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예술적’이지 않은 작품을 만들 수 있을까? [문화 전반]

마르셀 뒤샹 전시회를 바탕으로
글 입력 2019.05.09 19: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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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적’이지 않은 작품을

만들 수 있을까?


 

[크기변환]뒤샹 샘.jpg
 


<샘>이란 제목의 거꾸로 놓인 남성용 소변기. 이는 리처드 머트(R. Mutt)라는 무명 아티스트가 출품한 작품이다. 이 작품을 처음 봐서 당황스러운 사람도, 이미 알고 있는 사람 모두 잠시 멈추고 생각해보자. 과연 이것은 ‘예술적인 작품’의 가치를 지니는가?


1971년 뉴욕, 예술가의 독립성을 보장한다는 취지로 참가비 6달러만 내면 누구든 참여할 수 있는 독립전이 열렸다. 그러나 <샘>이라는 작품이 출품되면서 미술계는 발칵 뒤집혔다. 평범한 소변기를 ‘선택’하여 ‘샘’이란 새로운 이름을 붙이고선 ‘예술 작품’이라 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평범한’ 일상을 ‘평범하지 않게’ 작품으로 만들어 출전한 사람은 바로 마르셀 뒤샹이다.


*


마르셀 뒤샹은 현대 미술 역사상 가장 독창적인 인물 가운데 하나인 프랑스계 미국인 아티스트이다. 사실 필자도 ‘소변기로 작품을 만든 신기한 예술가’라고만 단순하게 알고 있었다. 뜻밖에도 4월까지 진행했던 뒤샹 전시회를 가서 깊이 알게 되는 기회가 있었기에 전시회를 토대로 뒤샹에 대해 간략히 소개하고, 우리 모두가 ‘예술’에 대해 한 번쯤은 고민해야 할 문제를 이야기하고자 한다.

   

 

뒤샹 전시회.jpg
 


마르셀 뒤샹



맨 처음, 전시회에 들어서면 젊은 시절의 뒤샹을 마주하게 된다. 분명 어린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그의 그림 실력은 대단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초반에는 사진을 찍은 듯한 인물 그림을 그리더니 점차 나이가 들수록 빛에 대한 변화 혹은 그림의 뒤틀림에 대해 그리며 변화하기 시작한다. 이처럼 뒤샹의 초기 작품에는 상징주의 화가들의 그림과 후기 인상주의, 입체주의, 야수주의 미술이 영향을 끼쳤다.


이후 그는 파리 입체파 그룹의 일원으로 1911년부터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화가로 유명세를 타던 뒤샹은 약관의 나이인 25세에 회화와 결별하겠다는 중대한 결정을 내리고 끊임없이 스스로를 새롭게 발명하는 예술가의 길을 걷기 시작한다.


이렇게 그는 예상치 못한 작품들을 만들어 내기 시작한다. <그녀의 독신자들에 의해 발가벗겨진 신부, 조차도(큰 유리)>, <큰 유리>, <자전거 바퀴>, <샘> 등등 ‘레디메이드’를 바탕으로 최초로 예술의 정의를 고민토록 만든다.


물론 중간에 그에게도 시련이 있었다. 잠시 미술을 포기하고 체스에 저념하기도 하고, 세계대전을 겪기도 하며 ‘에로즈 셀라비’라는 또 다른 여성 자아를 스스로 만들어 예술 프로젝트를 진행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는 계속해서 예술적 선언에 힘을 쏟았다.

    



‘레디메이드?’



용어가 헷갈릴 수 있으니 우선 정확히 짚고 넘어가자. ‘레디메이드’(ready-made)는 사전적인 용어로 ‘이미 만들어진 기성품, 전시용’이다. 그러나 뒤샹이 의미한 ‘레디메이드’는 사뭇 다르다. 이해하기 쉽게 간단히 요약하자면 ‘선택’하여 ‘새로운 의미를 창조’하는 것이다.


