 향해 시선을 돌려보니 나를 괴롭혔던 무기력에서 해방될 수 있었다.



[진금미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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