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가 처음 만난 날을 기억하나요?"
어둡고 축축한 시작과 달리 건조한 편지지 감촉 위로 예측 가능한 전개가 이어졌다.
서른 아홉의 교수가 이십대 초반의 학생에게 작업을 거는 건 주변에서 뜯어 말려야 할 일이다. 또래의 여성이 아닌 세상물정 모르는 어린 여자를 상대로 한다는 건 경험이 있는 사람은 알 수 있는 큰 흠이 있기 때문이다. 잘생긴 외모와 작가라는 직업을 한층 돋보이게 하는 종잡을 수 없는 태도에 경험이 적은 어린 여자는 쉽게 넘어간다. 남들과 다른 무언가가 있을 것 같아서. 하지만 길이 가진 것은 외모와 과거의 이력 밖에 없다. 길게 말할 것 없다, 나쁜 놈이다.
그 나쁜 놈에게 필요한 여자는 두 종류였다. 같이 자거나, 결혼하거나. 잉그리드는 제 3의 유형이 되고 싶었지만 전자에서 후자가 되었다. 그 과정을 거치는 동안 둘은 학교에서 쫓겨나게 되었다. 사랑의 가혹한 현실일까? 물론 아니다. 학교가 피하고 싶은 추문일 뿐이었다.
"당신이 집 안에서 자지 않는 날이면
밤마다 수영을 하러 갔어요"
나쁜 놈은 결혼하고서도 나쁜 놈이었다. 제대로 된 돈을 벌지 않았고, 가정을 돌보지도 않았다. 집 옆에 위치한 작업실에서 외도를 하다 들켰고, 아내와 같이 여행을 갔다가 아내가 아닌 다른 여자와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아내의 도움을 받아 완성한 책이 성공한 뒤에는 유명세를 이용해 다시 외도를 했다. 외도 상대 중 잉그리드의 오랜 친구가 있다는 것과 집에 길의 사생아가 찾아왔다는 것까지 정리하려니 그저 한숨만 나온다.
나넷은 아빠가 외도 하는 걸 알았고, 어린 플로라는 언제 아빠가 집에 오는지 엄마에게 물었다. 잉그리드는 잠이 오지 않는 새벽 편지를 써가면서 길에 대한 마음을 적어나갔다. 하지만 점차 적어나가는 건 길을 향한 마음이 아니라 말하지 않은 진실이었다. 아니, 말하지 않은 게 아니라 말로 내뱉는 과정을 통해 현실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던 건지도 모르겠다.
길 없이 지내던 잉그리드는 길 없이도 위험에서 헤쳐 나왔다. 나는 법을 배우기도 전에 버려진 어린 새 같고 너무 일찍 바다에서 헤엄쳐 나온 물고기 같던 잉그리드는 고난과 시련을 통해 혼자서 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 그리고 반복하던 일상 속에서, 일상의 한 조각이었던 수영을 하면서 돌연 다른 곳으로 사라졌다. 본인의 의지로.
“이 편지와 나머지 편지들을 발견하면꼭 찢어서 태워 버려요.절대로 아이들이 읽게 하면 안 돼요."

스위밍 레슨(SWIMMING LESSONS)지은이: 클레어 풀러(Claire Fuller)옮긴이: 정지현분량: 372쪽정가: 13,800원출판사: 도서출판 잔발행일: 2019년 3월 18일판형: 130×195(mm) / 페이퍼백ISBN: 979-11-965176-3-2 038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