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아득한 바다의 밑바닥을 향해 : 스위밍 레슨 [도서]

글 입력 2019.04.07 00: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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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는 내내 바다 향이 가득히 느껴지는 책이었다. 바다의 짭짤한 내음과, 시원하면서도 끈적한 촉감, 태양이 아름답게 물결을 비추는 풍경과 새벽녘의 음습한 공기까지. 그 모든 게 느껴지는 바다 같은 책이었다.


도무지 깊이를 예측할 수 없는 고요한 수면처럼, 잔잔하다가도 돌연 변덕스럽게 모든 걸 집어 삼키는 까만 파도처럼 모든 스토리는 바다처럼 불어 닥치며 그 속내를 점차 드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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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길 콜먼은 서점 2층 창문으로 인도에 서 있는 죽은 아내를 보았다. (9p)


책의 첫 문장부터 시선을 끈다. 말없이 떠나간, 그래서 죽었다고 믿고 있던 아내를 본 길 콜먼은 그녀를 찾아 부리나케 서점 밖으로 달려 나간다. 잿빛 하늘과 강풍에 부서지는 파도. 죽은 아내가 돌아온 기이한 사실을 대변이라도 하는 듯 날씨는 음습하고 맹렬히도 쓸쓸하다. 그녀를 향한 애처로운 외침은 바람에 휩쓸려가 버렸고, 그에게는 그녀를 찾아야 한다는 생각뿐이다.


- 오늘이 그의 생각처럼 2004년 5월 2일이라면 잉그리드가 사라진 지 정확히 11년하고 10개월째였다. 그녀를 향한 사랑을 좀 더 확실하게 표현해야 했다는 생각도 들었다. (13p)


그녀의 흔적을 좇으려 애쓰다 결국 난간 아래로 떨어지게 된 길 콜먼. 차가운 바위 사이로 떨어지는 순간에도 그는 사랑하는 잉그리드를 떠올렸다. 이토록 로맨틱한 남자는 어째서 사랑하는 그녀를 떠나보내야 했을까.




어두운 진실을 담은 편지




길에게


새벽 4시인데 잠이 오지 않아요. 이 노란색 노트를 발견하고 당신에게 편지를 써야지 했어요. 실제로는 하지 못한 말들, 시작부터 우리의 결혼에 관한 모든 진실이 담긴 편지를 말이에요. 당신은 내가 상상하거나 꿈꾸거나 지어낸 이야기라고 주장할 내용도 있겠지만 어쨌든 내가 보는 시선이에요. 내 진실이에요.


우리가 처음 만난 날을 기억하나요?


(25p)



죽음을 앞두고도 잉그리드를 그리워하는 길 콜먼의 현재와, 잉그리드의 편지를 통해 밝혀지는 과거의 이야기들이 교차되며 서사가 진행된다. 우리가 처음 만난 날을 기억하나요? 그 뒤에 그녀가 담담히 풀어내는 낭만적이면서도 비밀스러운 첫 만남에 대한 이야기를 보고 있자면, 여느 연애편지와 다르지 않게, 심지어는 사랑스럽게 느껴지기도 한다.


그러나 그 한 문장이 시작되기 전까지는 애달픔과 동시에 이유 모를 비장함이 느껴진다. 편지는 표현 그대로 '서정적인 미스테리'를 조금씩 밝혀나가고, 이는 잉그리드가 써내려가는 아름답지 않은 '진실'이다.



루이즈와 나는 잔디밭에 들어가지 말라는 푯말을 무시하고 대학 도서관 바깥쪽 잔디밭에 앉아서 앞날에 대해 이야기했어요. 물론 어떻게 될지는 모르지만 우리가 우물 안 개구리라고 치부하는 (전업주부로 살림하고 애들을 키우는) 엄마들의 삶과 다를 거라는 데는 동의했죠.


(25p)



대학생 시절의 잉그리드는 아이, 남편, 집, 남자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 자신만의 삶을 꿈꿨다. 넓은 세상을 향해 나아가고자 했던 그녀였지만 애석하게도 우리는 그녀가 누군가의 아내이자 엄마가 되어버렸다는 사실을 안다. 그녀만의 삶을 꺾어버린 건 당신의 사랑, 길 콜먼이다.




사랑이라는 오만




그러던 어느 날 내가 소년과 소녀, 성냥갑에 대해 쓴 단편 과제가 우편함에 있었어요. 당신은 점수를 매긴 다음 “그는 파도 모양 같은 그녀의 윗입술을 보고 그 좁은 물길을 자신의 엄지로 누르는 상상을 하곤 했다.”라는 문장에 밑줄을 친 뒤 “제발 날 봐줘.”라고 휘갈겨 썼죠.


(79p)



길과 잉그리드는 대학교 교수와 제자 관계였다. 20살 가까이 차이 나는 사제 간의 사랑이라니, 가당치도 않은 나이 차이에 불쾌함까지 느껴진다. 그러나 이들의 사랑은 퍽 로맨틱하고 절절하게 표현되어있다. 마치 이 사랑이 가장 감미롭고 특별하다는 듯이.



