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비포 선라이즈", 불가능하지만 불가항력적인 사랑에 대한 시(詩) [영화]

글 입력 2019.04.08 0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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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포 선라이즈, 사랑을 표현하는 한 편의 시와도 같은 영화


김영하 작가의 팟캐스트를 들었다. 그가 이런 말을 했다.

"문학을 하는 사람으로서 문인들을 만나다보면, 가끔 자신이 어린 시절 얼마나 많은 백일장에서 상을 탔는지를 자랑처럼 이야기하시는 분들이 있어요. 저는 그런 문화는 조금 이상하다고 생각해요. 시를 잘 쓰는 사람들은, 예컨대, 물론 문장력도 좋아야 하겠지만 무엇보다도 '더 많은 것을 볼 수 있는' 사람들이어야 한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렇다. 때로 우리는 문화를 평가해야만 하는 역설적 상황을 마주하게 되고, 그럴 때 가장 많이 쓰이는 평가 기준 중 하나는 불가피하게 '기교'가 된다. 영화로 말하자면, 연출의 화려함이나, 사용되는 무대 장치들, 특수 효과, 스토리 전개의 긴박함, 등이 표면적 기준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평가의 필요성은 차치하더라도, 과연 그런 요소들만으로 '좋은 영화'를 제대로 분별해낼 수 있을까?

비포 선라이즈는 내용의 충실함 앞에서 기교가 얼마나 무력한지를 보여주는 영화다. 비엔나의 아름다운 풍경과 두 배우의 서로를 바라보는 눈빛, 철학적이면서도 인간적인 대사들말고는 전혀 '영화적'인 요소를 담고 있지 않은 담백한 영화지만 - 사랑을 해보았거나 사랑을 꿈꾸는 사람이라면 매혹될 수 밖에 없는 흡인력을 가진 작품이다. 고등학교 때부터 이미 네다섯 번을 보았음에도 질리지 않는다.

사랑이라는 주제는, 영화에서 제시와 셀린도 인정하듯이 정말 어려운 주제다. 그 본질을 완전하게 꿰뚫어 보는 사람은 인류의 역사에 아마 없었을 것이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분명한 건 '비포 선라이즈'를 만들어낸 사람들은 그래도 평범한 우리보다 사랑에 대해 더 많은 것을 볼 수 있는 사람들이었다는 것이다. 마치 일상의 단조로움 속에서 보석을 발견해내는 시인처럼.



죽음을 앞둔 노파와 모험을 앞둔 소년의 사랑


미국에서 비행기를 타고 온 제시와, 프랑스인이지만 잠시 할머니를 뵈러 헝가리에 다녀오는 중이던 셀린은 기차 안에서 우연히 만난다. 두 사람이 기차 안에서 대화를 나누는 장면은, '첫 눈에 반한' 사람들이 서로에게 어떤 눈빛과 반응을 보이는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그들이 처음 나눈 대화에 죽음에 관한 내용이 있었다는 것 역시 흥미롭다. 소개팅 자리에서, 자신의 직장 생활, 취미 활동, 좋아하는 드라마 등의 주제 말고 - 죽음을 처음 인식한 순간에 대해 이야기하는 걸 상상하기는 참 힘들다. 하지만 제시는 아마 셀린과의 짧은 이야기를 통해 그녀에게는 자신을 좀 더 드러내보여도 되겠다는 확신을 얻었던 모양이다. 그는 어린 시절 할머니의 죽음을 마주하던 날, 호스로 물을 쏘다가 보게 된 무지개 사이로 할머니를 보았다고 말한다.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는데 어느 순간 그녀가 사라졌고, 자신의 어린 시절을 그런 환상적인 체험들로 가득했다고 말이다.

