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이상함과 특별함 사이, '너드(nerd)'의 진실 [문화 전반]

글 입력 2019.04.03 0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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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주 전 내가 속한 어떤 단체의 회의 자리에서 있었던 일이다. 단체의 운영진이 회원들에게 공지 사항을 전달한 후 그에 대한 피드백과 여타 건의 사항을 수합하는 중이었다. 각자가 자신의 역할을 다하는, 평범한 회의 자리의 모습이었다. 문의 사항이 있는 사람은 질문을 했고, 운영 위원은 그에 답변을 했으며, 나머지 사람들은 대화에 귀를 반쯤 걸친 채로 흘러나오는 이야기들을 조용히 듣고 있었다. 그때 갑자기 누군가가 다수의 동의를 얻기 어려운 의견을 내놓았다. 발언의 구체적인 내용은 밝힐 수 없지만, 그것의 타당성과는 관계 없이 최후에는 묵살 혹은 비웃음만을 얻어갈 의견임이 확실했다.


그랬더니 또다른 누군가가 '분위기를 푼다'는 명목 하에 그의 의견을 웃어넘길 수 있는 '농담거리'로 만들어버렸다. 그는 여느 기민한 자가 그렇듯이 곧 얼어붙을 분위기를 되잡을 수 있는 마지막 기회, 그 찰나의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이 재빠른 대처로 회의장 안 공기는 활력을 되찾았고, 본능적으로 '갑분싸('갑자기 분위기가 싸해지다'라는 뜻의 신조어)'를 예감해 입 주위 근육이 굳어버렸던 나머지 회원들도 이내 웃음을 되찾고 문제의 그 발언을 '농담거리'로 만드는 데에 동조했다.


아주 특별한 일인 마냥 길게 적어놓았지만, 사실 이것은 일상에서 아주 흔히 볼 수 있는 장면이다. 관계의 평화와 균형이 중요한 우리들에게 일개 의견 하나쯤이야. 심지어 그 의견이 재미도 감동도 개연성도 없다면 집단의 힘을 조금 빌려 그를 묵살하는 것은 더욱 어렵지 않다. 그리고 웃음은 이러한 행위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완벽한 도구이다. 그리고 우리 중 이 잔인한 투석기를 가장 잘 놀리는 영리한 선수를 사람들은 흔히 '센스있다'고 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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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와 같은 집단의 선택은 아주 당연한 것일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우리가 노니는 대화의 생태계는 판단과 선호, 대상화와 순위 매기기, 그리고 그에 따른 게으른 폭력이 난무하는 곳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발화, 이미지, 대화 상황, 권력 행사 등의 다양한 자극들을 일차적으로 '좋고 나쁜지' 판단하고, 그 판단을 토대로 이 자극들을 여러 범주로 분류한다. 분류에는 특정한 기준이 필요하고, 이러한 기준은 암묵적인 합의로 쉽게 형성된다. 그리고 만약 그 기준이 일상에서 개인에게 폭력을 행사하게 되더라도 게으른 우리는 그에 대수롭지 않게 눈을 감아버리고 만다. 우리에게 일상이란, 쉽고 편한 것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좋고 나쁨'의 일차적 시그널과 그에 따른 가치판단을 매우 쉽게 받아들인다.

 

하지만 그런데도 어쩐지 불편한 감정이 드는 것은 우리의 이러한 습성이 '너드(nerd)'라는 단어로 대표되는, '이상함'을 '특별함'으로 해석하기 시작한 근래의 긍정적인 문화적 경향과 배치되기 때문이다. '너드'는 보통 비주류로 분류되는 일에 빠져 사회성이 결여된 채 다른 것에는 관심을 두지 않는 괴짜를 뜻하는 단어로, 과거에는 조롱이나 폄하의 의미를 담고 있는 말이었다. 그러나 최근에는 이러한 '괴짜스러움'에서 개성과 특별함을 찾으려는 시도가 계속되면서 해당 단어가 긍정적으로 해석되기 시작했다.