뒤샹에 의하면 ‘이제 미술은 더 이상 어떤 대상을 평평한 캔버스 위에 재현하거나 혹은 인간의 감정을 다양하게 표현하는 방식이 아니라, 기성 제품에 사인을 함으로써 일상적인 사물이 예술 작품이 된다는 것’으로 표현한다. 이러한 발상은 1912년 항공공학박람회를 관람한 마르세 뒤샹의 “이제 회화는 망했어. 저 프로펠러보다 멋진 걸 누가 만들어 낼 수 있겠어? 말해 보게. 자네는 할 수 있나?”라는 한 마디로부터 시작된다. 다시 말해 기성품을 일상적인 환경과 장소에서 옮겨와 하나의 예술 작품으로 감상할 때는 본래의 목적성 아닌, ‘미’를 발견해야 한다고 말한다.


우리는 흔히 ‘예술’이란 단어를 들으면 무언가 그리고, 만들며 창작하는 것을 쉽게 떠올리곤 한다. 그러나 그는 ‘예술= 발견’이란 수식어를 내놓았다. 이는 단언컨데 이전 사고에 대한 큰 도전이었으리라 생각된다.

 

    

뒤샹 가방.jpg
 


전시는 꼭 한 장소에만 지정되어 있어야만 한다?: <여행가방 속 상자>



전시회를 관람하다 보면 그의 기발한 발상 때문에 고개를 갸웃거리기도, 피식 하고 웃음이 나오는 작품들이 몇몇 있었다. 그중 기억에 남는 한 작품이 <여행가방 속 상자>이다.


사실, 뒤샹은 예술 개념뿐만 아니라 ‘전시’라는 개념을 깨는 데도 도전했다. 그는 자신의 작품이 전쟁 중에 사라지거나 파손될 수 있는 것에 염려하여 작품을 가방 속에 넣어 다녔다. 작품 <샘>은 예술의 보다 근원적이면서도 본질적인 개념에 대해 고민하게끔 만드는 동시에 평범한 일상 속 사물을 예술로 인증하는 데 필요한 미술관 제도의 역할을 짚어 보았다. 그와 반면에 작품 <여행가방 속 상자>는 마치 여행 갈 때 갖고 가는 캐리어처럼 ‘들고 다니는 미술관’으로서 미술관이나 갤러리 중심의 전시 방식을 뛰어넘는 새 전시 개념을 제시한다.

 


 

한번쯤은, 우리가 고민해볼 만한 문제.



전시회를 다 관람하고 난 후, 뒤샹에 대한 호기심이 부풀어 올라 개인적으로 조사를 더 해 보았다. 그러던 중 흥미로운 질문 하나를 발견하여 같이 고민해보고자 가져와 보았다.

 


예술작품을 예술로 인증해주는 것은 무엇인가?

예술가인가? 관객인가?

미술관 같은 예술기관인가?



지금껏 뒤샹에 대해 알아본 필자로선, 이에 대한 대답으로는 뒤샹이 한 말로 충분히 납득할 수 있다 생각된다.



“예술가라면 진정한 대중이 나타날 때까지

50년이고 100년이고 기다릴 줄 알아야 합니다.

바로 그 대중만이 제 관심사입니다.”

 

    

 

예술이란?



다시 돌아가 맨 처음, 필자가 했던 질문을 떠올려 보자. 지금껏 뒤샹의 작품들은 ‘예술적인 작품으로서의 가치’를 지니는가?


이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선 ‘예술’의 정의를 알아보아야 한다. 사전적 정의의 ‘예술’은 ‘특별한 재료, 기교, 양식 따위로 감상의 대상이 되는 아름다움을 표현하려는 인간의 활동 및 그 작품.’이다. 그러나 사람마다 기준이 다른 ‘아름다움美’에 현혹돼서는 안 된다. 즉 ‘예술’은 시각적인 것이 아닌 개념적인 것에 집중해야 한다.

   

모호하게 느껴진다면, 질문 하나를 덧붙이겠다. 예술가에겐 손재주가 중요한가? 아니면 창의적인 발상이나 계획(idea)을 수립하는 것이 중요한가?