셀린은 제시의 이야기를 듣는 순간, 아직도 꼬마아이의 마음을 간직한 제시에게 매료되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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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시는 비엔나에 내려서 혼자 하루를 보낸 다음 비행기를 타고 미국으로 갈 예정이었다. 그는 내리려다 말고, 다시 돌아와 셀린에게 자신과 내려 하루를 함께 보내자고 설득한다. 셀린은 기다렸다는 듯 그의 제안에 응하고, 그렇게 그들의 짧은 여행이 시작된다.

그들의 여행을 훔쳐 보면서 내가 구경꾼으로 얻은 재미에는 너무나도 많은 것들이 있는데, 그 중 몇 가지를 꼽자면 이렇다.

1. 레코드샵에서 'Come here'이라는 제목의 재즈풍 사랑 노래를 들으며, 갓 사랑에 빠진 둘은 서로를 흘낏흘낏 쳐다본다. 혹여나 자신이 쳐다보는 걸 들킬까봐 걱정하듯이, 눈이 마주치려는 순간에 가까스로 눈을 벽 쪽으로 돌리면서. 그 모습을 보고 미소짓지 않는 건 불가능하다.

2. 제시와 셀린은 참 다르다. 제시는 새로운 모험을 찾아 떠나고 싶지만 아직 미래가 두려워 움츠리고 있는 소년이라면, 셀린은 그녀가 직접 말했듯 죽기 직전이라 모든 기억을 미화시킨 노파처럼 이상적이고 정열적이다. 자존심도 강하고 상당히 현실적인 제시와 달리 셀린은 사랑에 물불 가리지 않고 뛰어드는, 당돌하고 낭만지향적인 여성이다. 너무도 다른 두 명이 그 다름 때문에 서로에게 빠지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로의 차이로 인해 불편해하기도 하는 모습은 마치 한 연애의 압축판을 보는 것과 같은 흥미로움을 선사한다.

3. 제시와 셀린은 자신의 상처에 대해서, 그리고 늘 스스로를 불안하게 하는 대상에 대해서 스스럼 없이 털어 놓는다. 이전 연애들에서 얼마나 상처 받았는지를 격앙된 목소리로 토로하는 그들의 모습은, 앞으로 다가올 상처를 예감하면서도 다시 사랑에 빠질 수 밖에 없는 자기 자신에 대한 분노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셀린은 이전 남자친구를 죽이고 싶다는 이야기를 정신과 의사에게 했던 조금은 충격적인 에피소드까지 털어놓는데, 그 이야기를 한 뒤 혹여나 제시가 놀랐을까 걱정하는 그녀의 모습은 현실 연애 속 나의 모습을 떠올리게 만들기도 했다.


 
신이 있다면, 그는 '나'와 '너'의 사이 어딘가에 있을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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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포 선라이즈'에는 정말 마음에 꽂히는 대사들이 많다. 그 중에서도 내가 가장 좋아하는 대사는, 셀린의 대사 중 '만일 신이 있다면, 그는 '나'에게 있는 것도 아니고, '너'에게 있는 것도 아니고, 나와 너 사이의 어딘가에 있을거야'라는 대사이다.

만일 신이 '나'의 안에 있다면, 나는 전지전능하여 내가 사랑하는 상대방의 마음과 생각을 꿰뚫어볼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우리는 그런 능력을 절대 가질 수 없기에 사랑에 상처받고 배신 당한다. 그리고 만일 신이 '너'의 안에 있다면, 내가 사랑하는 그 사람은 내 마음과 생각을 꿰뚫어보고 본인이 원하는 대로 나를 조종할 수 있어야 한다. 혹은, 나의 욕구를 바로 알아채 그것을 손쉽게 충족시켜줄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연애를 하면서 우리는 늘 '너는 왜 이렇게 내 마음을 몰라?'라고 소리치게 된다.

결론적으로 사랑을 하는 주체인 인간의 안에는, 전지전능함이 없다. 우리가 조금이나마 영원과 진리와 아름다움과 신성함에 다가서게 되는 방법은 - 셀린의 말에 따르면 - 서로에게 더 가까워지는 것이다. 하지만 신의 실체를 발견하는 것이 불가능하듯이, 서로에게 완벽히 닿아 합일되는 일 역시 불가능하다. 그저 끊임 없이 시도할 뿐이다.

