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거울 앞에서 너무 많은 시간을 보냈다 [도서]

시선에 갇힌 우리들의 이야기
글 입력 2019.03.29 0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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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뻐지고 싶은 건 여자들의 본능이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더 이상 제재를 가할 선생님이 없어진 우리는 해방감을 만끽하며 신나서 안경을 벗고 화장을 하고 염색이나 파마를 했다. 특히 시력이 많이 안 좋은 나는 두꺼운 안경을 벗자 그 변화가 유독 크게 다가왔다. 그때 내겐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당연히 렌즈를 껴야 했고 당연히 화장을 해야 했으며 당연히 치마를 입어야 했었다. 환한 얼굴로 예뻐졌다고 말하는 반응을 얻기 위해선 어쩔 수 없었다. 그리고 나는 진심으로 행복했었다. 예쁘다는 말을 들을 수 있어서, 남자의 관심을 받을 수 있어서, 사람들의 대우가 호의적이어서 행복했다. 내 친구는 화장품을 골라주고 옷을 골라주며 나를 더 예쁘게 만들어주기 위해 노력했다. 매일 아침 거울을 보며 어떻게 해야 더 예쁜 모습을 보여줄 수 있을지에 대해 고민했다. 대학교 1학년, 그때의 내가 가장 좋아했던 말은 ‘예쁘다’였다.

 

그때의 나는 정말 ‘자기만족’ 때문에 나를 꾸몄을까? 20살의 내가 그 질문에 어떤 답을 내렸을지 알 수 없다. 그런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져본 적도 없었기 때문이다. 마치 중학생이 고등학생이 되는 것처럼 대학생이 된 내가 화장을 시작한 건 너무나 자연스러운 과정이었다. 너무 자연스럽고 당연한 것이어서, 주변의 모든 친구들이 그 과정을 따르고 있어서 의심할 수가 없었다. 예쁜 건 곧 좋은 것이었다. 그래서 쉽게 사람들에게 예쁘다고 칭찬했고 예쁜 여자연예인들의 미모를 찬양했고 내 얼굴의 모자란 구석을 찾아 가리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그때의 내가 자의로 꾸민 건지 타의로 꾸민 건지 모르겠지만 분명히 기억나는 건 집에 오자마자 렌즈를 벗었을 때 찾아오는 편안함이었다.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나는 화장도 하지 않고 안경을 끼고 있고 후드집업에 청바지를 입고 있다. 그럼에도 문득 예뻐지고 싶은 순간이 있다. 긴 머리에 진한 화장을 하고 하늘거리는 원피스를 입은 여성을 보고 ‘나도 저렇게 해볼까’ 라는 생각이 드는 순간이 있다. 이 땅에 여성으로 살고 있는 이상, ‘예쁨’으로부터 완전히 해방되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러네이 엥겔른의 <거울 앞에서 너무 많은 시간을 보냈다>는 그런 나의 흔들림을 잡아주는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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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네이 엥겔른 <거울 앞에서 너무 많은 시간을 보냈다>
 

 


여성은 예쁘지 않을 권리가 없다.



이 책은 저자 러네이 엥겔른이 직접 인터뷰한 수많은 여성의 이야기다. 그 여성들은 모도 외모강박에 시달린 적이 있거나 지금도 시달리고 있는 사람들이다. 인터뷰를 읽으면 읽을수록 책 속의 그녀들과 내 주변의 사람들을 구분할 수 없었다. 책에 거울 속 내 얼굴이 별로여서 약속을 취소해본 여자들의 이야기가 나왔다. 그리고 강의실에서 아침수업에도 꼬박꼬박 풀 메이크업을 하거나 화장을 하지 않으면 마스크로 얼굴을 가리고 수업을 듣는 학우들이 떠올랐다.

 

여자는 예뻐야 한다. 그러므로 예쁘지 않은 여자는 부끄러워해야 하며 여자라면 자고로 항상 완벽한 모습을 하고 있어야 한다. 이러한 생각은 모든 여성의 내면에 완전히 스며들어있다. 그 여성들이 미스코리아 대회에 나가서 그런 게 아니다. 텔레비전에 출연해서 그런 것도 아니다. 모든 순간, 모든 환경에서 여자는 예뻐야 한다. 그래서 학생이 강의실에서 수업을 듣는 순간에서조차 예뻐야 한다는 강박이 우리를 괴롭힌다. 우리는 이 강박이 결코 개인의 문제가 아님을 잘 알고 있다. 책에는 여성들이 외모강박을 느끼는 수많은 계기를 담아내고 있다. 그 많은 사례들을 읽으며 든 생각은 외모강박은 너무나 쉽게 여성에게 찾아온다는 것이었다.

 

어렸을 때 여러 개그프로그램에서 일관적으로 하는 개그가 있었다. 여성에 대해 예쁜 사람과 못생긴 사람이라는 이분법적인 구분을 하고 못생긴 여성을 차별대우하거나 남성이 거부하면서 웃기는 개그였다. 나는 그게 하나도 웃기지 않았다. 저 여성이 차별대우 받는 이유가 단지 다른 여자보다 못생겼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납득할 수 없었다. 저 차별대우 받는 여자는 얼마나 기분이 나쁠지에 대해 걱정하기도 했다. 그리고 그런 식의 개그는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개그 프로그램은 한 예시일 뿐, 사실 일상에서 마주하는 모든 것들이 다 여성은 예뻐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그 중에서도 가장 강력하게 그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은 미디어다. 너무나 강력해서 어느 누구도 피해갈 수 없다.