“이건 권력 남용이야. 넌 그 사람 학생이야. 역겨워.”

“난 그를 사랑해.” 이번에는 내가 화난 어조로 말했어요.

“그 남자도 널 사랑한다고 생각하니? 이런 일이 그 남자한테 처음일 것 같아?”

“우린 결혼할 거야. 그는 ……가족을 원해.”


(162p)



사랑에 대한 확신이 생기는 순간 오만이 시작된다. 그에게 누구보다 특별한 사람이 될 수 있을 것이라는 자만과, 그가 나를 영원히 떠나지 않을 것이라는 요상한 확신. 이러한 오만이 사랑과 함께 피어오르기 때문에 우리는 자주 실망하며, 이별 앞에서 그렇게도 애달파한다.


고작 대학생이었던 잉그리드도 마찬가지였다. 길에게 있어서 ‘여자’란 결혼할 여자와 잠자리를 같이할 여자라는 두 가지의 부류가 존재할 뿐이었다. 사랑에 빠진 잉그리드에게는 제 3의 ‘특별한 여자’가 될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다. 물론 이것도 사랑에 빠진 누군가의 오만일 뿐이었지만. 그녀는 결국 자신만의 삶을 포기한 채 누군가의 아내가 되어야만 했고, 엄마가 되어야만 했다.




스위밍 레슨



총 45개의 챕터로 이루어진 이 책은 도무지 발이 닿지 않는 깊은 바다 같았다. 서정적이고 유려한 문장들은 그녀의 삶에 도사린 비극을 더욱 도드라지게 만들어 주었는데, 머리가 띵해질 만큼 충격적인 진실이 밝혀질 때면 잔잔하던 바다의 예측할 수 없는 파도 속으로 휩쓸려 가는 기분이 들었다.


자신만이 특별한 사랑이 될 수 있을 것이라는 오만은 길의 추악한 본모습을 통해 반증되었고, 모성애 따위는 느껴지지 않는 아이들을 힘겹게 길러내며 잉그리드는 본인을 위한 삶을 철저히 지워나갔다. 더 이상의 스포일러는 하고 싶지 않다. 유려한 문체가 가져다 주는 자극적인 반전들을 내 글로써는 도저히 옮길 수가 없다.


한 가지 이야기를 하자면 이 서사는 살인자가 남긴 단서를 찾아나가는 미스테리와는 조금 다르다. 그저 잉그리드가 남긴 사랑의 기록이고, 모든 기록 속에 담긴 아름답지 않은 진실들은 결국 파멸의 원인이 된다. 낭만적인 첫만남의 이야기가 사실은 파멸을 향한 첫걸음이었던 것처럼 모든 순간은 이유가 되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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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그리드의 유일한 안식처는 ‘수영’이었다. 잠이 오지 않는 새벽이면 몸을 옥죄는 모든 것들을 벗어 던지고 해변으로 가 알몸으로 수영을 했다. 척박한 땅 위에서 비참하게도 자신의 모든 걸 잃어버렸지만, 물속에서 그녀는 오롯이 잉그리드 자신이 될 수 있었다.


"뼈는 바닷물에 씻겨가고 영혼은 모래로 돌아올지어다. 그대를 사랑하는 우리의 마음은 영원할지니."


뇌리에 남은 이 문장은 바다로 향한 삶이 결코 끝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것을 나타내고 있는 것 같다. 누군가는 잉그리드가 끝이 보이지 않는 바다를 향해 걸어 들어갔을 것이라고, 직설적으로 말하자면 결국 죽고 말았을 것이라고 말하지만 책을 덮은 후에 드는 생각은, 글쎄. 잉그리드가 살아있을 것만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스위밍 레슨이라는 제목처럼 드넓은 바다에서 해내던 '수영'이 그녀에게 가르쳐 준 것은, 그 무엇보다도 중요한 자신만의 삶이다. 거친 파도 속에서 갑작스레 마주한 죽음의 문턱에서 잃고 지냈던 삶에 대한 의지를 얻어냈고, 물 속에서는 그 어느 때보다 잡념 없이 '나'에게만 집중할 수 있었으니.


*


옛 그리스인들은 비참하고 절망적인 인생을 설명하기 위해 신화에 집착했다. 이유는 간단하다. 내 안에서 찾을 수 없는 행복을 그 밖에서 애써 찾아 해맨 것이다. 때로는 우리의 삶도 그렇다. 돈과 결혼, 사랑 따위의 신화에 집착하곤 하니까. 어쩌면 우리 모두는 나를 위한 꿈을 안고 사는 잉그리드이며, 살아가는 동안 그 마음은 영원할 것이다. 온몸을 감싸 안는 바다로 향하는 것을 주저하며 살기엔 이 시간들이 조금 아까운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바다가 가르쳐 줄 세상은 끝 없이도 드넓을 테니.



[김수민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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