이와 같은 생각을 하며 영화를 본다면, 마지막 장면에 셀린이 하는 말도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된다. '나는 그 사람을 완전히 알게 되었을 때에야 비로소 그를 완전히 사랑할 수 있을 것 같아.' 혹자는 사랑의 설렘은 시간이 지나면 바래질 수 밖에 없다고 하지만, 낭만주의자 셀린의 눈에 그가 말한 사랑은 '진짜'가 아니다. 진정한 사랑이라면, 상대방의 마음에 조금이라도 더 다가서려는 시도 속에서 더 깊어지고 아름다워진다.



조금이라도 더 내 눈을 봐줘, 마음놓고 너를 사랑하게 해줘


셀린과 제시는 사실 마음 속으로는, 이 밤이 마지막이 되는 일이 정말 끔찍하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들은 지금의 시간이 자신에게 얼마나 큰 의미를 갖는지를 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에 빠진 사람이 언제나 그렇듯이 그들은 두려워한다. 혹시나 자신의 마음이 상대방의 마음과 같지 않을까봐, 애써 침착한 척 하며 자존심의 가면을 쓴다. 그리고 '성숙한 어른의 밤'을 보내자며 오늘 하루를 멋지게 장식하는 것으로 인연을 매듭짓자고 약속한다.

하지만 그 다짐은, 모두가 예상할 수 있듯이, 진짜 이별의 순간이 닥쳤을 때 깨진다. 기차 앞에서 서로를 보는 눈빛에는 다급함이 가득하다.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언제 다시 만나야 할지를 이야기한다. 5년 후? 1년 후? 결국 6개월 후 같은 장소에서 만나기로 한 그들은, 편지 주고 받기와 같은 '우울한' 행동은 하지 않기로 또다시 바보 같은 약속을 한다. 그렇게 기차는 출발하고, 비행기는 떠난다. 사랑으로 충만했던 하루가 끝난 뒤 일상으로 돌아온 셀린과 제시의 표정은 방금 시들어버린 꽃처럼 음울하다.

과연 그들은 다시 만날 수 있을까? 그들의 인연이 계속 이어질까? 만일 이어진다면, 어떤 모습으로?

이 궁금증은, '비포 선라이즈'가 나온 뒤 8년이 지난 뒤 똑같은 배우 에단 호크와 줄리 델피가 출연한 '비포 선셋'에서 해소할 수 있다. '비포 선셋'은 이후 '비포 미드나잇'으로 이어진다. 이 시리즈들은 20년에 걸쳐 제작되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같은 배우와 감독의 조합으로 만들어졌다. 거의 기적에 가까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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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시는 교회 안에서 셀린에게 퀘이커 교도들의 결혼식에 대해 이야기한다. 퀘이커 교도들의 결혼식에서 신랑과 신부는 서로를 마주본다. 한 시간이 넘도록, 가만히 두 눈으로 상대방의 두 눈을 응시하다가 신의 계시가 내려왔음을 느끼는 순간에 부부가 된다.

인간의 신체 중에서 마음과 가장 닮은 부분이 있다면, 그것은 눈일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두 눈을 마주하면서 사랑을 시작하고, 두 눈을 회피함으로써 사랑을 끝내게 되나 보다.

신랑과 신부가 한 시간이 넘도록 서로를 뚫어지게 쳐다보고 난 뒤에도 이 사람과의 결혼을 확신할 수 있다면, 그제서야 그들은 평생을 함께할 동반자를 얻었다고 공공연히 알릴 수 있게 되는 것일 테다.

마지막으로, 셀린의 아름다운 대사와 함께 이 글을 마치고 싶다.

"결국 우리가 살면서 하는 모든 일들은, 조금이라도 더 사랑받기 위한 노력이지 않을까?"


[이창희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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