 


미디어상의 이상화된 여성 이미지가 외모 강박적인 문화를 만들어낸 유일한 원인이라고는 할 수 없다. 그러나 도처에 이런 이미지가 존재한다는 점에서 영향력을 과소평가해서는 안 된다. 당신은 방호벽 뒤에 숨으면 미디어로부터 안전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고 싶겠지만 그건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다. 미디어의 영향력은 은밀히 퍼져나가고 이를 막아줄 마법의 결계 따윈 존재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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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의 영향력은 모두가 인정할 만큼 강력하다. 그리고 그 미디어는 우리들에게 지속적으로 ‘예쁜 여성’만을 보여준다. TV 속 여자연예인을 보며 나도 저렇게 생기고 싶다거나 나는 왜 저런 몸매가 될 수 없을까, 라는 생각을 안 해 본 여자가 있을까? 미디어 속의 세상엔 못생기고 뚱뚱한 여자는 존재하지 않는다. 아주 일부 존재하긴 하지만 온전한 대우를 기대할 수 없다. 어떤 능력을 지니고 있든 못생긴 이상 웃음거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기 때문이다. 좋은 대접을 받는 건 예쁜 여성들의 몫이다.

 

그래서 여자연예인은 어느새 기준이 되어버렸다. 여자연예인처럼 성형하고 화장하고 몸매를 가꾼다. 여성의 대화에서 특정 연예인을 닮았다는 칭찬은 빼놓을 수 없는 필수코스이다. 그리고 그 기준에 미치지 않는 여성에게 그 기준에 부합할 것을 요구한다.

 

미디어뿐만 아니라 사람들이 ‘너 생각해서 하는 말’이라며 내뱉은 외모 지적 역시 외모 강박을 부추기는 큰 원인이다. 책에서도 대부분의 인터뷰 당사자들이 가정에서 들은 말, 학교에서 들은 말로 자신의 외모를 불만족하기 시작했다.




시선의 감옥에서 탈출하기



우리는 이제 더 이상 시선의 감옥에 갇혀있을 수 없다. 왜 우리는 아침 일찍 일어나 화장으로 시간을 보내고 추운 겨울에도 치마를 입고 건강을 악화시키면서까지 다이어트를 할까? 이 모든 게 자기만족에서 비롯되는 것이라면 왜 우리는 지금 이 순간에도 만족하지 않은 상태로 거울을 보는 것일까?

 

책에서 바디 토크가 언급된다. 여자들끼리 있을 때 누군가가 갑자기 자신의 몸매에 대해서 불평하면 친구들이 칭찬하면서 위로해주는 대화를 말한다. 아마 수많은 여성이 친구로부터 갑작스럽게 자기 살찌지 않았냐는 물음을 받아본 경험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모두 입을 모아 이렇게 대답했을 것이다. ‘아니야, 너 날씬해.’ 어디 몸매뿐이겠는가. 거울이 보이면, 연예인 사진이 보이면 바로 자신의 외모를 비하하는 말들이 쏟아진다. 그리고 또 기계적으로 예쁘다고 칭찬해준다. 문제를 인식하기 전엔 내게 이 바디토크는 습관이었다. 나 역시도 친구들에게 뜬금없이 내 외모를 비하한 적이 많았다. 엎드려 절 받기라도 예쁘다는 말을 듣고 싶었었다. 하지만 문제를 인식한 이후부터 나는 이 바디토크가 불편해졌다. 상대방이 원하는 반응을 해야 하는데 그게 나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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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가 알고 있겠지만 전 세계 대부분의 여성이 자신의 외모에 대해서 부정적으로 생각한다. 이 땅 위의 많은 여성이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지 못하고 다른 아름다운 여성과 자신을 비교한다. 이런 자기비하를 달래주기 위해 상대방의 외모를 칭찬해주는 건 올바른 방법이 아니다. 내가 바디토크에서 상대방이 원하는 답을 하지 못한 것도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자신이 못생겼다고 생각하는 여자에게 해야 할 말은 예쁘다가 아니라 예쁘지 않아도 된다는 말이다. 모두 이 사실을 기억하고 있어야 한다. 우리는 꼭 예쁠 필요가 없다.

 

책은 도브식 캠페인을 부정적으로 바라본다. 도브식 캠페인이란 상대방의 자존감을 높이기 위해 ‘당신은 당신이 생각하고 있는 것보다 아름답다’는 메시지의 캠페인을 말한다. 앞서 언급했듯이 우린 예쁘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책 끝 부분에 긴 분량을 차지하는 해결책 부분을 보면 이 책의 해답이 도브식 캠페인과 큰 차이가 있는지에 대해 의구심이 든다. 자신의 몸을 있는 그대로 사랑하라는 메시지는 따뜻하지만 여성의 외모강박을 개인적인 문제로 축소시키는 메시지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자신의 몸을 남한테 보여주기 위한 부위가 아닌 산을 등반하고 글을 쓰는 등의 행동의 도구로 인식하라는 부분은 꽤 인상적이었다.

 

외모강박은 여자의 삶과 떼려야 뗄 수 없는 문제이다. 성형외과 광고, 여자연예인의 화보, 길거리의 아름다운 여성들. 이 세상엔 여성을 아름다움의 감옥에 가두는 것들이 너무나 많다. 하지만 우린 이미 거울 앞에서 너무 많은 시간을 보냈다. 이제 우린 거울 앞에서 많은 시간을 허비할 만큼 한가하지 않다. 거울을 들여다보는 것 외에도 할 일은 많다.



[진금미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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