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아'다르고 '어'다르다 [사람]

곱씹는 뻔한 말 ver.2
글 입력 2019.05.04 0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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꽤 오래전 일임에도 불구하고, 아주 사소한 일임에도 불구하고 기억에 박히는 사건들이 있다. 이전에 샤로수길에 갔을 때다. 남자 친구와 맛난 것을 먹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지하철을 타러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는 티라미수 집이 보였고, 한 손에 주전부리를 사들고 집에 가는 여유와 행복함을 알기에 우리는 그 가게로 들어갔다. 열심히 티라미수 종류를 고르고, '집 가는 길 달다구리 1개!'라는 소확행을 실행하려 카드를 내밀었다. 그리고 카드를 받은 점원은 포스기에 카드를 몇 번 꽂아 보더니 이렇게 말했다.


"다른 카드 있으신가요?"


카드 잔액이 부족했던 것이다. 평소 생활비를 주별로 나눠서 소액만 들고 다니는 나이기에 결제하다 잔액부족이 뜨는 경우는 꽤 자주 겪는 일이었다. 많이 겪어본 흔한 상황임에도 티라미수 집에서의 잔액부족 상황은 다른 때와는 달랐다. 바로 위에 적은 점원의 말 때문이다.


나는 그 숱한 카드 잔액이 부족한 상황에서 저 대사를 단 한 번도 들은 적이 없다. 보통 잔액이 부족할 때 계산해주는 사람들은 "잔액부족이네요"라며 사실을 그대로 전달한다. 그리고 한결같이 잔액부족 통보를 받은 사람들은 당황하거나 머쓱해한다. 진짜 여분의 돈이 나의 수중에 있고 없고를 떠나서 그냥 괜스레 머쓱해한다. 이 레퍼토리는 내가 구매하는 사람일 때도, 계산해주는 사람이 되었을 때도 같았다.


그런데 이 당연한 레퍼토리를 티라미수 집 점원이 너무나도 간단히 깨버린 것이다. 짧고 간단한 단 3마디의 문장 덕분에 나는 일말의 당황스러움도, 머쓱함도 느낄 수 없었다. 점원의 말에는 상대를 향한 배려가 들어있었고, 그 배려 덕에 그 순간 나의 기분은 소확행 티라미수와 시너지를 내며 2배 행복한 상태가 되었다. 진짜 간단한 말인데, 너무 간단한 말인데. 여러 번 겪은 상황을 이렇게 전혀 다른 상황으로 만들다니.


티라미수 가게에서 나오며 남자 친구와 점원분이 말을 너무 이쁘게 하신다며 우리도 저렇게 말을 이쁘게 하는 사람이 되자라는 얘기를 했다. 그리고 시간이 꽤 지난 지금까지 이 순간의 기억이 생생하게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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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기억은 내가 말을 내뱉는 순간순간 떠올라 내 말을 한 번씩 곱씹게 만든다. 같은 말도 정말 토씨 하나 표정 하나 억양 조금에 천지차이 다른 말이 되어버린다는 사실을 마음에 새기게 한다. 같은 상황, 같은 내용을 전달하는데도 정말 '아'다르고 '어'다르다.


사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예의 바르고 친절한 말투를 안다. 그런데 보통 그 말투는 관계에 있어서 필요한 최소한의 기준에 따른다. 예를 들면 "무례하지 않은" 정도의 기준. 공적인 자리에서 사용해도 될만한-트집 잡히지 않을 말들. 타인과 갈등이 생기지 않을 말들. 그런데 "무례하지 않은"을 넘어 "상대를 생각하는 마음"이 들어가 있는 말들이 있다. 바로 '다정한' 말들이다.


다정한 말들은 문제가 생기지 않기 위해서 나오는 말들이 아니다. 눈앞에 있는 상대에 대해 생각하고, 배려하고, 위하는 마음에서 비롯된다. 알바를 하며 친절하지만 기계적인 서비스업 말투에 익숙해진 내가 티라미수 집 점원의 "다른 카드 있으세요?"를 단 한 번도 떠올릴 수 없던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잔액부족이네요."를 듣고 머쓱해하는 손님들을 보며, 그들의 머쓱함에 대해 생각해본 적이 없다.


누군가는 왜 굳이 친절해야 하냐고, 왜 굳이 다정해야 하냐고 반문하겠지만, 나의 다정함 예찬은 지극히 단순한 이유에서 비롯된다. 티라미수 집에서 들은 짧은 말이 나의 기분을 훈훈하고 좋게 만들었으니깐 그뿐이다. 정말 신기하게 다정한 말을 하고, 다정한 말을 듣고, 다정한 마음을 가지면 진짜 기분도 다정해진다. 마음이 더 몽글해지고, 부드러워지고, 따뜻해진다. 다정함을 받는 사람뿐만 아니라, 주는 사람도 같이 좋은 영향을 받는다.


그리고 또 하나, 다정한 말은 생각보다 어렵지 않다는 것. 현란한 말솜씨, 출중한 지식, 깔끔한 매무새, 단정한 제스처 다 필요 없고 그저 상대를 생각하는 마음 하나만 있으면 된다는 것.


이런데도 왜 굳이 다정하지 않아야 할까.






나는 성인군자가 아니라 컨디션이 안 좋을 때 사소한 일로 짜증을 내고, 괜한 사람에게 툴툴대기도 한다. 그런 날에 집에 와서 하루를 돌아보면 마음이 팍팍해졌음을 느낀다. (이보다 나은 표현이 없다.) 그럴 때마다 가만히 티라미수 집에서의 기억을 떠올린다. 그리고 마음을 갈무리하고 돌본다.


"기왕이면 다정하게"를 되뇌이며.

수많은 관계들로 이뤄진-이뤄질 나의 일상과 나를 위해서.

사소한 다정함의 힘을 믿으며 오늘도 한번 되뇌어야지



기왕이면 다정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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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민희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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