뒤샹의 작품들을 보면 시각적으로 화려하거나 거대하진 않다. 그러나 그의 기발한 발상이 화려하면서도 거대하다고, 필자는 생각이 든다. 결국 '예술'은 남들이 미처 보지 못하고 스쳐지나간 것을 찾아내어 색다르게 표현하는 창의력이야 말로 가치를 지닌다고 생각든다. 정리하자면, '뒤샹의 작품들은 예술적인 작품으로서의 가치를 지니는가?' 라는 질문에는 "YES"라고 대답할 자격이 주어진다.


 


마지막 한 마디



뒤샹은 기발한 발상으로 '예술'에 대해 물음표를 던지게끔 만들어 주었다. 이 점에서는 무척 대단한 도전이었기에 박수 쳐줄만 하다. 여기서는 다루지 않지만 살짝은, 비판적으로도 보아야 할 면이 존재하니 기회가 된다면 마르셀 뒤샹이라는 아티스트에 대해 더 알아보면 좋겠다.


마지막은 마르셀 뒤샹의 <창조적 행위>(1957)에서 발췌한 것으로 마무리 지으려 한다. 전시회 팜플렛 맨 뒷장에 있던 발췌문으로, 인상깊은 마르셀 뒤샹의 말이니 길더라도 읽어보는 것이 어떨까?

 

*


“나는 예술이 나쁠 수도, 좋을 수도, 혹은 그저 그럴 수도 있지만 어떤 형용사를 쓰건 우리는 그것을 예술이라고 불러야 하고, 나쁜 감정이 여전히 감정인 것처럼 나쁜 예술 역시 예술이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내가 ‘예술 계술(art coefficient)’를 말할 때 나는 위대한 예술만을 가리키는 게 아니며 (나쁘건 좋건 그저 그렇건)그저 ‘날 것 상태’의 예술을 만들어내는 주관적 메커니즘을 묘사하고 있을 뿐임을 이해해야 한다. 창조적 행위를 할 때 예술가는 전적으로 주관적인 일련의 반응을 통해 처음 의도했던 바를 구현한다. 그것을 구현하기 위한 그의 분투는 노력과 고통과 만족과 거절과 결단의 연속이고, 이것 역시 적어도 미적인 차원에서는 온전히 의식될 수 없고 돼서도 안 된다. 이 분투의 결과가 의도와 구현 사이의 차이, 예술가가 인지하지 못하는 차이다.


결과적으로 창조적 행위에 동반되는 일련의 반응에는 어떤 연결 고리가 빠져 있다. 예술가가 자신의 의도를 온전히 표현하지 못했음을 나타내는 차이, 그가 구현하고 의도했던 것과 실제 구현한 것 사이의 이 차이가 바로 작품에 포함된 개인적 ‘예술 계수’다. 즉, 개인적 ‘예술 계수’는 표현되지 않았으나 의도한 것과 의도하지 않았으나 표현된 것 사이의 산술적 관계와 같다. 오해를 막기 위해 우리는 이 ‘예술 계수’가 여전히 날것 상태인 예술의 개인적 표현이며, 당밀에서 순수한 설탕을 뽑아내듯 관객에 의해 ‘정체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이 계수의 숫자는 관객의 판결에 어떠한 영향도 끼치지 않는다. 창조적 행위는 관객이 변성 현상을 경험할 때 또 다른 측면을 띤다. 비활성 물체를 예술작품으로 변화하며 실체의 변성이 실제로 일어났고, 이제 관객의 역할은 미학적 저울로 작품의 무게를 가늠하는 것이다. 대체로 창조적 행위는 예술가 혼자서 수행하는 게 아니다. 관객은 작품의 내적 조건들을 해독하고 해석함으로써 작품이 바깥세상과 접촉할 수 있도록 해주고, 이 과정을 통해 창조적 행위에 자기만의 기여를 하게 된다. 이것은 후대가 최종 판결을 내리고 때때로 잊혀진 예술가들을 되살릴 때 훨씬 더 자명해진다.




참고 문헌

-시공아트 052 현대 미술의 혁명가 <마르셀 뒤샹>

-마르셀 뒤샹 관련 여러 지식백과 및 나무위키 등

-책 '방구석 미술관', '서양 미술사'

-[뉴시스]기사-(박현주 아트클럽)



[김가영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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