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그들이 찾은 여전사의 섬 [공연]

여전사도 여전사의 섬도 결코 멀리 있지 않다
글 입력 2019.03.26 2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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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극단의 <플래시 온 창작플랫폼>은 신진예술가 양성 프로그램인 <창작플랫폼-희곡작가>에서 선정된 작품을 멘토링과 낭독회를 통해 최종 개발한 연극을 무대화하는 공연이다. <여전사의 섬>은 2017년 <창작플랫폼> 프로그램에 선정되어 2년의 준비 끝에 무대화되었다.


 

[세종] 서울시극단_여전사의섬_단체.jpg



연극은 매번 실패의 기록만 쌓는 취업준비생 지니, 승무원이자 곧 남자친구와 결혼을 앞둔 하나 두 인물을 중심으로 흘러간다. 중년의 남성들이 더 큰 목소리로 애써 희망차게 자기소개서를 읽는 지니의 목소리를 덮고 무대 양옆, 지니와 하나보다 높은 곳에 앉는 도입부는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커다란 압박감을 주었다.


중년 남성은 젠더 권력, 나이 권력 모두에서 최상위 위치를 차지하는 집단이다. 특히 젊은 여성은 중년 남성 앞에서 아주 무력한 존재다. 지니와 하나가 제일 낮은 곳에서 아무리 몸부림쳐도 저 위에 거만하게 앉아 있는 중년 남성들을 이길 수 없다. 20대 여자인 나에게 그 모습은 곧 내가 사는 세상이었다. 연극은 도입부 장면만으로 두 인물이 어떤 위치에 서 있는지, 세상이 어떤 자세로 그들을 바라보는지 적나라하게 보여주었다.

 

그들이 겪는 일은 조금의 과장도 없는 현실이다. 그 현실에서 희망은 그림자조차도 보이지 않는다. 연극이 진행되어도 둘의 상황은 나아지기는커녕 더 나빠지기만 한다. 지니는 취직하지 못하고 카페 아르바이트라도 도전해보지만 ‘사회생활’이라는 이름으로 불의에 침묵하기를 강요하는, 흔히 ‘갑질’이라고 불리는 사장의 행동에 시달린다. 하나는 표면적으로는 능력 좋은 남자친구와 곧 결혼하는 행복한 상황이지만 그 이면은 엉망진창이다.


위선적인 태도로 하나를 억압하는 시부모, 불의에 맞선 대가로 해고 통보를 날리는 회사, 하나를 위하는 척 하지만 결국 폭력을 행사하는 남자친구까지. 그러나 이 연극이 여성의 힘든 현실을 전시하는 것에서 그친다고 할 수 없는 이유는 그들의 엄마, 여전사의 존재 덕분이다.

 

지니는 자신이 면접에서 떨어지는 이유가 엄마를 모르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자기 내면에 대답할 수 없는 질문이 있는데 어떻게 사람들에게 당당하게 자기 얘기를 하냐는 것이었다. 나는 그 말에 고개를 갸우뚱 거렸다. ‘결국 핑계 아닌가?’ ‘면접이란 건 어차피 면접관 귀에 듣기 좋은 대답을 하는 건데 굳이 엄마를 아는 게 필요한가?’ 라는 질문들이 머릿속을 떠다녔다. 그리고 아빠의 이야기 속에서 엄마, 그러니까 여전사가 처음으로 등장하는 순간 내 질문이 얼마나 초라한 질문인지 깨달았다.



[세종] 서울시극단_여전사의섬_엄마(김원정)2.jpg
 

 

홀로 낯선 땅에 있을 때에도, 한국의 결혼제도에 적응해야 할 때도 자신이 여전사임을 잊지 않았던 엄마. 지니와 하나에게 여전사인 엄마의 존재는 아주 중요하지만 엄마는 그들의 삶에 전혀 개입하지 않는다. 그저 그 존재만으로 지니와 하나는 더 당당해지고 자신을 더 아끼게 되고 내면의 여전사를 찾을 수 있게 된다.

 

처음 <여전사의 섬>의 줄거리를 읽었을 때, 나는 이 연극이 여전사를 찾아 떠나는 지니와 하나의 모험극일 것이라 생각했다. 연극이 모두 끝나고 무대 조명이 하나둘 켜지는 순간, 내가 잘못 생각해도 한참 잘못 생각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나는 나도 모르게 여전사의 섬이 저 멀리 먼 곳에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여전사가 우리 내면에 있듯이 여전사의 섬도 바로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이다.

 

운 좋게 공연을 보고 관객과의 대화 시간을 통해 연출자님, 작가님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세트, 소품, 의상 하나하나에 의미를 담아 섬세하게 제작했다는, 이 연극을 올리기 위해 2년 동안이나 열심히 준비했다는 말을 들으며 역시 예술은 그냥 탄생하는 게 아니라는 걸 느꼈다.

 

왜 하필 여전사라는 소재를 활용했냐는 질문에 페미니즘에 대해서 생각할 때 바로 여전사를 떠올렸다는 작가님의 대답이 인상적이었다. 내가 강남역 살인사건을 통해 페미니즘을 처음 접할 때, 느꼈던 감정은 절망이었다. 그전에 몰랐던 여성에 대한 사회의 폭력이 순간순간마다 너무 잘 보이는데 오히려 사람들은 내 시선이 예민하다고 하고 폭력을 폭력이 아니라고 포장했다. 그럴 때 여성들은 참 절망적인 세상에 살고 있다고 낙담했었다. 그러나 작가님은 그 강남역 살인사건에서 나처럼 절망하는 대신 여전사를 떠올린 것이다.



[세종] 서울시극단_여전사의섬_지니(허진) 하나(김유민).jpg



아마조네스의 여전사인 엄마 이야기보다 현실을 살아가는 지니와 하나의 이야기에 집중한 제작진들의 선택이 옳았다고 생각한다. 만약 아마조네스의 이야기가 펼쳐졌다면 나는 현실에는 없는 여전사의 섬을 갈망했을 것이다. 여전사도, 여전사의 섬도 모두 우리 내면에 있다는 연극의 메시지가 잃어버린 나의 여전사를 꺼내주었다.


 



[진금미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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