'너드'라는 부정적 의미의 단어를 의도적으로 사용하면서 자신의 특별함을 내보이려 하는 패션 브랜드나 음악 레이블이 생겨나고, '너드미(美)'라는 단어까지 유행하면서 사람들은 괴짜스러움에서 모종의 아름다움을 발견하기 시작했다. 빠르게 변화하는 사회 속에서 자신만의 개성을 찾는 것이 무척이나 중요해진 지금, '너드'는 자조와 해학, 그리고 개성 추구에 대한 열망이 담긴 일종의 매력적 돌파구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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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랜드 'NERDY' 로고


그러나 안타깝게도, 모든 '너드'들이 자신의 특별함을 인정받을 수 있는 것은 아닌가 보다. 수많은 '너드'들 중에서도 특별함에 대한 사회의 기준에 부합한 소수의 사람들만 재평가의 기회를 얻는다. 조금 전에 소개한 '너드미'라는 단어를 들여다보자. 미디어에서 소위 '너드미가 있다'고 평가되는 사람들은 괴짜스러움과 더불어 또 한 가지의 특성을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다. 바로 뛰어난 외모이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아직 숨겨진' 뛰어난 외모라 할 수 있겠다.


어떤 캐릭터가 자신의 관심사 외에는 그루밍을 포함한 아무 것에도 신경을 쓰지 않아서 '찌질하다'고 평가받지만, 동시에 그에 대비되는 '숨겨진 잘생김'과 순수함을 가지고 있을 때 사람들은 그를 '너드미 있다'고 평가한다. 괴짜스러움 하나만으로는 부족하다. '찌질함'에 가려진 수려한 외모와, 자신의 매력을 십분 발휘하지 못하는 것 같은 순수함을 함께 가지고 있어야 한다. 특정 분야에의 고집과 비상한 능력, 즉 '괴짜스러움'은 이러한 매력을 좀 더 부각시켜주는 요소일 뿐이다.


'너드미'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동안, 괴짜스러움에서 발견했던 특별한 아름다움은 어느새 다시 사회적 미의 기준에 종속되어버리고 만다. 이 기준에서 벗어난 수많은 '너드'들은 여전히 '찌질함'의 낙인에서 벗어날 수 없다. '너드미'의 서사가 주인공의 페이스오프로 귀결되는 경우가 많은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 설명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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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비단 '너드미'라는 단어에만 해당되는 일임은 아니라 믿는다. 옳고 그름의 문제를 떠나, 우리는 끊임없이 '다수의 기준'을 평가의 척도로 삼고 우리 주변에 있는 사람과 상황, 사물들을 이리저리 잰다. 다수의 기준에서 가장 벗어나있을 것 같은 특별함과 개성도 이 임의적인 기준에서 그리 자유롭지 못하다. 개성을 인정받기 위해서는 나의 특성이 다수가 정한 특별함의 조건을 충족해야 한다. 이 조건을 만족시키지 못한 수많은 '잠재적 특별함'들은 '이상함'으로 치부되어 잊히면 그만이다. 원하지도 않았는데 다수로부터 특별함을 인정받아 얼떨결에 스타덤에 오르는 사람들이 종종 등장하는 것도, 다수의 합의가 행사하는 이 억척스러운 힘 때문일 것이다. 특별함은 개인이 아닌 다수의 것이다. 그리고 다수에 의해 '너드'의 특별함은 그저 하나의 고착화된 이미지로 소비될 뿐이다.


내가 회의 자리에서 겪었던 일도 이런 인정받지 못한 '너드'들의 입지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그의 발언은 왜 농담거리로 치부된 것일까? 그래도 될 정도로 다수의 기준에서 '충분히 이상했기' 때문에? 아무도 말하지는 않지만 모두가 동의하는 이 기준이 폭력 행사의 도구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실체가 없는 이 '다수의 기준'을 취하는 우리가, 이를 벗어나는 '이상한 것'들에 대해 행할 수 있는 가장 쉬운 선택은 배척이다. 평범함 혹은 '평범함이 인정한 특별함'으로 사회적 인정의 영역에 들지 못한 기피 대상 괴짜들을 우리는 도무지 책임지려 하지 않는다. '너드'라는 지점에서 행해지는 것은 완전한 익명의 상태를 가장한 구체적 폭력이다. 우리는 왜 이 임의적인 척도에 기대어 수많은 '너드'들을 제멋대로 평가의 도마 위로 끌어올리고, 사회적 명예 획득의 가능성을 끊임없이 재단하는 것일까? 다수의 힘에 기대어 이상함과 특별함, 선호와 폭력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는 이 못된 기준을 우리는 한 번쯤 돌아보아야 하지 않을까?





[이승하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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